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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제] 0222 :: 법의 지배
연두 / 2018-02-22 / 조회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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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잔해를 걷어내며 

6 법의 지배

20180222_목_연두

 

  1945년 늦가을 공산당 팔로군이 국민당과 소련 적군으로부터 도시를 점령해가기 시작하자 인민재판이 바로 뒤따랐다. 오랫동안 억눌린 가운데 생겨난 쓰디쓴 증오가 그것을 부추겼다. 신문들은 목격자를 찾아 나섰고, 안둥에서는 초등학교에 인민재판장이 세워지기도 했다. 상당수 혐의는 사소한 것들이어서 피고인들은 기억할 수도 없었다. 만주국 행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다수 한꺼번에 처형되기도 하였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의 인민재판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필요'에 의해 집행되었다. 그들은 처형이 법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길 바랐다. 적법성을 확립하는 것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독재국가에서 더욱 그렇다.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에서 법 관념은 완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재판은 공산당의 권위를 보여주는 의식이었다. 

  유사한 형태의 인민재판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곳 어디서나 나타났다. 헝가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소련 적군은 헝가리 '반파시스트'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헝가리 왕국은 1920년 이후 왕이 부재한 상태에서 미클로시 호르티 제독의  섭정 하에 있었다. 그는 30년대에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홀로코스트를 적극 돕진 않았으나 유대인 박해에 동조했다. 그가 실각하며 열렬한 반유대주의인 화살 십자군이 통치에 들어갔다. 1945년에 들어선 반파시즘 정권은 화살 십자군 정권 전체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처형만이 필연적 결말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인민재판의 진짜 목적은 "정치적 과오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었다. 법정은 전문 판사들이 이끌지만, 공산당원, 노조 관계자와 함께 구성되었다. 민중은 전범재판에서 불행과 고통, 수모에 대한 책임을 진 전범들에게 자비 없는 복수를 요구했다. 

  그리스는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들이 거의 동시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재판을 남용한 가장 대표적 사례다. 그리스인민해방군 전사들과 농부, 트럭 운전사 등으로 구성된 인민법정은 범죄자, 전범, 부역자 문제를 처리했다. 인민법정은 부역자들에게 무자비했고 정부가 공식 법정을 세운 뒤에도 기능을 계속 하기도 했다. 이는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의 상처는 몹시도 생생했고, 상처의 골은 너무 깊었다. 그리스에서 해방은 사회적 갈등과 끝없는 보복의 시작이었다. 

 

최악의 일본 전범, 이시이 시로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다는 것이 재판의 가장 이상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전후, 그리고 독재 몰락 이후 이뤄지는 재판에는 잠재적인 피고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행해진다'라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상징적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최악의 일본 전범 중 한 명은 이시이 시로라는 의사였다. 그는 박테리아와 화학무기 개발에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그는 만주국 하얼빈 근처에서 기타노 마사지와 함께 731부대를 이끌며 수천 명의 죄수들을 이용해서 임파선종 페스트, 콜레라 그리고 다른 질병들을 실험했다. 주로 중국인으로, 러시아인과 소수의 미군 전쟁포로들도 마루타로 이용되었다. 731부대는 또한 중국인 도시에 치명적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를 벼룩과 함께 중국인 도시에 떨어뜨리는 일도 했다. 1945년 여름 소련 적군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이시이와 기타노 등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반면 많은 수련의들은 소련 군대에 의해 전범으로 재판정에 섰다. 일본에서는 맥아더가 전범들을 재판하겠다고 나섰으나 이시이는 미군에게 인간 실험 자료가 중요한 정보임을 확신시키는 데 성공하고 살아남는다. 이시이는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의 장례는 기타노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기타노는  일본의 첫 상업 혈액은행인 녹십자의 회장이 되었다. 

