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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중의 세계사> 6/22 발제문 (4.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삼월 / 2016-06-21 / 조회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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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세계사> 세미나는 모든 세미나원이 발제를 조금씩 나누어서 합니다.

아래 분량은 내일 세미나에서 제가 맡은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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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고대세계


4.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기원전 9세기 그리스는 미케네의 문명과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문자나 기술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고, 기근도 잦았다. 새로운 문명의 동력은 철의 가공이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농업기술이 발견되고, 상업이 성장했으며, 수공기술도 개발되고, 알파벳 문자 체계도 정립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같은 건물을 창조했고,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막을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출현했다.


 그리스가 인도나 중국 문명과 달랐던 점은 바다를 통해 다른 문명들과 직접 접촉했다는 점이다. 페니키아와의 해상 무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제국의 기술과 지식이 전해졌고, 중동의 역대 제국들과도 교류했다. 무역과 외국군대에 고용된 그리스 용병들, 제국에 거주했던 그리스 망명자들이 교류를 지속시켰다. 그리스의 알파벳도 페니키아인들이 사용한 셈족의 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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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그리스의 식민지들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리스의 토지 부족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식민지로의 진출이 활발했다. 지중해 연안과 에게 해 연안, 이오니아 제도, 흑해 연안과 소아시아,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 해안지방까지 그리스 농민들이 진출했다. 식민화는 무역의 확대로 이어져 수공업도 발전했다. 기원전 6세기 농어민 촌락은 도시국가들의 연결망으로 발전했다. 도시국가들은 무역을 위해 같은 알파벳을 사용했고, 비슷한 종교적 관습을 가졌으며, 올림픽 과 같은 공동의 축제를 벌였다.


 낮은 토지생산성 때문에 잉여를 늘릴 수 없게 되자 그리스인들은 노예를 노동력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없는 노예들이 생산을 담당하자 잉여가 늘어났다.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들이었으며, 나중에는 광산과 수공업장에서도 노동했다. 이제 그리스에서 노예는 잉여의 주요원천이 되었으며, 로마에서도 노예제는 이어졌다. 이와 달리 스파르타는 다른 도시국가와 달리 비옥한 내륙에 있었고, 노동하지 않는 시민 스파르타인과 농민인 ‘헬로트’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노예라기보다는 공물을 바치는 농노에 가까웠다. 형태는 다르지만 노예가 잉여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스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스 역사에서 노예 반란은 중국의 농민 반란만큼 두드러지지 않았다. 반란을 막기 위해 문화와 언어가 다른 노예들을 섞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헬로트의 농노들은 이와 달리 반란을 일으켜 해방에 이를 수 있었다. 한편으로 상업의 발달은 노예들을 관리하는 지주들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이 갈등은 부자가 통치하는 공화정의 형태-과두제-의 수립으로 나타났다. 옛 지배자들과 새로운 부자들은 더 많은 잉여를 위해 소농들을 가혹하게 착취했고, 과두제 공화정은 이를 묵인했다. 종종 시민들의 반감을 이용하는 야심가들이 나타나 독재자가 되어 대중들을 위한 개혁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계급의 변화는 없었다.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한 ‘민주주의’로의 대체였다. 이 민주주의는 노예와 여성, 상인과 장인인 비시민 거주자들을 배제한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민주정은 가난한 시민들이 자신을 보호할 힘을 제공했다. 기원전 594년 솔론 시대 이후로 아테네에서는 채무 노예가 금지되었고, 법률제정 권한이 있는 의회는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며, 판사와 하급관리는 선출직이었다. 권력을 제약당한 상층계급은 불만을 품었고, 민주주의를 음해하는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상층계급은 재력을 통한 군사적 수단으로 끊임없이 민주정에 맞섰고, 대부분 성공했다. 아테네가 200년간 민주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의 상업이 가난한 시민들로 구성된 해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5세기 말 30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 패권을 놓고 다투는 동시에 도시국가 내부에서의 민주정을 둘러싼 계급투쟁과도  맞물려있었다. 이것은 사회조직 방식에서 서로 대립하는 사상들의 충돌이기도 했다. 사회격변과 계급적 긴장은 그리스의 문학·과학·철학의 위대한 업적을 가능하게 한 토양이었다. 플라톤은 진리가 인간의 경험 밖에 있으며,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철인들이 사회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반박하며 사회에 대한 실체적이고 경험적 지식을 강조했다.


 거대한 관료기구에 짓눌리지 않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역동적이었고, 전쟁 시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충성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단결해 침략군을 물리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더대왕의 마케도니아왕국은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를 지배했다. 알렉산더 사후에도 그리스의 학문은 퍼져나갔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한 번 절정기를 맞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과 수학은 인도와 중국에서, 서기 7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아랍에서 발전에 기여했다. 유럽에는 1천년이 넘도록 전해지지 않았고, 알렉산더 제국의 잔재는 새로운 로마의 제국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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