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 짜리 열등감 “나”와 “너”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대부분 다르다. 여기서 대부분이란 지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쩌다 맞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지점에선 다르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지점이 다르기에 이런 불일치가 발생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나의 생각과 고민을 근거로 상상된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나의 외면과 말로 추측된다. 안에서 상상되는 나와 밖에서 추측되는 나는 대부분 다르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어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거나 혹은 타인이 나처럼 하루 종일 나에 대해 고민해줘야 하는데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라 해도 이 지점에는 이르지 못한다. 대게는 나라는 렌즈에 투영된 만큼만 보고 당시에 가진 감정이란 필터를 덧입힌다.

 

나의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대학생활은  인문대학에서 상경대학으로 전과하여 아는 선후배 없이 혼밥을 하고 쓸쓸히 캠퍼스를 지나다니며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돌아간 반복의 시간이었다. 그 당시의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매사 부정적이었으며 서울 출신 학생들에 대한 지역적 반감과 열등감으로 가득 찬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그래서 대학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 않고, 타인은 나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생각한 것을 넘어 믿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대학 동창 혹은 선후배들이 나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훅 치고 들어오는 당혹감이다.

“인선아, 내 친구가 너 안대. 너랑 같이 경제학 수업 들었대”

“설마…모를걸? 나 그때 취업 안돼서 진짜 투명인간처럼 지냈어. 나 그 수업은 뭐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

“아니야. 너 맨날 지각하면서도 앞문으로 들어와서 내 친구가 너 확실히 기억한대. 너 진짜 포스가 쩔었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트린다. 타인의 기억 속의 나의 모습은 조별 과제 때 점수 1점 가지고 복학생 선배와 목에 핏대 세우고 싸우고, 상금 10만 원이 탐나 기숙사 축제 때 500명 앞에서 이효리의 ‘애니모션’을 혼자…혼자 춘 이미지다. 물론 상금은 받았다. 내가 기억하는 대학생 나는 아웃사이더인데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관종도 이런 관종이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난 것일까? 왜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온도는 이렇게 큰 것일까?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생각하는 주체가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서로 간의 발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온도차를 높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열등감에 대해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고 타인은 나의 보이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나를 규정 지음에 있어 생각하는 주체가 달랐기에 방향이 달랐고 이를 표현하거나 말하지 않았기에 섞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활을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깍쟁이들과 경쟁해가며 외롭게 공부했던 회색의 톤으로 생각했고, 그로 인해 얼굴에 배어난 열등감과 불안함이 까칠함으로 발현되어 타인에게 개쌍마이웨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어쩌다 동창을 만나면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고 자신의 기억을 의심한다. 과연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았던가 아니면 시간이란 퇴색에 바래 지금의 기억이 달라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물론 당시의 자신의 모습과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달라지고 점점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멀어진다. 지금 순간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감정에만 몰입해 판단하지만 하루가 지나면, 한 달이 지나면 앞뒤의 시간이란 맥락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 나를 나로 생각함에 있어 시간이란 맥락이 원인 결과로 이어져 서사를 만든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난 나는 애처롭기도 하고 찌질하기도 하다. 순간의 나보다 거리감을 가지는 것이 시간이 지난 후의 나이고, 그보다 더 멀리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보이는 흐릿한 나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타인이 가지는 거리감이다.

어쩌다 나는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보게 되면 당황한다. 나를 안다고 생각하고, 나로서 살아왔지만 인지하지 못한 내 모습을 마주할 때면 다른 사람인 것 같아 놀란다. 가령 이런 경우이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으로 폐쇄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믿었던 내가 2주 안에 집안 물품을 다 팔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물건을 팔았다. 아프리카 출신의 학생에겐 1+1으로 서랍장을 팔아넘기고 중동 출신 커플에겐 접시를 상자째 담아 무료 나눔 했다. 당시 나는 국적과 인종이 아닌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했다. 나라는 사람은 목적 앞에선 두려움이 사라지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신기하고 낯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는 생각보다 자주 튀어나왔다.

이렇게 나와 나는 늘 다르다. 나로 매일을 평생을 살아도 나는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서술하기 힘든데 타인이 대신이 해 주길 바라는 건 자기 탐구에 대한 무책임한 포기이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고 타인은 나를 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걸 알지만 순간에는 견디지 못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시간이 지나서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이면 진짜 나에 가까워지는가?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에 대해서 알고 정확히 서사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나만큼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그렇고 ‘열등감에 찌들어 사람 싫어하던 사람이 왜 기숙사 축제에서 ‘애니모션’을 췄냐?’라는 질문이 나온다면 아까 말했듯 상금이 10만 원이라서. 13년 전 10만 원은 대학생한텐 큰돈이었다. 21살의 내 열등감은 10만원 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