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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후기] 지식의 의지에 관하여 :: 오리엔탈리즘1부 1~2장 :: 0220(화) +3
오라클 / 2018-02-26 / 조회 977 

본문

 

지식의 의지에 관하여 ...... 오리엔탈리즘1부 1~2장 :: 후기 0220(화)

 

[1]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지배를 낳는다. “지식은 권력 자체이다” 

 

1990년 영국의 정치가 밸푸어는 이집트점령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군사력ㆍ경제력이 아니라 지식의 우월성을 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 영국인에게 이집트란 곧 영국이 알고 있는 이집트를 말하고, 나아가 이집트인에게 이집트 역시 영국이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는 이집트 바로 그것이다.”  “종속종족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선인가를 알 힘이 없다.”(크로머) “동양인은 그들과 그들의 행복에 대해 그들 이상으로 잘 알고 있는 인종에 의해 지배된다. ······ 영국의 점령이 현대 이집트문명의 기초가 되며, 따라서 이집트는 영국의 점령을 요구한다.”(밸푸어)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의 권위를 의미하고 이는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한다.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식’은 ‘동양에 대한 지배’를 낳는다. 이처럼 지식은 권력을 낳고 권력의 증대는 지식의 증대를 요구한다는 것에 의해, 정보와 지배가 서로를 점점 강화하는 ‘지식과 권력의 변증법’이 작용한다.

 

사이드는 18C중엽 이후 동양과 서양을 규정하는 2가지 양상으로, 첫째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 지식의 증대와 둘째 유럽이 언제나 강자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을 들었다. 즉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식’이 서양과 동양의 관계(강자와 약자)를 규정한다. 

 

한편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의 지배를 사후에 합리화하는 수단이라고 단정하면,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의 지배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 즉 지식은 권력을 ‘사후에 추인(합리화)’할 뿐 아니라, ‘사전에 계획(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이 ‘권력의 수단’이기 이전에 ‘권력 자체’라는 것을 말한다.

 

[2]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권력의지이다. “지식은 권력의 의지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지식’ 이전에 ‘동양에 대한 권력의지’를 말한다. 동양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동양을 ‘어떤 방식’으로 알고 있는가의 문제이고 이미 동양에 대한 권력의지를 포함한다. 달리 말하면, 지식이 권력을 낳는 것은 지식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의지 때문이다. 어떤 지식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지식은 ‘이론적 체계’ 이전에 ‘권력의 의지’이다. 즉 서양에게 동양인이란 ‘식민지에서 통치하는 인적자원’일 뿐이며, 동양인에 대한 연구란 ‘인간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하는 연구이다. 

 

‘서양인의 우월성과 동양인의 열등성’은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이끌어낸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양인은 자치의 능력이 있는 반면, 동양인은 자치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다. 서양적 관점에서 자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동양민족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확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양의 정부가 우리 손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밸푸어) “동양적 심성은 정확함을 기피하는데, 이는 사람을 허위로 타락시킨다. 유럽인은 주도면말한 논리를 좋아하고 한 치의 애매함도 없다. 유럽인은 타고난 논리학자이며, 타고난 회의론자이고, 증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인의 정신은 동양의 기이한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균형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고, 동양인의 추론은 매우 감상적이다.”(크로머) 밸푸어와 크로머에 따르면, 동양인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점이야말로 죄인이었다. 이러한 동어반복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동양인의 존재 자체가 유죄인 것이다. 

 

이러한 서양인과 동양인의 관계에 대해 밸푸어와 크로머는 전형적 용어로 표현했다. ① 예컨대,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유치하고 ‘비정상’이다. 따라서 유럽인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하고 ‘정상’이다. ② 또한 동양인이 갖는 세계의 인지가능성과 자기확신은 동양인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서양이 동양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③ 그리하여 동양에 관한 지식은 서양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서양은 동양ㆍ동양인ㆍ동양세계를 날조한다. 크로머와 밸푸어의 언어에서, 동양인은 (법정에서처럼) 재판받는 존재로, (교육과정에서처럼) 학습되고 묘사되는 존재로, (학교나 감옥에서처럼) 훈련받고 규율되는 존재로, (동물도감에서처럼) 도해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동양인은 어떤 경우에도 지배의 틀 속에 포함되며 그 틀을 따라 표상되는 존재이다. 

 

[3] 오리엔탈리즘의 일반성 “동일자가 타자를 생산하는 모든 곳에 오리엔탈리즘은 작동한다” 

 

크로머의 《현대의 이집트》는 1911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한국침략을 위한 일본의 참고문헌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이 서양과 동양(영국과 이집트)을 넘어 동양과 동양(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도 유용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기 위한 방식이나 동양과 서양 사이에 만들어진 사고방식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은 정치적 제국주의적 지배가 진행되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이다.

