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세계를 지배하고, 독서가 여성을 배제한다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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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서점 알라딘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20주년 기념으로 알라딘이 내가 책을 구매한 실적을 각종 통계와 함께 알려주었다. 독서는 외로운 작업인지라, 그 작업의 일부를 함께하고 공유해준 알라딘의 상술이 기특하고 고마워 잠시 통계를 감상해본다.

알라딘이 알려준, 나도 몰랐던 내 정보를 한번 요약해 보자. 나는 알라딘에서 지금까지 298권의 책을 샀다. 예상보다 많지는 않다. 좁은 집 곳곳에 애물단지처럼 쌓인 책들을 보면 체감 상 298권보다는 훨씬 많지 싶은데, 정확한 통계 앞에서 체감은 맥을 못 춘다. 집이 좁으니 뭐 하나 사서 들여놓을 때마다 벌벌 떠는데, 책이라고 다를까 싶다. 거기다 내가 지금까지 알라딘에 책값으로 지출한 돈은 4,711,440원에 이른단다. 역시 체감보다는 적은 액수다. 빠듯한 살림에 수만 원 책값이 부담스러워,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몇 달을 별러서 샀던 책도 많다. 300권 좀 안 되고, 500만원이 채 안 되는 금액. 그게 20년 간 내가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한 실적이다. 물론 다른 서점 이용한 것은 제외하고.

그럼 이 실적은 알라딘 전체회원 실적 중 어느 정도에 해당할까. 내 실적은 0.86%, 상위 1% 안에 드는 수치다. 여기서부터 조금 놀랐다.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구매한 분야의 책은 서양철학, 전체 실적의 14.43%를 차지한다. 문학과 인문교양 등이 그 다음 많이 구매한 분야에 해당한다. 그 아래에 이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당신이 속한 40대 여성 회원들이 가장 많이 구매한 분야는 동화/명작/고전, 그림책, 초등 전학년입니다.’ 뒤통수를 한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통계는 더 충격이다. 내가 가장 많이 구매한 서양철학 분야의 책은 알라딘 회원 중 3,324번째로 많이 구매했고, 40대 여성 회원 중에서는 332번째다.

가장 많이 구매한 분야라고 해봤자 43권에 불과하다. 이 43권으로 나는 알라딘에서 서양철학 분야의 책을 332번째로 많이 구매한 40대 여성이 되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40대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기에. 물론 40대 여성 대부분이 서양철학에 관심이 없을 수 있고, 한 온라인서점의 통계를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 대입하여 이야기하기에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우리나라 40대 여성 중에는 서양철학을 전공한 이도 제법 될 테고, 심지어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다.

40대 여성들 대부분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단서 역시 알라딘이 제공해줬다. ‘당신이 속한 40대 여성 회원들이 가장 많이 구매한 분야는 동화/명작/고전, 그림책, 초등 전학년입니다.’ 40대 여성 회원들은 자신의 전공이나 직업, 취향과 관계없이 주로 아이들의 책을 구입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육아에 시간이나 힘만 쏟는 게 아니다. 육아를 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지적인 흥미나 공부에 관한 열정 또한 아이를 향해서 쏟는다. 자신과 아이에게 나눠서 쏟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간과 돈과 열정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이 보내온 40대 여성의 독서통계는 여성의 독서경향에 대해 많을 것을 보여준다. 40대 여성의 독서에서 개인의 성향보다 중요한 문제는, 육아를 개인과 가정 내의 일로 한정하려는 사회·구조적 한계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여 아이의 공부 지원에 이용해야 하는 40대 여성의 책 소비 형태에서 개인의 독서 성향이 언급될 여지는 아주 적다. 그러니까 책을 읽지 않는 40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사서 읽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40대 여성의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책을 사서 읽는 일은 돈이 들고 공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독서는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몹시 사치스러운 일에 속한다. 내가 스스로 ‘책을 너무 많이 샀다’고 자주 자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책을 사느라 너무 많은 돈을 썼고, 그 책을 둘 데가 없어서 고생한다. 다른 여성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다. 아이 놀이방과 동화책을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서재와 책 구입을 기꺼이 포기한다. 중년의 남성들이 일종의 로망처럼 서재를 꾸미려 하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모으는 일과 비교된다.