 

마닐라 학살의 전범 '야마시타 도모유키 재판 논쟁' 

  태평양 전장에서 시행된 첫 전범재판은 '말레이 반도의 호랑이'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에 대한 공판이었다. 1945년 2월 미군의 진격으로 마닐라에 갇힌 2만여명의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주둔하는 동안 마닐라를 최대한 파괴하고, 광란의 폭력을 이어갔다. 여성, 갓난아기, 남성, 환자 등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한 달간의 아수라장 끝에 마닐라는 불타는 폐허가 되었고, 필리핀인 10만여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이 2차 대전에서 가장 극악한 잔혹 행위 중 하나였던 마닐라 학살이다. 그해 가을 야마시타는 마닐라 학살을 허가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서게 된다. 맥아더는 그와 관련된 모욕적 경험으로 야마시타의 재판에 개인적 감정을 투영하였다. 재판은 보복의 한 형태였다. 

  누군가는 마닐라 학살 뿐 아니라, 일본 점령 아래 자행된 다른 야만적 폭력에 대한 죄값을 치뤄야 했다. 필리핀 엘리트 부역자들은 대거 기소를 피했고, 레지스탕스는 잔혹한 얼굴을 가진 상징적 악인을 필요로 했다. 야마시타 도무유키는 일본 전범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았다. 그에 대한 재판을 보도하며 그를 강력히 비난한 미국 언론의 기사도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야마시타가 필리핀에 도착한 때는 맥아더가 착륙한 직후로, 일본의 방어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명령 체계 또한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 장군들은 자신들이 명령했고, 사주했고, 직접 참여했던 전쟁 범죄에 대해서만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명령에 반해 행동했던 군대가 저지른 잔혹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진주만 폭격 기념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미국의 대법관 중 일부는 이 재판의 공정성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친나치 부역자 라발과 무서르트의 코미디

  맥아더는 일본군에 대한 보복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정당화했다. 맥아더에게 야마시타는 군인에게 오점이자 불명예를 가져온 인물이었다. 독일, 일본의 전범 및 공범들에 대한 재판은 법치의 재건일 뿐 아니라 '문명'의 재건이었다. 이런 논리는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재판에서도 사용되었다. '수치', '불명예의 기억'이라는 오점을 지워내기 위한 재판은 외국의 점령으로 수치심에 빠진 국가들에 매우 중요했다. 국가 지도자들이 명예 때문이라며 점령자들에게 협력했던 나라들에서는 이런 재판이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프랑스 비시 정부의 장관이었던 피에르 라발과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 격이었던 안톤 무서르트의 재판이 그러했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1945년에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둘 다 스스로를 명예로운 인간이며, 국익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애국자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국에서 가장 미움받은 인사로 생을 마쳤다. 

  그들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처럼 외모가 비호감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조국이 독일에 침략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어떤 적대감도 없었고, 라발에게는 파시즘 이상주의가 전혀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유럽'이라는 히틀러의 비전에서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보았다. 스스로를 '부역을 통한 구원자'로 생각한 그들은 독일이 쳐놓은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도 자신의 민족주의적 환상이 독일의 계획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새로운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 착각했다. 독일 입장에서는 그들이 매우 유용했다. 그들은 독일인들에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며 경멸과 불신을 받았고, 조국에서도 수치스러운 미움의 대상이었다. 우군이 거의 없는 그들을 대표적인 부역자 사례로 만드는 것은, 전시에 어떤 용기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을 안도하게 했다. 

  페탱도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결국 추방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타임>지는 '피에르 라발에 대한 처형이 꼭 해야 하는 집안일 같았고, 복수심을 만족시켰다'고 기록했다. 이는 불공평했다. 그러나 드골은 국민적 여망 때문에라도 이 숙청과 재판을 진행해야 했다. 살아 있는 반역자가 민중이라는 사자에게 던져져야 했다. 라발은 처형당했고, 사망 후에도 얼굴에 총격을 당했다. 무서르트의 재판도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재판은 대중의 감정에 휘둘렸다. 망상에 쉽게 빠져드는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법정을 "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라고 칭해서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결국 그는 12명의 사형집행단에게 처형당했다. 

