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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황인찬 시 후기 :: 0708(금) +15
케테르 / 2016-07-09 / 조회 1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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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세미나 7월8일 첫모임 세미나 후기

 

첫모임에 대한 기대감과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는데, 기대감은 기쁨으로 긴장은 릴렉스함으로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어떤 분들이 오실까? 첫모임은 어떻게 진행될까? 게다가 간식도 준비하고 시소개도 해야 했습니다.

 

간식은 집어먹기 좋은 과일을 중심으로 했는데, 메뉴 선택은 통찰력이 깊으신 선우님의 제안에 따른 것입니다. 오전 모임에는 주로 빵이나 다과 등을 간식으로 하지만, 우리가 점심식사 직후에 모이는데다가 여성들이 다수이므로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습니다. 포식성을 지닌 저는 빵을 먹고 싶었지만 ~~ 꾹 참고 간식 구해서 세팅하고.

 

첫모임에 찾아오신 분들이 한분 한분 참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들 시를 사랑하거나 시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인문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추구하시는 분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시인이 모두 세 분이나 되셔서 참 든든했습니다. 1980년대에 등단한 오라클님, 반장이자 리더로 수고하시는 희음님, 그리고 시인의 세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반디님 등의 내공으로 모임의 컨텐츠가 알차게 채워지고 시를 보는 눈이 좀 더 열리고 무언가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습니다. 동화를 쓰시는 분도 있고, 그림 그리는 분도 있고, 우리실험자에서 여러 다른 세미나에 참석하며 열공하는 분들도 있고.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도 있고 ~~ 미래를 준비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2시 정시에 모임을 곧바로 시작하며 서로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고, 이 모임에 오게 된 동기나 계기같은 것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하고 곧바로 황인찬의 시를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시 읽기]

돌아가면서 시 한 편을 두 사람이 읽고 곧바로 대화를 하는 방식의 합독입니다. 누군가 읽고 또 들으면서 시맛을 느끼는 것이 포인트처럼 느껴졌습니다. 미리 읽어보고 오지 않으면 세미나 현장에서 나의 읽기가 서투르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담부터는 집에서 미리 소리를 내어 읽어보고 가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나중에는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시 한편을 읽고 바쁘게 진행되었습니다. 아쉬웠지만. 여튼 매 세미나마다 모든 참여자들이 한번 이상은 공개적으로 시를 낭송하게 된다는 산술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시 6-9편 X 2 사람 읽기 = 12-18명, 참석자 평균 13명. 

 

[황인찬 시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를 읽은 후 먼저 당번인 제가 준비한 시소개를 간단히 읽으면서 설명하고 반장 희음님이 대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시소개는 발제문은 아니고, 그냥 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나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편하게 이야기하여 토론이나 대화에 도움이 되는 자료나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소개를 타이핑해서 프린터를 하지 않고 그냥 충분히 읽고 와서 입으로 소개를 해도 된다고 하여서 모두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아마도 시에 익숙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 당번이 되는 분들이 그리 부담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으로 들려서 고마웠습니다. 저는 말주변도 없고 난해한 시로 소문난 황인찬 시인을 다루어 문자화하지 않을 수 없어서 긴 소개문을 만들었네요 ~~

 

자유로운 분위기로 대화하였고, 처음에는 다소 딱딱하게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제가 시소개를 무겁게 해서이기도 하고, 황인찬의 시 자체가 별나고 난해한데다가, 첫날이라 어떤 레포같은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해서일 겁니다. ㅋ. 여튼 대화의 후반부로 가면서 보다 편하고 재미있고 자유로운 대화들이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모임에는 더 잼나고 풍성하겠지요.

함께 나눈 대화 중 인상적인 것을 나름대로 아래에 담아봅니다.

 

1. 구관조 씻기기

 

‘새’를 무엇으로 보느냐? 이에 대해 신선한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1) 새 = ‘시’

황인찬 시인이 시를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의 방법으로 자신의 시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분도 있었고

2) 새=자기 자신

새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다고 본다는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3) 새=사랑

새를 '사랑'으로 읽는 시선도 참신했습니다.

4) 이 ‘새’는 시도 될 수 있고, 자기 자신도 될 수 있고, 사랑, 인생, 타자 등도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 표헌이 이 시를 이해하는 키포인트로 느껴진다는 의견에 대체로 공감한 듯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새를 억지로 씻기려고 하지요.