40대 여성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독서를 하지 못하는 일은 왜 문제일까. 독서가 지식과 연결된다면,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 여성들은 자신의 전공이나 직업, 취향과 관련된 독서에서 멀어지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지식을 다루는 학문의 모든 분야들에서 여성들은 오랫동안 배제되었고, 독서의 경험과 분리되는 여성들의 삶으로 인해 앞으로도 배제는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독서가 권장된 적은 없었다. 여성이 비로소 글을 읽고 책을 쓰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독서와 집필은 남성을 보조하고 남성이 역량을 발휘하지 않는 영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독서와 집필이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적도 없다. 지식을 다루는 모든 방식은 남성 위주였고, 언제나 대상을 남성으로 상정했다. 여성들이 독서에 흥미를 가지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독서를 하지 않을수록 삶이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앞의 여성이 아무것도 모를 테니. 자신이 무언가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믿는 남성을 21세기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마주치는지. 그런 남성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면 호감을 얻지만, ‘당신이 아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고 알려주면 돌아오는 것은 대개 반감뿐이다.

1929년 출간된 강연록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를 언급한다. 그 두 가지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평생 동안 가족을 돌보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여성들은, 거실 한 구석에서 짬을 내어 겨우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했던 여성들의 삶과 21세기 이 땅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은 과연 많이 다른가.

자기만의 방도, 책을 읽을 시간도, 자신을 위한 책을 살 돈도 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이 대부분일 거라 짐작된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졸음을 쫓으며 주방 식탁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19세기와 20세기 여성들의 삶이 그러했듯, 21세기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사치스럽고 버거운 일이다. 아무리 사치스럽고 버거워도 육아에 파묻혀버린 이들의 독서를 응원하고 싶다. 아이의 크레파스 자국이 남고, 김치찌개 냄새가 배어있을 그들의 독서를.

삼월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

2 thoughts on “책이 세계를 지배하고, 독서가 여성을 배제한다”

  1. ‘본인이 하고 싶다면 뭐든 못할까? 그것이 독서는 책을 사는 일이든…’ 이렇게 어떤 사안이든지 개인의 역량 문제로 해석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있다. 이는 욕망은 언제나 실현된다는 관점을 따른 것인데 반해, 글쓴이 삼월은 그 욕망의 형성이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결국 하고 싶은 걸 하지만 그 하고 싶은 것이란 구성된 것이라는 관점, 만약 여성에게 전적인 육아가 부과되지 않았다면 애들 책을 사읽는 40대 여성의 비율이 이렇게 큰 포션을 차지하지 않았을거라는 점, 만약 애초에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었다면, 여성에게 경제권과 가정 내의 주도권이 분배되어 있었다면 더 많은 여성이 책을 읽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삼월은 작금의 이런 조건 하에서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는 여성을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결과를 유발하는 단순한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양적으로는 책의 바다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다. 하나도 겨우 낳는 상황에서 여아라고 교육을 덜 시키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돈 투자나 자기만의 방 역시 마찬가지. 여아들에게 주어지는 독서의 환경이라는 것은 40대 여성들의 과거와는 큰 차이가 있다. 왜 아이들은 이런 환경에도 독서에 대한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일까. 욕망은 정말 ‘결핍’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인가.

    독서인구의 극감 문제는 이제 돈과 공간과 여성차별의 문제를 더 넘어서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물론 글에서 삼월은 40대 여성 독자의 문제에 한정해서 이야기 했다) 디지털세상의 문제- 휴대폰과 함께 도래한 영상 세대- 아마도 이게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꼽혀야 하지 않을까. 이 요인을 가져오면 책의 의미도, 독서의 형식도 재정의해야 할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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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습니다. 독서의 형식도, 의미도 재정의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 정의 이전의 지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욕망 이전에 일어나는 사회적 배제 말입니다.
      사회는 특정 구성원을 배제함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켜갑니다.
      모두가 할 수 있으면 가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식과 관련된 영역은 특히 그렇습니다.
      여성이 독서를 욕망하고 안 하고 이전에, 사회와 가정이 여성의 독서를 응원하지 않습니다.
      이건 명백히 배제이고 차별입니다.
      현재 독서 인구는 급감하고 있는게 아니라 급증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 땅에서 인문학 책이 이보다 잘 팔린 시대는 없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인문학도, 독서도 노동자의 스펙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여자아이들도 책을 읽고, 대학을 가는 시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랬던 이들이 40대가 되니 아이들 독서와 교육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싶었던 거지요. 안타깝기도 하고요.
      하나의 결과를 유발하는 단순한 원인이란 말씀하신 대로 없습니다.
      그런 원인을 찾아보리라는 포부도 저에게 없고요.
      다만 화가 나고, 안타깝고, 슬프고, 때로는 기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뿐입니다.

      꼼꼼하게 읽고, 긴 댓글로 이야기를 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도 외롭지만, 글쓰기도 못지 않게 외로워서 두 가지 다 언제나 친구가 필요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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