  무서르트와 라발의 죽음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사례, 전후에 세워진 정부들이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이 재판들, 특히 라발의 재판의 경우는 복수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었다 하더라도, 과정 자체의 결점이 많았기 때문에 정당성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최악을 공부하는 것이 문명화 과정 

  현행 법률이 평범한 전쟁범죄를 넘어선 범죄를 다룰 능력이 있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나치의 범죄가 너무 끔찍해서 법률적 절차를 넘어선다는 주장도 있었다. 전범재판이 법의 지배라는 취지를 해치므로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주요 범죄자들을 단순 총살하는 것이 오히려 법률 취지에 더 맞는다는 것이다. 194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조차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전범재판이 진행되면서 즉각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자 독일인들은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 행위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재판을 단순한 선전, 선동으로 여기기도 했다. 나치의 계획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사람들은 그 전체적 규모와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국은 그것이 전대미문의 무엇이라는 충분한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소련 군대는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폴란드에서 '죽음의 수용소'에 남겨진 것들을 직접 목격했다. 서구 연합국은 다하우,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남겨진 증거들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병사, 기자, 미국 상하원 의원, 영국 의원에게도 수용소를 둘러보도록 하고 모든 것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방문과 기록을 통해서 참상은 조금씩 알려졌다. 아이젠하워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하고, 이를 통해 인류가 훨씬 나아질 수 있으며, 최악을 공부하는 것이 곧 문명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를 통해 전 세계가 올바른 도덕 교육을 시행하기를 원했다. 

  베르겐 -벨젠에서 열린 첫 번째 강제수용소 재판은 나치 범죄에 기존의 법률과 법적 절차를 적용하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먼저 이것이 전쟁법과 관습 위반이라는 전쟁범죄에 해당하느냐는 논란이 있었고, 군사적 관점에서 피고인들이 군대에서 명령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과 학계의 옹호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죽음의 수용소와 강제수용소 간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가스실이 운영되기도 전에 이미 중부 유럽에서 수많은 살인이 자행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대량 학살이 체계적이었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전쟁 범죄에 관한 기존의 법률과 관습이 나치가 저지른 범죄의 성격과 규모를 다루기에는 이미 적절치 않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예닐곱 명의 피고 중 몇몇은 '벨젠의 괴물' 혹은 '아름다운 야수'로 불렸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강조되면 그런 행동마저도 정상으로 만들었던 범죄 구조 및 체계에 대한 요점을 잃을 수도 있다.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가 이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집단학살이 정부 정책으로 결정되면 친위대 제국 총통에서부터 기차 운영 시간을 담당하는 하급 관료까지 모두가 공모자가 된다.  

 

뉘른베르크 재판, "권태의 성채"

  뉘른베르크 재판정에 선 피고인 21명은 전혀 야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완전히 이해하는 단 한 사람, 그는 수용소 생존자였던 젊은 유대인 기자 에른스트 미헬이었다. 독일공영통신사 기자였던 그의 기록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뉘른베르크 법정은 법률에 대한 진지한 태도 때문에 모든 과정을 밟았고 따라서 재판이 길어졌다. 이러한 지루함이 대중의 보복 계획을 막았는데, 그것이 문명사회의 정의를 지향하는 자유정부 재판의 핵심적 역할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인식은 미미했다. 미국과 유럽 연합국은 이전에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널리 퍼져 있는 유대인에 대판 비호감 때문에 대중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소련도 전쟁 이후 꽤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파시즘 희생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1945년 8월 국제군사재판소 런던헌장에는 '반인도주의 범죄', '반평화 범죄'라는 새로운 법적 범주가 만들어졌다. 전쟁범죄에 대한 개념이 확대되고, '모의', '공모'가 법적 테두리로 들어왔다. 이미 저질러진 범죄 사후에 만든 법률을 근거로 범죄를 단죄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많다. 패전국의 피고인을 승전국에서 재판받게 하는 것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재판이 약식 처형보다는 낫다. 연합국 승리자들이 약식 처형을 선택했다면 그들도 나치와 똑같은 도덕적 위험에 빠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의가 실현됐는가? 정의가 실현됐다고 확신할 만큼 숙청과 재판이 충분했는가? 아니다. 완전한 정의 구현은 가장 낙관적 환경에서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이상일 뿐이다. 재판과 숙청 과정이란 불완전하고 섬셍한 보정 작업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회주의가 아마도 가장 유용한 자질이었을 것이다. 패전국이든 점령국이든 기회주의적 엘리트들은 잘 살아 남아 전후 국가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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