 

아마도 이 시는 시인의 실재 경험 즉 도서관에 방문하여 책을 읽고 거기서 빛이 비추이는 장면이나 책읽기, 생각과 느낌 이후에 도서관을 빠져나오면서 경험한 서사를 그냥 담담하게 다룬 것 같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시를 읽고서 느낌이나 해석이 제법 다른 것이 잘 드러난 좋은 이야기 나눔이었던 같습니다.

 

2. 유독

 

제목 ‘유독’이 무슨 뜻이냐?를 두고 흥미진진한 추리들이 이어졌습니다. ‘매우, 특히’로 이해할 경우 유독 너는 정말 예쁘구나 ~~에 포인트가 주어지는 듯 하고, ‘유독(有毒)으로 읽을 때 어떤 독성같은 것, 냄세 같은 것이 흐르는 뉘앙스도 담겨 있는데, 시인은 아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특이한 제목을 정한 것 같다는 열띤 대화들이 있었습니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의 대화와 어울림이 죽 이어지는 시인데, 매우 슬픈 느낌의 시로 다들 받아들였습니다.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이 표현이 트위트에 인용되는 듯 매우 인기있게 알려진 황인찬 시인의 표현이라고 하네요 ~~

 

3. 여름 이후


시 속에 등장하는 경미의 죽음과 다른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마치 일상적인 듯이 나열되고 있다는 시의 흐름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책상위의 국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연상하고 떠오리면 읽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비록 이 시가 세월호 사건 이전에 쓰여진 시이고 황인찬 시인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읽고 느낀다는 것은 참 의미있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던 같습니다.

 

“경미는 애들 마음 속에 살아있고 / 애들은 아직 살아있다” 이 싯구가 이 시에서 포인트라는데 다들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미는 살아있고, 애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죽음이 암시되거나 사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상위의 국화는 노란 국화였다” 이 표현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1) 처음의 흰국화를 잘못 본 것이었다는 표현같지만, 지금 노란국화로 보인다는 의미로 다들 보았습니다. 2) ‘노란 국화’는 조화로 쓰이는 국화와 달리 생명, 희망, 살아있음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분들도 있고, 흰 국화가 시들어버려서 노랗게 색이 바래진 것 같은 느낌으로읽었다는 분도 여럿 있었습니다.

 

2연의 국화의 색깔과 교복이 체육복으로 바뀌는데서 시 전체의 흐름에서 전환이 일어나고 어떤 암시를 던지면서 미래를 위한 공백을 남겨두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4. 개종

 

‘개종’이라는 제목과 시의 내용이 직접 연결되지 않는 시여서, 시인이 제목을 왜 이렇게 잡았을까?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누군가 말씀하기를, 황인찬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시를 쓰는 방법은 먼저 제목을 정해두고, 그 제목에서 가장 멀리있는 사물이나 사건이나 경험들 이것 저것 잡다한 것들을 끌어모아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명한 메타포로 탁 드러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별 연관성 없어보이고 낯선 것들을 묘사하고 나열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방식이란 것입니다.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저에게는 소중한 정보였습니다. ^^

 

누군가 “예술이나 문학의 핵심이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는 멋진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네요 ~~ 시인은 낯설게 보고, 낯설게 표현하고, 독자들도 낯선 경험을 하니까요

 

이 시에서 문 안쪽과 문 바깥이 대조되고 있는데요, 문이라는 경계가 어떤 변화 혹은 개종과 밀접해보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다들 공감 ~~

 

문의 안쪽이 ‘나와 기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원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사람? 사물? 시작(基源)?, 내 안에 있는 어떤 바램(祈願)? 등으로 다양하게 읽히는 뉘앙스가 다분한 ‘그’입니다.

 

여튼 이 시 속에서 나의 종교는 '기원'이라고 멋지게 파악/표현한 분도 있었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 뭐 잘못한 것이 없느냐고 묻고 그의 대답을 통해 무언가 확인하고 안도하는 모습이 다분합니다.

