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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차라투스트라_머리말 :: 0205(월) +12
모로 / 2018-02-07 / 조회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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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세미나 8주차(2/5) :: <차라투스트라> 머리말 후기

작성자: 모로

 

급격한 체력저하로 - 위대한 건강이 절실하다 - 녹음이라는 문명만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나는 후기를 작성하려는 순간, 2부 녹음 파일이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해진다. 안주와 안녕은 이렇게 때때로 등짝 스매싱을 날린다. 혼돈(불안정)의 고통보다 안정의 배신이 주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다. 편안을 추구하려는 안일함을 늘 경계해야겠다. 결국, 세미나의 열정적인 현장을 중계하려던 원대한 포부는 물거품이 되고, 나의 후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에 근거한 감상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 세미나는 2개월간의 해설서를 마치고 드디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문에 진입하는 시간이었다. 본격적인 본문 읽기에 앞서 니체가 쓴 자기 작품 해설집 ≪이 사람을 보라≫의 차라투스트라 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말 부분을 살펴봤다. 먼저 ≪이 사람을 보라≫에선 니체의 목소리를 통해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순간 - 거의 신화 급에 가까운 - 을 들을 수 있었다. 

 

[텍스트1] 이 사람을 보라-차라투스트라

 

* 산책길 영감에서 탄생한 ≪차라투스트라≫

 

산책길에서 ≪차라투스트라≫ 1부가 떠올랐다. 특히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하나의 유형으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가 나를 엄습했다… 

  

이 책은 1881년 8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인 영원회귀의 영감이 엄습함에 따라 쓰였고, 1883년 2월 ≪차라투스트라≫ 1부 출산까지 잉태 기간은 1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발제자 오라클님은 이 부분에서 특히 ‘차라투스트라가 엄습했다’라는 피동태 표현과 ‘차라투스트라가 하나의 유형(모델 또는 스타일)으로 떠올랐다’는 문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어진 논의에서는 본문에 제시된 ‘영감’과 ‘계시’ 개념의 차이 및 문장부호 줄표(-)와 반쌍점(;)의 의미를 낱낱이 파헤치며 각자 나름대로 해독해보았는데, 니체의 문장부호는 그리 논리성을 따르지 않기도 한다는 오라클님의 반전 멘트. 니체의 독창적인 문체에 빨리 적응해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수동태 표현 이면에 응결되었을 그 무엇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느 날 차라투스트라가 엄습했다고 하였지만, ‘발걸음이 자기도 모르게 격렬했다가 늦추어졌다가도 하는 황홀경’, 이러한 영감이 엄습하기에 이르는 그 사유의 깊이를 우리가 가늠할 수 있을까. 사유가 집대성돼 하나의 결실로 맺히는 순간, 그 사유는 신체에서 넘쳐흘러 단번에 휘갈겨 쓰인다. 고로 이때의 글은 몸이 쓰는 글이다. 결론적으로 영감은 얻어 걸리는 요행이 아니며, 그러므로 이는 절대 수동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위대한 건강은 신체적 건강인가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생리적 조건은 ‘위대한 건강’이며,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존재론적 문제는 ‘자기극복’,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심리적 문제는 ‘긍정의 정신’이다. 

 

위대한 건강은 신체적 건강에 국한된 것일까. ‘건강은 육체의 건강을 의미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상이라는 신체를 상정하지 않아야 한다. 다리가 불편해도 그리고 긍정적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건강한 신체라 할 수 있다’, ‘위대한 건강이란 통상적인 건강과 다른 개념으로 쓰였기 때문에 여기서의 건강은 일반적인 개념과 다른 것이다. 즉, 기존 개념을 전복시켜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포기되고 획득되어야 하는 의미로서의 건강이다.’, ‘건강은 치유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등 건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됐다. 그야말로 천 개의 가치들이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이럴 때마다 나는 매우 놀란다(다들 참 대단하시다!). 나는 아직 나만의 의미를 생성하지 못해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오라클님의 정리.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신체는 다양한 이성·다양한 감각·다양한 자아가 꿈틀거리는 장을 의미하므로,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더 커다란 이성 즉 육체와 정신을 포괄하는 의미. 이 장이 안정되면 하나의 자아가 생성되지만 안정성이 지속되면 새로운 자아가 생성될 수 없으므로 전복되기 위해서는 건강에서 병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전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밑에 있던 감각, 정신이 올라오며 새로운 위계가 잡혀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전 과정이 모두 위대한 건강이다. 현실적으로 건강은 활력을 주는 것이지만 보수적이고 타자를 배척할 수 있다. 고로 긍정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질병은 무기력증을 야기하지만 부정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의 생성과 창조의 측면을 봐야한다. 예를 들면 신체의 병을 통해 타인의 육체적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언제나 명쾌한 오라클님의 정리를 편안하게 받아먹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자 정신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여하튼 니체식 해독법은 매우 입체적이다. 다시금 트레이닝해야겠다. 첫째, 기존 가치를 전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 둘째, 정주의 상태가 아니라 진행 중인 전 과정(영원회귀)으로 파악할 것! 니체의 신체 개념은 매우 중요한데 나에게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마침 다음 발제 때 문제의 ‘신체 편’이 있으므로 그간 머릿속에서 얽혀 있던 의문들을 정리해 제기해봐야겠다. 

