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강박을 벗어나게 하는 미셸 푸코

그 곳은 따뜻하고 칼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거기를 비추는 태양은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들뢰즈, 루쉰이었고 그 태양들을 등에 업은 그림자들이 안심하며 살고 있다. 간간히 그러나 일상적으로 휘몰아치는 매서운 칼바람은 다른 태양을 섬기는 정신들이 출현할 때를 놓치지 않는다. 종교와 자본을 모시는 정신들에 가하는 정의의 칼날은 차라리 귀여울 지경이고 진부하다. 시시각각 아주 섬세하게 모든 말들을 주시하며 그 말들 뒤에 ‘누가 있는지’를 보고싶어하는 눈들이 사실상 더욱 깊게 벨 줄 안다.

각각이 다른 정신들은, 자신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섬긴다 해도 오직 그것만을 섬긴 것도 아니었던 정신들은 그 안에서만 작동하는 말과 글에 정신 못 차리게 썰린다. 무지와 무질서한 정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곳에서 비추이는 저 태양을 알게 되기를 그 태양이 이 정신에게 질서를 부여하기를 욕망한다. 그곳에서 통용되는 말과 글을 떠듬떠듬 쓸 줄 알게 되었을 때는 잠시나마 따뜻했다. 그 따땃함 때문에 거기를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물고 싶었다.

좋은 앎에 대한 선한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정신이 바깥의 다른 딱딱하게 굳은 정신과 똑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거기를 나와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한껏 칼부림을 당하고 간신히 그 끄트머리를 쥔 칼자루로 무수히 자해를 한 끝자락에서야.

‘인식하라’는 철학적 강박

이 칼날의 정체는 ‘인식하라’는 명령이다. 철학에서 진리는 신과 함께 니체에 의해 사망선고를 받았으나 철학은 인식에서 자신이 나아갈 바를 다시 찾았다. 무지와 무질서한 정신이 자신의 그 무지와 무질서를 인식함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자의 어떤 정신 상태로 즉 참된 관념(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푸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이 고대의 철학자로부터 인식은 진리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 푸코는 진리와 인식의 친연관계를 문제시하게 된다.

“내 생각에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욕망에서 인식으로 가는 이행이 실현되려면 진리가 있고, 있어야 한다.…… 진리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진리는 욕망에서 인식으로 가는 이행을 보장한다. 진리는 반대로 그리고 거꾸로 욕망에 대한 인식의 선차성을 정초한다. 진리는 욕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야기한다.(『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2강)”

진리 안에서만 인식을 위해 욕망은 포기될 것이다. 진리 안에서만 인식은 욕망보다 진리에 가까이 자리하며, 그리고 진리 안에서 인식은 욕망될 뿐이다. 인식욕. 욕망-인식-진리 사이의 관계는 진리에 기대어 돈다. 진리가 아니라면 인식이 욕망보다 나을 이유가, 인식이 추구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어떤 지식인도 더 이상 진리를 말하지 않는 시대다. 진리가 어디 있냐며, 진리는 발명되는 것이라고 오히려 성을 낼 정도다. 그러나 푸코는 여전히 진리가 서양철학을 지배하는 핵심 요소임을 본다. 그 진리의 자리는 ‘인식하라’가 차지했다.

   

인식하라는 요구는 진리를 향해 있는 한, 요구받는 정신을 언제나 둘로 갈라놓는다. 격려로 받아야할 지 아니면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무지와 무질서한 정신에게 혼란은 가중된다. 그러나 격려와 비판은 동일하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상정되어 있는 한. 인식하라는 말은 목적과의 거리를 상기시키고, 그 거리는 떠올려지자마자 인식하라고 다그치는 쪽이나 인식하고자 하는 자를 강박적으로 만든다. 필연적으로 강박적이 된 육체는 쪼그라들고 어떤 말도 행동도 주춤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말과 행위를 스스로 감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망상, 인식하라는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규율권력이다. 

규율 권력에 대한 자각과 함께 푸코의 연구는 달라진다. 시기적으로 68년과 70년대 초를 지나면서였고 그때 쓴 『지식의 고고학(1969년)』과 『담론의 질서(1970년)』는 향후 그의 분석이 지향할 바를 제시한다. 1976년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더 이상 ‘금기, 터부, 억압, 배제, 침묵’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라는 명령, 담론화, 담론적 카테고리 설정”등을 성문제와 연관시킨다. 푸코가 성을, 금기하는 권력이 아니라 금기와 그 효과를 포괄하는 권력에 대해서 즉 터져 나오거나(제한 될) 담론들까지도 조종의 대상에 넣는 권력에 대해서 말할 때, 진리 곧 인식의 담론화 과정 역시 그와 똑같은 메카니즘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을 말할 때 우리는 모두 다소간 어떤 포즈를 취하면서 말한다. 기존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식을 갖거나, 자신이 전복적임을 과시하는 어조를 취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현실을 회피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열기를 보이는 것이다. 반항, 약속된 자유, 현재와는 다른 법이 지배하는 새 시대의 도래 같은 것들이 성의 억압이라는 담론 속에 손쉽게 끼어들어 온다. 예언이라는 과거 시대의 기능이 거기서 되살려진 듯이 보인다. 그 잘난 성이여, 안녕.(『앎의 의지(1976)』)

위 인용문에서 ‘성’을 ‘진리(인식)’로 바꾸어 다시 읽어보아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인식하라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전복적임을 적어도 전복적인 공간에 속해 있음을 과시하는 어조를 취한다. 인식해야 할 것은 기존의 질서이며,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 뼈 속까지 물들어 있는 너희들 자신, 무지하고 무질서한 정신의 자식들이다. 인식 담론 속에는 필연적으로 자기에 대한 부정, 그러나 앞으로 도래할 자유가, 현자의 삶이 약속되어 있다. 아직 자유롭지 않다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해부하지 본인의 책임이며, 인식하지 못해서이지, 인식하라는 정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인식 무용론자가 되겠다

나는 ‘인식하라’는 요구에 반대한다. 인식의 조건은 언제나 동요다. 그것도 슬픈 동요, 나쁜 동요다. 인식은 그 부정적인 사태에 집중하고 분석해서 말하고 쓰기를 요구한다. 인식의 결과는 근거 없음이다. 다만 동요되는 내 신체, 내 신체가 자신의 딱딱함으로 대상을 규정해버린 내 전제, 나의 환상이 문제다. 그것만이 즉 내 신체만이 문제라는 알게 하는 게 인식의 언제나 동일한 결과다. 아무리 인식해도 신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반복된다. 인식강박증자의 답 역시 언제나 동일하다. 신체는 원래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더’ 인식하다보면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나는 그럴 시간에 나를 기쁘게 동요하는 것들에 집중하겠다. 만약 무엇을 위해서 다른 무엇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슬픔을 분석하기 위해서보다는 기쁨을 더 잘 만끽하기 위해서 포기하겠다. 기쁨도 슬픔만큼이나 변화무쌍한 감정이라 잘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이 요구된다. 푸코가 죽기 2년 전에 쓴 『주체의 해석학』은 기원 후 1,2세기 헬레니즘·로마시대 철학자들의 자기배려 기술을 보여준다. 자기배려는 언제나 자신에게 맞는,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구축하는 게 목표였다.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서야 구원(자유)을 얻게 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개인이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되는 일은 수도원의 공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칼바람 몰아치던 공동체의 기억은 잊을란다. 진리는 없다고 외치는 그들은 ‘진리는 없다’를 진리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비판하는데 능한 자들이다. 그곳은 종교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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