 

황인찬의 시에는 ‘여름’ 메타포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놈의 여름이란 것은 봄, 가을, 겨울과 비교해서 무언가 딱히 확 붙잡히는 의미가 선명하지 않은 계절이거든요.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변화의 서막같은 느낌을 주는데, 나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시의 묘미같기도 하구요 ~~~

 

5. 번식

 

이 시를 읽으면서 황인찬이 자주 사용하는 ‘웃음’에 대해 함께 말했는데요, 다들 그의 웃음은 냉소이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웃음이다, 이 시 본문에서는 대답의 거절로서의 웃음이다, 등 그의 다르고 별난 웃음이 대해 우리들이 간파했습니다. 그의 무감정, 무인격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 혀를 내둘렀지만은요 ~~~

 

황인찬의 시는 우리 시대와 젊은 세대들의 의식과 감정은 잘 드러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의미, 무감동, 무감정 ~~~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설 자리를 잃은 청년세대의 그 무엇을. 황 시인이 젊은 시인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시인의 시는 그 세대와 시대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아주 잘 짚어낸 것이고 저는 느꼈습니다.

 

‘차가운 과일 통조림’이 마치 병원과 똑같아 보인다고 말한 분이 있었구요,

 

남자 간호사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보아, 면회가 극히 제한되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어, 죽음이 임박한 상황을 느끼게 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죽지 않는 과일“이지만 사실은 죽은 과일이고, 다르게 읽으면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더 이상 죽지 않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는 멋진 생각을 나눈 분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네요.

 

이 시 속에서 무엇이 번식하고 있는가? 저는 만남과 질문과 웃음(거절), 침묵으로 이어지는 침묵의 번식과, 죽은 것이 입안에 가득하게 되는 ‘죽음의 번식’이 보인다고 했는데, 사실 침묵의 번식 역시 죽음의 번식이지요.

 

작가는 그냥 작업을 하고 시를 쓰고 만들어내고 무언가를 가볍게 던지듯 이야기하는데, 독자가 너무 심각하게 시를 해부하고,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기보다 역시 가볍게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6. 나의 한국어 선생님

 

반장이 아홉 편의 시를 준비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이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 소수자문제나 문법과 규율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을 읽어내었는데, 다른 분들은 무언가 다르고 깊고 신선한 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 나의 한국어 선생님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지만 ‘나와 하나될 수 없는 그 사람’을 그리고 있다는 희음님의 생각이 멋져보였습니다. 2연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는 표현에서 이를 읽을 수 있네요.  짝사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읽으니 2연과 5연이 확 뚫리는 듯 했어요. 그럼 사랑의 문법이 어렵다로 읽히기도 하구요.

 

2) 소통의 문제를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법이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는 등. 우리들의 관계나 일상, 특히 남녀 관계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통하지 않고 상대의 문법을 알지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X 표시를 하면서 상대를 판단/제단해버리는 ~~~

 

‘나는 누군가에게 한국어 선생님이었고, 누군가의 이마에 X 표시를 하였을 것이다’고 소회를 말하신 분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도 그런 자성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국어 선생님에게서 ‘안티 오이디푸스’ 세미나에서 공부하였던 '내 안의 파시스트'를 읽었습니다.

 

여튼 이 시에 대한 반응은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시 중에서 게중에 쉽고, 우리 가슴에 확 다가오는 주제이고, 관계나 연애나 소통이나 권위주의 사회에서 늘 경험하여온 일들이니까요 ~~~

 

마치고 나니, 헉 5시 20분이 넘었네요. 3시간 20분동안 잼나고 함께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가 참 좋았습니다.

 

P.S. [시평 및 소감]

 

아래에 제 개인적인 소감과 시평을 간단히 담습니다. 마구 쓴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소감에는 이런 것이 전혀 필요없구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 개인적 소감

황인찬의 시에는 ‘비(非)’나 ‘부(否)’, 혹은 ‘탈(脫)’의 범주가 두드러진다. 이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언어이자 세계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는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되는 측면이 다분하지만 황인찬의 시세계에서 그러한 경향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불연속성, 분절, 부재, 분열, 탈구심, 비결정성 등을 나타내는 부정적 수사의 출현과 거리두기, 차가움, 냉소, 무개입, 무감정, ‘슬프지 않음’ 등의 정서는 그의 시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시나 노래라기보다 차가운 회화나 원근법이 가미된 흑백사진같은 그의 글에는 화려한 색체나 신명을 울리는 소리조차 배제되어 있다.