 

 

[텍스트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머리말

 

* 오늘의 단어는 ‘몰락’으로 하련다!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저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내리막길(구판에선 ‘몰락’)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니체 세미나의 재미 중 하나는 매 시간마다 익숙했던 단어들을 비틀어 니체식 단어집을 채워가는 일이다. 지난 시간에 새롭게 재조명하게 돼 니체식 단어집에 등재된 개념은 앞서 말한 ‘건강’과 ‘몰락’이다. 10년 동안 동굴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세계로 하산하는데 이를 굳이 몰락이라고 표현했다(신판에선 내리막길로 변경됨. 개인적으로 몰락이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듯).

여기서 몰락은 첫째,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하강’ 즉, 물리적·공간적 개념이며, 둘째 인간보다 높은 위치의 철학자, 구도자에서 일반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태도, 셋째 새로운 생성을 위해 가득 찬 지혜를 비우는 과정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중첩된 것으로 정리됐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영원회귀의 메커니즘이자, 생성을 위한 전 단계로서의 몰락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던 몰락에서 이러한 긍정적 의미가 창출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 도대체 ‘노인’은 누구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변했구나.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은 노인. 이깟 노인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 행복한 노예와 귀족, 최후의 인간들(알록달록한 얼굴, 난쟁이, 전도된 불구자), 보다 높은 인간들(예언자, 두 명의 왕, 전문가, 마술사, 교황, 거지, 가장 추악한 인간, 그림자) 등 -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 위에 포지셔닝돼 있다고 생각한다. 즉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층적 층위에 위계 지었다. 이점에서 니체가 매우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은 위버멘쉬를 오해한 보다 높은 인간들에 속하는 족속일까.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 1부의 1장이 세 가지 정신에 대해 설파하는 내용인데, 차라투스트라가 아직 설교하기도 전에 어떻게 그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알아본 것일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는 의문은 그렇게 자기 입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차라투스트라가 그 중요한 어린아이로의 변신은 왜 제3자가 묘사하게 했을까.

 

* 사람이라는 집합명사를 극복하자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여기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을 개별적 개인이 아니라 집합명사로 표현한 점에 주목해야. 인간이라는 집합명사가 갖고 있는 관념의 테두리, 인간적 한계를 표현하기 위해 객관화한 독특한 표현이라고 한다. 즉 도덕과 관습, 법과 제도 등 기존 가치(중력의 영)에 종속된 인간을 의미하는 듯.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덕을 생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너무 많은 덕을 바라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개의 덕 이상이다.

 

니체식 자기극복의 최고 방법론은 지극히 정직할 것! 진정한 나의 덕인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나만의 덕을 창조해야 한다. 이때 나의 신체는 다양한 덕이 싸우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고로 너무 많은 덕을 바라지 말라는 주장과 상반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나는 이날 공교롭게도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무리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국소성은 어떤 구성요소도 전체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실상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개념인데, 내 안에 여러 덕이 존재해도 결국 그것은 한 덩어리라는 의미에서 비국소성과 연결되는 것 같다. 

 

*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당신을 위하여!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이는 인간의 존재론적 위험성을 이르는데, 자신의 덕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혼돈이라는 실존적 고뇌에 빠지게 되므로 니체의 철학을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혼돈을 통해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킬 수 있다면. 사람의 존재 이유는 위버멘쉬를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태클에도 한 걸음을 넘지 못해 줄에서 떨어지고 만 광대의 말로가 남의 일 같지는 않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을 연민하지 말라 하였건만 광대를 연민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여하든,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줄타기를 즐길 줄 알아야겠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지극히 주관적인 후기에 관하여!!
사실 저는 세미나의 열정적인 현장중계보다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자가 자기 특이성, 자신의 취향이나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보편적인 진리 혹은 도덕'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덕과 윤리'를 철학의 과제로 삼았지요
모로의 후기가 그 탁월한 사례가 될 수 있겠어요! 내용이나 글발에 있어서나 범상치 않군요. ^.^
차라투스트라가 모로의 후기를 봤다면 "이제 하산해도 좋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후후후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덕을 생성해야 한다. ......
 사람의 존재 이유는 위버멘쉬를 행하는 것이다." _moro
니체에 대한 모로의 창조적 해석도 매력적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시지요?

