바벨의 자식들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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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는 나름 상식연하는 목사로 분류되어야 할 듯싶다. 그는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 교회 세습을 정면으로 비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었던 ‘높은뜻숭의교회’는 메가처치로 성장하지 않았다. 약 10여 년 전 교회를 분립, 즉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법정에서는 일이 있었다. 사연인즉 이렇다.

지난 2017년 포항에 지진이 났다. 이에 당시 자유한국당 최고 의원이었던 류여해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포항 지진에 대하여 문 정부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경고, 그리고 천심이라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결코 이를 간과해서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2017. 11. 16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 하늘이 진노하여 지진을 일으켰다는 말씀.

이를 두고 김동호가 한 방송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무당인가 그랬어요. 무당은 그런 소리 하겠지.” (2017. 11. 20 CBS 김현정의 뉴스쇼)

그러자 류여해가 김동호를 고소했다. 명목은 명예훼손과 모욕. 1년이 넘는 다툼 끝에 지난 4월 대법원의 판결이 났다. 결과는 김동호의 승소. 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넘어선 발언이 아니라며 김동호에게 배상 책임이 없다고 보았다.

누구는 이를 보고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라 할 테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해프닝인 셈.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감춰진 것이 있다.

첫째, 포항 지진을 하늘의 진노로 보았던 것은 비단 류여해뿐만이 아니었다는 점.

포항의 대학 가운데 유독 한동대의 피해가 컸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진원지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진이 발생한 포항 흥해읍 남송리에 한동대도 위치하고 있다. 헌데 이렇게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에 일어난 ‘영적전쟁’의 산물이라는 것. 얼마 전 한동대 인권법학회에서 퀴어신학 세미나를 진행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한반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진노가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에 먼저 나타났다나.

둘째, 하늘의 뜻을 해석하는 데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점.

뭐 대단한 게 있다고 포항 흥해읍 한동대를 콕 집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을까. 한적한 시골 마을에 뭐 선한 것이 있다고. 허나 따져보면 나름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법하다. 흥해읍은 이명박의 고향 마을로도 유명하니 말이다. 2017년 당시에는 이명박의 범죄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악독한 정치인의 고향에 하늘의 진노가 내렸다고 해석할 수는 없었을까?

셋째, 김동호를 고소한 것은 류여해만이 아니었다는 점. 이점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김동호는 류여해를 두고 무당이나 다름없다고 했고, 류여해는 내가 왜 무당이냐며 발끈 성을 냈다. 한쪽은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무당을 끌어들였으며, 한쪽에서는 무당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실상 둘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똑같은 언어의 인간인 셈이다. 가만히 있던 무속인들은 뭔 죄길래. 하여 무속인 대표들은 김동호를 ‘모욕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후속보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일이라 그럴 것이다. 그러나 법의 판단과 무관하게, 그들의 질문이야 말로 중요하다. 왜 무당이라는 말로 상대를 비난하며, 왜 무당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냐는. 실상 이 사건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김동호나 류여해도 아닌 무속인들이었다.

김동호의 발언을 더 보자. 그는 류여해를 두고 “하늘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라 비난했다. 좋다. 그러나 하늘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어째 무당이어야 할까? 무당(巫)은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신령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 아닌가. 작금의 시대에는 목사야말로 하늘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닐지. 그러나 목사는 여전히 세간의 비난에서 빗겨나 있다.

하여 모든 기사는, 김동호 ‘목사’라 지칭한다. 오래전 은퇴했으나 여전히 성의聖衣를 벗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이름이 교회 안에서는, 기독교 판에서는 여전히 김동호 ‘목사님’이라 불린다는 점을 짚어두자.

오래도록 교회는 계몽의 산실로 기능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서구 문물의 수입 통로였다. 전통과 구습, 무지와 미몽에서 사람들을 깨워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회는 발 빠르게 변하는데 교회는 사회의 변화를 도무지 뒤쫓아가지 못한다. 도리어 변화를 못마땅해하며 옷자락을 잡아채거나 다리를 걸어서라도 이 변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은 이런데도 여전히 기독교는 문명의 얼굴을 하고 상대를 야만의 세계로 밀어뜨려 버린다. 그 반대편에는 그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방 종교인, 세속의 무리 등등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한 기독교인의 발언이 SNS에 화제가 되었다. 내용인즉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다양한 인권 운동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좌절하는 지를 보여준다. 바로 신에게 대항한다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누군가는 감춘 채.

성서는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쌓았고, 바벨탑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제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 말한다. 그들은 왜 탑을 쌓았을까? 신에게 대항하고자? 아니, 어쩌면 세상 사람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내가 바로 신과 가깝다는, 신처럼 저 위에서 쩌렁쩌렁 소리치기 위해.

오늘날에도 바벨의 자식들은 탑을 쌓고 있다. 문명과 계몽의 언어를 점유한 채, 신성을 독점하고. 신의 이름으로 문명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며 멸시를 포장하기 위해. 그러나 성서의 말처럼 탑은 무너져야 하며 우리의 언어는 무수히 쪼개져야 한다.

하여 다른 말, 바벨 이후의 말을 상상해야 한다. 김동호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하늘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것이 마치 목사와 같다고. 아니, 목사님이나 다름없다고. 고소 없이 아름다운 결말이 있지 않을까? 아차차! 여자 목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또 한바탕 난리가 날까?

2019.06.04. / 07.12 뒤늦은 수정 및 발행

기픈옹달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