 

김기택의 시가 생각났다. 묘사가 아주 탁월한 그의 시에서 느껴진 것은 묘사나 표현의 정교함에 비례하여 건조하고 감정 없음의 공허였다. 황인찬의 차가움은 그러한 냉정한 묘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사라짐, 무개입, 대상의 해체와 같은 공백같은 것에서 스며나오는 것 같다.

 

그의 시는 생경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친화적이지 않았다. 나는 열림이나 연대, 따스함이나 의미 따위를 말하며 사는 사람이다. 꼭 그렇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그렇다는 것이다. 황인찬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의 스타일과는 아주 달리 무언가 싸늘하고 무의미하고 재미도 슬픔도 없는 닫힌 세계를 접하는 듯하였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런 숨겨진 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의 시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개인적 소감을 굳이 말한다면 그의 시를 읽으면서 세대적 거리나 가치적 괴리를 느낄 정도로 무의미성의 표류가 다소 불편하였다. 스타일이 다르다. 해석은 애써 해내겠지만 그의 공간은 들어가기 싫은 방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역동이 없다. 심장을 뛰게 하는 지점도 없다. 진선미의 표상이나 열정을 미화하는 나의 습관과 마찰하거나 충돌할 접촉점을 찾기 어려울만치 먼 거리가 존재하는 느낌으로 읽었다. 부재 혹은 해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의 맛은 깊은 맛이 아니라 생소하고 이질적인 맛, 시인과의 조우는 정겨운 만남이라기보다 정이 들지 않는 어떤 회색 소묘를 보는 느낌이었다.

 

2. 평가들

 

2-1.

 

<구관조 씻기기>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황인찬은 ‘신비의 전도사’(구관조, 106)이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황인찬의 시들이 감성적 도취나 문학적 향유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요성’(106)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시는 “격앙되는 법이 없고 크게 절망하여 한탄하는 일도 없다. 그저 너를 그대로 지켜보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하였다는 듯이 담담하게 대상을 바라볼 뿐이다. 불현듯 여기서 이상한 ‘공백’이 발생한다.”(106)

 

또한 박상수는 황인찬에게서 성(聖)-속(俗)의 구도를 발견한다. 즉 황인찬은 그저 지켜보는 자처럼 서있지만 ‘너무나 온화하면서도 관능적으로 신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해”(110)내는 이로 파악된다. 즉 황인찬의 시에는 신성의 차원에 대한 지향이 고요히 드러나며, 따라서 그는 신성을 예민하게 그리고 ‘관능적으로 감각하는 존재’(111)라는 것이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 대한 해설을 통해 박상수는 신의 역동성, 성스러움, ‘초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이라는 수사로 그의 시 세계를 극찬한다(109-110). 하지만 빈 방에서 있는 백자에게서 어떤 신성이나 성스러움을 읽어내는 해설자의 해석은 흥미롭지만 사실 과함이 있어 보인다. 그의 시세계에서 신성의 차원, 혹은 성스러움의 빛깔이 어느 정도 깔려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의 시들에서 종종 등장하는 ‘교회당’ 메타포나 ‘노인’ ‘할머니’ 등의 상징, 개종 시리즈 등에서 그러한 요소를 읽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맥에서 성스러움이나 신성에 흡착하려는 몸짓보다 탈신성성 혹은 성스러움의 요소에 대한 냉소적 거부의 이미지가 더 강해보인다. 그들은 늙은 노인 혹은 할머니, 죽어 없어진 할머니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부재 혹은 신의 죽음에 더 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스러움의 차원은 그의 시 세계에서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초자연적’이라는 수식어로 황현찬의 특징이나 그의 시세계를 평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굳이 백자에게서 읽혀지는 성스러움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고결함이나 초월성이나 독존이나 충만함이나 빛남과는 다른 의미의 성스러움일 것이다. 텅 빔 혹은 고독 그 자체!

 

특히 박상수는 황인찬에게서 무위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차원을 발견한다.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무엇을 해야 할 순간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고 시야를 확장하며 대상을 보존한다.”(116). 정지의 차원이다. 모든 것이 중단되고 단절된다. 주체와 대상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한다.’(116) 박상수는 이러한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무개입, 무위를 통해 ‘공백을 만들어 내는 순백의 사유이자 감각’을 황인찬에게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이라고 평한다.