 ........... 다음은 위대한 건강에 대한 추가입니다 ....................

1. 위대한 건강이 획득되는 과정을 도식화하면 이런 이미지입니다.
(1) 극심한 질병을 통해, 하나의 자아(지배적인 정서, 지배적인 가치)가 해체됩니다.
(2) 질병과 치유의 반복을 통해, 다양한 자아가 출현(정서들 사이의 전쟁, 가치의 전환)합니다.
(3) 새로운 건강의 획득을 통해, 새로운 자아(새로운 정서, 새로운 가치)가 생성됩니다.
    이 경우, '자아(주체)'란 다양한 힘들 가운데서 특정한 힘이 우위를 차지할 때 나타나는 '힘들의 잠정적인 중심'입니다.

"병이 나를 해방시켜준 것이다.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_니체
병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영토를 낯설게 만들고, 자기의 습속을 바꿀 기회를 제공합니다.
즉 병은 지배정서에 대한 항거이며, 니체의 경우 인류의 습속(인간적 가치)에 대한 항거입니다..

특히 니체가 '사유와 신체 사이의 긴장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롭습니다.
통상적으로 의식을 통해 신체에 작용하지만, 니체의 경우 신체의 변화를 통해 사유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통상적으로 신체의 건강을 이용하여 정서의 건강을 유도하지만, 니체의 경우 신체의 질병을 이용하여 지배정서의 해체를 유도합니다.
(*신체의 건강을 이용하여 정서의 건강을 유도하는 경우, 지배정서가 강화되는 효과를 낳습니다.)

2. 위대한 건강 :: 새로운 자아의 생성

이렇게 질병과 치유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 새로운 가치(철학)이 생성되는 과정이 '위대한 건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건강이란 '생성으로 정의되는 신체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질병-치유의 과정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 새로운 자들은 새로운 목적을 위해 새로운 수단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건강이다.
이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는 것이다.
이 건강은 끊임없이 포기해야 하므로 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해야 한다." <이 사람을 보라>

3. 위대한 건강 :: 위대한 철학의 탄생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합니다.
그는 위대한 건강을 얻는 과정에서 긍정의 권력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등의 개념도 얻었으며,
따라서 '위대한 건강'은 '위대한 철학'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건강을 지닌 자는
항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낡은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낡은 세계를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질병과 치유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치유하고, 세계의 운명을 치유하는 철학적 원리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위대한 건강에 대한 내용 감사합니다, 오라클님.
니체의 사유를 이해하고 생성/창조하는 자가 되는 데 정말 중요하네요.

질병-치유의 반복 과정이란
신체의 질병을 이용하여 지배정서의 해체를 유도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신체의 건강을 통해 정서의 건강을 유도, 지배정서가 강화되는 것과 대비시켜 주니
개념이 한층 선명해 집니다.

모로님의 댓글

모로 댓글의 댓글

원래 계획이 몰락하면서 제 안에 억눌려있던 감상(다른 정서)이 출현하게 된 것 같습니다ㅎㅎ
위대한 건강의 프로세싱을 도식화하니 더욱 이해가 쉽네요.
위대한 건강을 통해 영원회귀, 위버멘쉬 개념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결국 '위대한 건강=영원회귀=위버멘쉬'는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말을 계속 다른 언어로 반복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우와, 후기가 아주 반전 매력이에요! 이토록 멋진 후기를 남기시다니.
다음주에 제가 후기 써야 하는데 좋은 자극을 주시네요.. ㅜㅜ

저도 내리막이 아니라 '몰락'이 더 좋아요. 전 좀 극적 표현에 매혹되나 봅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게 즐거웠어요.
발제문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랑하는 인간들에 대해 열거할 때에도 몰락, 파멸, 멸망에 더 강조점을 두었더랬죠.

그렇지만, 익살꾼의 등장에 줄에서 떨어져 송장이 된 사내를 떠올리면
몰락이라는 단어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흠칫 놀랍니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어찌 기꺼이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뒤에서 익살꾼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로님의 댓글

모로 댓글의 댓글

저도 광대의 몰락은 왜 사전적 의미의 하락에 그쳐 새로운 비상이 되지 못하는가에 의문을 갖기도 했으나,
광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정서 또한 인간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상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후기 너무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오라클 말씀처럼 문장력이 대단대단, ㅎㄷㄷ 합니다.
집사람도 함께 읽었어요. 우선은 밤이 깊어서 감동은 여기까지만 적습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모로님의 댓글

모로 댓글의 댓글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재미있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ㅎ

