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종교와 혼동하고 문학을 자기변명과 혼동하고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

수년 전 인문학을 함께 공부했던 여자였다. 소식이 두절된 채 몇 해가 지났고 며칠 전 뜬금없이 여자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어떻게 지내냐고 커피 한 잔 하겠냐고. 마주 앉자마자 여자는 “나는 요즘 문학을 읽어요.” 했다.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학생용 문학전집으로 독서의 맛을 들였다고 했다. 그때의 책은 학생용이라고 특별히 배려된 바 없었으니 그림도 없고, 누런 종이에 글자 크기도 깨알 같았던 책을 여자는 읽고 또 읽었다. 좋아하는 책을 마음대로 사볼 수 있는 시절도 아니어서, 읽는데 맛을 들인 후 여자는 책장을 채웠던 다른 책들을 읽어나갔다. 전혜린의 수필집이나 이해인 수녀, 법정스님의 잠언집은 너무 좋아서 표지가 나달나달해졌다.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가슴을 벌렁거리게 하는 시드니 셀던류의 소설들도 읽었지만 여자는 언제나 다시 저 잠언집으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을 출렁이게 만드는 파도 같은 책을 여자는 두려워했다. 두려움을 잠언집의 평온함으로 눌렀다. 파도는 어차피 잔잔해지고 말 일시적인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그 즈음부터 여자는 바깥보다는 안을 좋아했다. 움직이기보다는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겨있는 때가 많았다. 삶을 충분히 경험하기도 전에 여자는 사는 게 시끄럽고, 잔인하고, 무지하고,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인간은 필시 삶을 부정한다. 그의 삶은 피안彼岸에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안此岸이 평온하고 아름다우려면 독한 단련이 요구된다. 그것을 마다한 평온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과 다른 타자는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여자는 남들만큼 학교도 마쳤고, 잠깐이나마 외국물도 먹었고, 찐한 연애 경험도 몇 차례 있었다. 느지막이 결혼도 했고, 애들도 낳았다. 만약 평온함을 꿈꾸었던 과거의 여자를 간직한 채였다면 여자의 내면은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으리라. 차안에 대한 동경이 현실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여자도 말했거니와 인문학당에 발을 들인 건 수순이었다. 독서가 가장 쉬운 일이었던 여자는 일종의 사회적 책임감이 느슨해지자마자 책으로 눈을 돌렸다. 한창 인문학이 붐이었던 시기, 인문학당에서 제시하는 철학책들을 여자는 수도자들의 잠언집과 별다르지 않게 읽었다. 아니 그렇게 읽고 싶었다. 부침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고 싶었다. 여자의 바램은 당연히 인문학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는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그곳에서 더욱 격렬하게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여자가 인문 독서로부터 얻으려고 했던 것은 평온이었다. 인문학이 실은 투쟁하는 삶에 더 가깝다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여자가 평온을 주는 것으로 읽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 그러나 여자는 인문학 공부에서 제대로 평온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읽은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진리 없는 세계의 복잡성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각각의 존재들이 어떤 자기진리를 구성하면서 살아갈 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렇기에 평온이 아니라 더욱 날카롭게 세계를 주시할 것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깊이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정신은 더욱 시끄러워진다.

여자는 이 시끄러움을 잘못 이해했다. 이 시끄러움은 여자가 자기만의 성을 허물고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다. 여자는 철학책을 독자적으로 오독하여 평온을 얻지도 못했고, 철학이 자신의 평온에 대한 열망을 비하하고 다른 평온의 기준을 강제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여자가 문학을 읽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복잡성과 차이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러한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맘대로 사는-여자가 자신만의 평온을 지키는- 존재들의 세계로 문학 또한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갑자기 문학이에요?” 하는 내 물음에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문학 속에는 있는 대로 자기 감정을 드러내고 사는 사람, 고통에 취약해서 회피하고 사람 앞에서 주춤거리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자기 삶에 질서를 부여하며 깐깐하고 단정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욕심스럽게 먹어치우고 쓰러뜨리고 전진만을 목표로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들에 위계는 없었고, 결국 모든 삶들은 스러져가고 잊힌다. 나는 인문학당에서의 공부가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삶들에 위계를 세우는 것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싫었다. 인문학당이 무슨 종교집단 같았다.”

수도자의 잠언을 무엇보다 좋아했다고 한 사람이다. 종교집단이 자신의 논리로 평온을 선사한다면 여자에게는 그거야말로 땡큐 아닌가? 그러나 여자는 거부했다. 그렇다면 여자는 수도자의 평온함 역시 곡해하고 있다. 그 평온함은 영원히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평온함이 아닌데. 줄타기 곡예사의 줄 위의 평온이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곤두박질 칠 위험 속에 있듯이,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곡예사가 온갖 심신의 파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있듯이 수도자의 평온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혹 여자가 원하는 평온함이란 ‘묻지 마 평온, 건드리지 마 평온’은 아닌가.

과거의 여자는 내게 신중하기보다는 심각해보였고, 고요하기보다는 어두워보였다. 내놓는 말은 드물었지만 할 말이 없어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몰랐던 사람처럼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때로는 몽상 같았고, 또 어떤 때는 너무도 정확하게 맥락에 부합했다. 그녀가 쓴 글은 이 정도면 병이다 싶을 만큼 자기 안에 갇혀 상상의 나래를 편 흔적이었고, 어떤 때는 정확한 논리를 갖춘 신선한 해석이기도 했다. 여자에 대해 사람들은 지성과 먼 사람이라 했다가 기발한 사람이라고 했다가,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듯 사람들도 그랬다.

여자는 문학 속에서 자기와 비슷한 유형을 많이도 발견하고 있다 했다. 그럴 것이다. 문학이 형상화하지 못할 게 있겠나. 그녀는 그 자체로 문학적 캐릭터였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더욱 딱딱하게 만드는 용도로 문학이 소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자를 보면서, 그녀의 바램과 혼동 속에서, 내 공부의 과거와 현재를 나도 보았다.

지니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

1 thought on “철학을 종교와 혼동하고 문학을 자기변명과 혼동하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