 

박상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황인찬이라는 시적 주체와 시적 세계를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황인찬은 자신을 스스로에게서도 격리시키고 타자에게세도 격리시킨다. 그의 시적 주체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비동시적 세계를 같이 살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120) “비극적이지만 우리는 황인찬을 이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는 인간의 옷을 입은 채로 이 속세를 살아가는 몇 안되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수도자이자 마법사이자 백색의 기사이다.”(127)

 

신비, 전도사, 성스러움, 신성, 수도자 등의 현란한 용어로 찬미하는 박상수의 평가를 읽으면서 그가 과연 황인찬을 제대로 읽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황인찬의 고립과 고독과 거리두기에서 발생하는 공백의 측면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2-2.

 

그의 둘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 대한 작품해설(평론)을 한 시인 장이지는 황인찬의 세계를 ‘폐쇄회로의 시니시즘’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낸다. Cynicism은 일종의 냉소주의로서, 현세를 부정하고 선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위선이라고 보는 시선을 가진다. 시니시즘이라는 단어로 황인찬의 모든 것을 축약하기를 곤란하지만 그의 시에는 그러한 정서가 다분하다. 시니시즘의 뿌리는 주전 4-5세기 그리스의 키니코스(Kinikos) 학파로서 견유학파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사상, 이론적 학문,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스토아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황인찬의 시의 대부분의 소재는 일상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스토리들도 일상적이다. 즉 그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소재를 발굴하거나 탈일상적 의미의 세계를 탐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상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고 먼 거리에 있는 듯한 무대이자 고요한 우주처럼 보인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관조적 혹은 냉소적 시선에 포착되는 일상과 존재의 차가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장이지는 황인찬이 불가지적인 것에 대해 집착한다고 본다(희지, 138). 세계의 불가지성에 대해 거듭 언급하는 그의 경향은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장이지는 그 이면에 깔린 정서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회의 만연한 ‘불안, 자기 실현에 대한 혐오’(139)라고 파악한다. 장이지에 의하면 황인찬은 은둔형 외톨이이다. 이를 ‘히키코모리적 세계’(138)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황인찬의 실존과 심리적 구조를 상당히 드러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거듭 거듭 ‘나는 없다’, ‘나는 사라진다’, ‘아무도 없다’ 등의 표현이 반복된다. 나의 부재, 주체의 사라짐, 텅빈 공백, 냉혹한 거리두기는 그간 ‘자아’ 혹은 ‘나’, 그리고 ‘실체’와 ‘의미’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한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이자 이에 대한 경멸이기도 하다. 황인찬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폐쇄적 언어의 발화는 그의 폐쇄회로적 세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의 실존과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2-3. 채널예스 인터뷰(2016. 1. 14, ‘시인 황인찬, 응시의 감각과 정직한 조율사’ 인용)

 

문득 일전 김경주 시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쓰는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이런 이야길 들려줬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시를 하나의 유희 대상으로, 오타쿠적 취미의 아이템처럼 대한다는 것. 거기에 엄숙함이나 비장함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황인찬 시인에게 적용시키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황인찬 시인에게도 ‘오타쿠적’인 어떤 정신의 태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편집증(paranoia)의 세계다. 편집증이 시적 진술의 전략으로 채택될 때 그 진술에 균형과 질서를 도모하려는 외부의 욕망은 시적 자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그것은 그가 두 번째 시집에 붙인 제목 ‘희지의 세계’가 그가 즐겨 읽었다는 만화 제목 ‘미지의 세계’의 착각에서 온 것임을 아무렇지 않게 자인하는 것처럼,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즉자적으로 정물화하는 과정에 확인된다. 그가 편견이나 억압 없이 즉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은 아무런 의미 값이나 서열이 매겨지지 않는다.