소소님의 댓글

소소

후기가 좋아 글이 피동태로 술술 읽혀져 버렸어요! 하하
모로님 표현처럼 니체의 영감은 행위자에 의지(의욕)없이 얻어걸리는
요행이 아니기에 수동태가 아니라는 표현,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람의 신체로 큰 깨달음(영감)을 얻는 존재들은 특별한 생물체로 치부하며
스스로 게으름을 피울 핑계거리를 찾곤 했는데 부끄럽네요.
저는 니체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로 위버멘쉬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또한 미래지향적이며 현재를 부정하는 목적론적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모호한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맴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피동태로 엄습한 니체의 영감에서 개인적인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아요!
미래에 보다 완성된 또는 특정한 형태로 자신만의 세계를 설정해 놓고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생식의 의지로 삶을 의욕할 때 자신만의 세계가
창조되어 버리는거죠. (행위자의 능동적인 의욕에 의한 피동태)
어느날 느닷없이 엄습한 니체의 영감처럼...
이 때, 행위자(삶의 주체)는 목적을 가지고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피행위자로 삶에 의해 살아지게 되는 운명을 만나는 것 같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직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니체를 만나면서 들었던 의문이 조금은 선명해진 것 같아 흐뭇해지네요. ^^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생식의 의지로 자기 삶을 욕망할 때 자신만의 세계가 엄습한다.
행위자는 피행위자로 삶에 의해 살아지게 된다.
소소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저도 흐뭇하네요.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누운 채로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얻은 작은 결과를 적어봅니다.
p22-4 나는 사랑하노라 너무많은 덕을 바라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개의 덕 이상이다.
p58-18 바로 그때문에 너는 너의 여러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들로인하여 너 파멸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두개의 텍스트는 제게 서로 모순되는 두 아포리즘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이해하려해도 너무나 어렵기만 했죠.
덕은 외부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따라야 할 당위의 문제이며 perspective 는 내 안의 주관성의 영역일까?
여러가지 덕은 내 안에서 비국소성 으로 용해되는 것인가?
생각할 수록 제머리는 혼란을 거듭하고 정리가 안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침대에서 든 생각,
니체는 모순되는 문장을 연결하는데 탁월함을 이미 여러차례 보여 주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이게 답일지도?

너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을거야. 힘들고 외롭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네 인생을, 운명을 사랑해야만 해.
창조는 고통이고 전쟁이며 위험한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진리는 어디에도없어.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만의 진리를 찾아 나가야 해.

수많은 덕들을 수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를 정직함 속에 마주하다 보면. 여러 덕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바꾸는 너만의 덕은 결코 남발될 수 없음을.
그런 것을 니체는 말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싶네요
이상 저의 서광 이야기 였습니다. ㅎㅎㅎ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덕'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통념을 걷어내기 위해, 통상적 덕과 니체의 덕을 구분해보겠습니다.
먼저, 통상적 용법에서 '덕德'은 공덕, 덕성, 덕망과 유사하며, '어질고 너그러움'을 뜻합니다.
반면, 니체철학에서 덕Virtus은 고유성(품격, 가치)와 능력(힘, 재능, 재질)이라는 두가지 속성을 갖습니다.
결국 전자의 덕이 도덕적 가치와 관련한다면, 후자의 덕은 윤리적 가치와 관련할 것입니다.

*[라틴어사전] virtus : 품격, 가치, 고유성, 재능ㆍ재질, 덕성, 힘ㆍ능력
그래서 덕Virtus은 종종 자기 고유성, 특이성, 취향, 스타일로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덕Virtus이 자기 특이성과 능력으로 정의된다면, 덕의 인격화된 존재가 바로 강자입니다.

먼저, 전자의 덕이 공덕, 덕성 같은 보편적 가치를 말한다면, 후자의 덕은 고유성, 특이성 같은 특이적 가치를 뜻합니다.
또한, 전자가 하나의 보편적 기준에 따라 덕을 평가한다면, 후자는 다양하고 특이적인 관점에 따라 덕을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가 덕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다면, 후자는 그것이 어떤 덕인가를 묻게 됩니다.

다음, 전자가 어질고 너그러움 같은 태도를 말한다면, 후자는 능력이나 힘과 연관되는 개념입니다.
대체로, 전자의 덕이 타인과 관계한다면, 후자의 덕은 자신과 관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덕을 위해 인격 수양이 필요하다면, 후자의 덕은 자기 특이성을 발견하고 강화하는 능력이 요구될 것입니다.

엇결과 순결이 말한 모순되는 2개의 텍스트는, 2번째 텍스트가 등장할 때 다시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책이 없는 관계로 찾아보기가 함들기도 하고 말이지요...^^;;
엇결과 순결의 물음이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긴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빠른거북이님의 댓글

빠른거북이

아 정말 글솜씨가 범상치 않네요
개성있는 후기 고맙습니다 ^^
저는 내일 땡땡이치고 싶어서 놀다가 니체 책을 이제 펼쳤습니다 ㅎ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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