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이 아니다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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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노회찬과 그의 부모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노회찬의 부모는 부산 피난시절에도 단칸방에 살면서 오페라와 영화를 보러 다녔고, 나중에는 사진을 좋아하여 집에 암실까지 두었다고 한다. 도서관 사서였고 문화예술을 사랑했다던 그의 아버지는 1956년에 태어난 노회찬에게 어린 시절 첼로를 가르쳤다. 금전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를 아버지에게 배웠을 거라 추측하는 글도 읽었다. 그 글을 읽으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훗날 자라서 노동자들의 대표가 된 노회찬은 동료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밑도 끝도 없이 궁금해졌다.

가난하기 때문에 노동의 고단함을 짊어져야 했을 그 당시 노동자들의 삶. 가난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적 결핍만이 아니다. 좁은 집에 살면서 끼니를 굶거나 허름한 옷을 입는 게 가난의 다가 아니다. 가난에는 일종의 정신적 피폐함과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폭력성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노동에 찌들어 책이나 영화를 접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산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책이나 영화를 좋아할 때, 주저 없이 매를 들고 보란 듯이 책을 불태워버린다. 돈을 벌어 와야 할 자식이 공부를 하고 싶어 할 때도 마찬가지다. 노회찬이 나고 자란 세대에서는 아주 흔한 서사였다.

물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서울의 유명대학교에 입학한 노회찬이 꼭 그런 가난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갔다면 말이다. 그런데 노회찬은 2002년에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4년에는 비례대표로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지역구도 아니고 비례대표이니, 그야말로 동료 노동자들이 열심히 투표하여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수두룩하게 가난의 서사를 짊어진 노동자들이, 어릴 때 첼로를 배운 엘리트 노회찬을 말이다.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말하길, 이제 계급을 결정하는 건 돈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란다. 계급을 나누는 건 자본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부르디외는 이 자본을 더 복잡하게 여러 가지로 나누었다. 바로 경제적 의미의 자본과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이다. 문화자본은 지식, 기술, 취향 등을 말하고, 사회자본은 인맥, 상징자본은 명예나 위신이라고 이해하는 게 쉽다고 들었다. 지식, 기술, 취향, 인맥, 명예도 자본이라니. 언뜻 낯설게 들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야기였다.

고전적 의미의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나뉜다. 공장주와 임금 받는 공장노동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뭐 이런 식으로 단순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런 식의 계급 분류가 와 닿을까? 임금 받는 노동자이지만 고액연봉자라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중소기업이나 가게를 운영하면서 경영난을 겪어 임금노동자 못지않게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만으로 계급을 말하기 어려워진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공장이나 토지 등 생산수단 이외에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들도 계급을 분류하는 자본으로 보자고 했다. 생산수단은 소유하지 않았지만, 지식이나 기술, 고급취향, 인맥,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물론이고 한동안 지겹게 이름을 들어야 했던 조국 같은 사람도 여기에 속한다. 아마도 진보정당의 대표나 얼굴 격으로 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자본은 없어도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은 가지고 있을 게다. 경제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가진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은 더 빛이 난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구하고, 자신들의 말을 대변해주길 바란다. 그들 중 하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말에 수상한 이야기들이 들려와도 편들어주기 바쁘다. 심지어 검찰청 앞에서 ‘내가 조국이다’를 외치기도 한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일이다.

내가 이재용과 친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이재용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 때문이다. 나는 그 선을 넘고 싶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나는 조국이 될 수도 없고, 조국과 친해질 수도 없다. 명백하게 나는 조국이 아니다. 노회찬이 아무리 노동자의 대표를 자처해도, 노동자인 나는 노회찬을 나의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그들이 가진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이 나와 다르다. 그들이 죽은 노동자인 전태일을 기념하면서 지금 살아있는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일이 하나도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들은 나와 다른 계급이다.

그들이 흔히 말하는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조국의 자녀들 이야기가 나올 때 누군가는 조국을 옹호한답시고 나경원의 자녀들 이야기를 한다. 비슷한 도덕성으로 경쟁하고 비슷한 공약을 내세우면서 비슷한 정치를 하는 데, 도대체 진보와 보수가 무슨 의미가 있고 차이가 있단 말인가. 시대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검찰이 작정하고 털면 조국처럼 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말한다.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주변엔 분명하게 없다. 자식들에게도 석연찮은 추천서나 인턴 경험이 없고, 사모펀드는커녕 주식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국민들이 무지하니 자신들이 알려줘야 하고, 끌어줘야 하고, 입장도 대변해줘야 한다고 믿는 걸 보니 하나는 확실해졌다. 그들이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을 가졌음이. 그것들을 가진 자가 때로는 나에게 도움이 될 순 있어도, 나를 대변하거나 내가 될 수는 없다. 전태일은 살아생전에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는데, 한때는 애틋하던 그 말이 요즘은 다르게 다가온다. 왜 전태일은 자신이 대학생이 되고자 하지 않고, 대학생 친구를 두길 바랐을까. 대학생이 되면 그전과 같이 세상을 볼 수 없게 됨을 알았던 게 아닐까.

삼월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