 

황인찬은 비교적 최근에 행한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메시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구조화하지 않고 더 넓게 펼쳐서 그대로 던지는 것, 그것은 마치 아이가 처음 배운 말을 혀를 움직여 공중에 던지는 것처럼 백치적으로 순결한 행위다. 그 순결한 행위에 풍속과 정직하게 호흡하는 즉자적 편집증이 입혀질 때, 황인찬의 새로운 문법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는지.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저의 간단한 메모와 기억을 떠올려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혹시 잘못 표현되었거나 수정할 것 있으면 아래에 말씀해주세요 ~~

그리고 세니마 후기는 간단하게 A4 1-2장 내외로 하던데 
제가 시공부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

 다들 담주에 뵈요. 특히 아침님 뵙고 싶습니다 ^^

아침님의 댓글

아침 댓글의 댓글

굉장한 후기네요.
그곳에 없었어도 있었던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ㅎㅎ
이번주 금요일에 짠 하고 나타날께요.
저도 모두 뵙고 싶어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아 ~~ ^^ 짠 하고 뵈어요 ~~~

희음님의 댓글

희음

후기 좋네요. 실로 다양한 각도에서 세미나 시간을 조명해본 후기가 아닐까 싶어요.
세미나 전반의 분위기에 대한 감상, 시 각각에 대해 나눈 이야기 정리, 그리고 황인찬이라는 시인에 대한 총평까지!
그리고 하루도 미루지 않고 신속정확하게 후기 올려 주신 것까지, 참으로 멋지십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ㅇㅎㅎㅎ 희음님, 세미나 진행하시느라 참 수고하셨어요. 덕분에 시공부하는 마음이 쏠쏠하고 덕분에 좋은 분들 함께 만나 산소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 배부릅니다 ^^ 담에도 아자! 입니다 ^^

반디님의 댓글

반디

다시 공부하게 되는 후기입니다. 세 시간 이상을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으셨던듯 합니다. 메모를 하신 것도 녹음을 하신 것도 아닌데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ㅎㅎ
그런데 중간에 오자 있습니다.  정지이 - 장이지 .. 히키모코리적 세계 - 히키코모리로.  다들 고쳐 읽으시겠지만 노파심에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아 ~~ 반디님, 함께 공부하게 되어 넘 기쁘고 감사합니다. 좋은 시를 많이 쓰시고 활동도 하시고 시인스러운 분위기도 있으셔서 우리 세미나에 딱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  그날 제가 비정상적으로 행한 주차 서비스는 대박입니다. 제가 아파트에서 여성들이 차를 밀 때 밀어준 적은 많았지만 그렇게 주차장까지 안내한 것은 처음이니까 꼭 기억해주세요.

헉, 그리고. 댓글로 저를 '인'도 하시고 '디스'도 하시네요 ㅋ ~~~ . 오자를 수정하겠습니다. 특히 장이지 시인님의 이름을 많이 틀렸네요 교정하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시인님 덕분에 모임이 더 풍성해질 것 같아 기쁩니다. 참가자들에게 좋은 친구 좋은 언니 누님 되어 주 세요 ~~~ 그럼 담에 뵈어요.

이응님의 댓글

이응

케테르님,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_()_
낯설게 느껴지는 시를 여러번 읽고 정돈해주신 발제문도 감동이었는데,
후기에서도 사려깊은 마음이 느껴지네요.
혼자 읽었다면 슥슥 넘겨버렸을 시도,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니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음미해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시가 주는 여백의 시간, 함께 하게 되어 기뻐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정말 반갑습니다 ~ 당번은 빨리 할수록 가볍지요 ^^ 저도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좋은 한주 되셤요 ^^

선우님의 댓글

선우

ㅎㅎㅎ 케테르님, "나는 빵이 먹고 싶어요" 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
담번 제 당번일 때는 특별히 케테르님 위해 맛있는 빵! 준비하겠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갔다가 갑자기 은유, 환유 ... 이야기에 고등학교 국어 시간같은 느낌도 받았다능...ㅎㅎ
근데, 왠 시 공부를 이렇게 많이, 열심히 하시는거예요?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처음은 늘 낯설지만 열의가 가득한 님들이 오신 것 같아 기대가 되는 모임입니다.
저는 잘 읽고 듣고 해야겠습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아 ~~ 선우님, 빵 먹었어요 오늘 아침에, 툐욜도

시공부는 철학공부나 마음공부나 인생공부와 비슷한 거라고 보구요, 조금 맛들이면 더 잼있어요
선우님이 시 쓰게 되기를 두 손 모아 ~~~

무승님의 댓글

무승

감사드립니다
시와 다름없는 후기네요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좋은 발제 좋은 후기  감사드립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무승님,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 놀러 오세요 ^^

반디님의 댓글

반디

차린 것 없는 블로그 링크 걸어둡니다.
http://blog.naver.com/fireflybugs/22075743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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