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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강독] 제물론 #3
기픈옹달 / 2016-06-30 / 조회 1,290 

본문

지난 시간 강독한 부분을 아래에 붙입니다.

 

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無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無有為有。無有為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柰何哉!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為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物無非彼,物無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故曰「莫若以明」。

더불어 다음 시간에 강독할 부분도...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無物不然,無物不可。故為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為一。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無成與毀,復通為一。唯達者知通為一,為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저는 '이니, 잇고' 따위의 현토를 붙이는 것이 참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문古文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할 뿐더러, 우리 말을 그 아래에 놓기 때문이지요. 비슷한 이유로 문장 부호를 붙이는 데도 비판적입니다. 옛 글 고유의 리듬과 맥락 당신 이를 특정한 의미 틀 속에 가두려 한다는 인상 때문이어요. 문장부호는 번역문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지. 그런 생각에서 강의안 등에 원문을 넣을 때엔 문장부호를 빼고 의미단위별로 띄어 쓰는 식으로 첨부합니다. 그런데... 위 처럼 붙여넣기를 하면, 일일이 제거하는 게 귀찮아서..;;;;

 

오늘 책방 낭독회를 준비하면서 신영복의 <강의>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진지한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분명 이 책은 벌써 10년도 전에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었습니다.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아마 그때 구입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언제 이 책이 사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책꽂이에는 없습니다. 덕분에 어디까지, 어떻게 읽었는지를 도통 확인할 수 없네요. 다만 그리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다는 기억뿐입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롭군요. 마치 새 책을 읽는 느낌입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읽었던건지..;;

 

한편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낡은 책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었나봅니다. 이후에 돌베게에서 나온 여러 교양강의 시리즈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아니면, 신영복이라는 사람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인지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니 전혀 그렇지 않더란 말입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여럿 보이더군요. 더구나 신영복 선생이 다양한 이론, 논의를 참고한데다 소화하여 이 책을 엮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오만함에 부끄러웠습니다. ㅠ

 

본디 낭독회 때문에는 <논어> 부분을 읽었으나 훌륭하다는 생각에 <장자>에 대한 부분도 조금 찾아읽어보았습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부분도 있고, 함께 강독했던 부분도 있어 아래에 붙입니다. 시간 내어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술렁 읽어버릴 책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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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 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분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齊物論>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自彼)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自知)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혜시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과 사, 사와 생 그리고 가와 불가,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不由)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亦因是也).

 

본문은 이어집니다만 여기까지만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혜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상대주의적 한계를 깨달아 사물의 한 면만을 보지 말고 하늘에 비추어 보고, 도의 중심(道樞)에서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풀이한 내용은 몇 군데 일반적 해석과 다소 달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풀이에 덧붙여 원문을 괄호에 넣어두었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번역서와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문법이나 용례에 있어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장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번역상 차이가 있는 부분은 원문을 괄호에 넣은 자피自彼, 자지自知 그리고 방方에 대한 해석과 불유不由, 역인시야亦因是也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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