 

한편,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이미지(신비롭거나 미개한 지역이라는)와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이미지(신비하거나 열등한 존재라는), 도시가 농촌을 바라보는 이미지(평화롭거나 낙후된 지역이라는)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에 있어서 동양의 이미지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은 일자와 타자가 존재하는 모든 관계에서, 동일자가 타자를 생산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지평을 일반화할 수 있다. 즉 정치적 제국주의와 문화적 이데올로기, 혹은 동일자가 생산하는 타자의 이미지로 정의할 때, 오리엔탈리즘은 지역적으로 규정되는 타자성일 뿐이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오라클님이 정리해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요점을 다시 훑게 되고 지난 시간이 많이 상기가 됩니다.
그리고 세미나 시간에 오라클님이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이 글로 더 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시간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댓글로 조금 남겨볼까 합니다. ㅎㅎ

*
우선, 지식이 권력을 사후에 정당화할 뿐 아니라, 그에 앞서 기반을 마련해준다는 이야기를,
오라클님이 후기에도 써 주셨지만, 그런 부분에서 저는 푸코의 흔적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에도 쓰셨듯, 지식의 의지랄까요.
'이 지식(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은 식민지 침략에 의해, 또 이질성이나 비정상에 대한 인간의 흥미가 확대됨에 따라 강화됨과 동시에 민족학, 비교해부학, 문헌학, 역사학과 같은 학문의 발전에 의해 이용되었다.'(80)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르는 기준이 탄생하고, 그것은 지식과 크게 관련이 되어 있어 보입니다.
후기 본문에도 발췌하신 바, 그런 기준에 따라 동양인은 재판받는 존재, 학습을 받아야 하고, 규율을 따르고, 교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서양이 동양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서술한 1장의 내용에서는,
동양이 비정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이라는 온갖 수식어들이 태동하게 된 계기?들이 나오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동양에는 '뉴턴 역학이 없어서' 라고 한 것이 저는 기억에 많이 남네요. ㅎㅎㅎ
그에 비해, 모든 것이 수치화된 지금을 또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고요.
시기가 시기인지라, 스포츠를 많이 보았는데,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종목 자체도 서구화된 여건에서
'동양인 치고 잘했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ㅎㅎ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라는 책에서 보면,
시공간이 어지러워져 어떤 특정한 것으로 고정될 수 없는 우주의 장소들을 안내한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라는 여행 가이드 북의 앞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나옵니다.

"이 책에 (...) 중요한 오류가 있을 경우, 잘못된 쪽은 항상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그 공고의 요점이었다. 공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내서》가 결정판입니다. 현실이 종종 부정확합니다.'"

저는 1부 1,2장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텍스트 의존성 때문에,
고전적 동양의 문헌과 이미지 등에 의존한 근대의 유럽인들이 실제 동양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들이 훑은 책에 나온대로 그렇게 끼워맞추어 당시의 동양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위의 인용문이 떠올랐습니다.
앞서, 서설에서 비코의 시선을 따라 동양이 고정불변의 무언가가 아니고 생동하는 무엇이라는 전제를 밝혀두었던 것도 더불어 생각이 납니다.

*
더불어, 책을 읽으며, '동양' 이나 '서양'이란 말 자체가 가진 너무나 거대한 추상성, 자의성 같은 것들 때문에,
혹은 그러한 구별이 나누는 어떤 각자의 특수성이 오히려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담론을 심화시키지는 않는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동양이란 실재하지 않는 무엇을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세미나 시간에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거대한 분류가 허구적이라면, 분류는 아예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라는 질문도 생각이 나네요.

*
읽으며, 또 이야기 나누며, 지난 주, <중국이라는 문제> 강의를 듣고 더욱 느끼는 것인데요,
제가 생각보다 더 오리엔탈리스트였고, 지금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세미나 시간에 나누었던 '이다(is)' 이야기, 흥미로웠는데, 금방 세미나를 끝맺어야 했던 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
반경험적, 텍스트 의존적, 에 대해 읽으며, 떠오른 게 있는데,
이만 댓글은 줄이고 내일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
후기 고맙습니다! 내일 만나요! ^ㅅ^

삼월님의 댓글

삼월

길고 정교한 후기에, 길고 세심한 댓글이로군요.
이 밤, 갑자기 들어와서 열심히 훑어보게 됩니다.
후기 중 지식은 권력의 수단이기 이전에 권력 자체라는 말에 몹시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사고 역시 권력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사고 역시 환상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싸워볼 수 있는 데까지는 싸워보는 겁니다. ㅎㅎ

동양, 서양 구분의 추상성을 이야기하니까,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표상의 문제를 거론한 게 떠오르네요.
그것이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표로서의 언어는 각자의 사고 안에서 서로 다른 기의를 가리키고 있을 거라는.
현님이 적은 것처럼, 표상은 그런 식으로 규정과 분류를 실행하고, 이를 통해 담론을 심화시키는 거겠지요. 
이 표상 안에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서로의 말뜻은 못 알아듣고 정수리만 쓰다듬다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어요. ㅎㅎ

그럼 야심한 밤, 옆동네 삼월은 이만 물러갑니다.
앞으로도 오리엔탈리즘 세미나 후기 구경하러 종종 올 거예요!
아, 오라클님, 정성스러운 후기 잘 읽었어요.

김현님의 댓글

김현 댓글의 댓글

와 삼월님 댓글 너무 반갑네요.
후기마다 달아주시는 덕분에, 옆동네가 아니라 같은 동네 같습니다. ㅎㅎ

그렇지 않아도, 읽으면 읽을수록 푸코의 흔적이 크게 드리우는 것 같습니다.
조금 발췌를 하여 가져와 보자면,
'어떤 현실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자 의도한 텍스트, 그리고 내가 위에서 서술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서 생긴 텍스트는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는 전문적 서술이며, 학자나 연구기관 또는 정부가 그것에 권위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 텍스트는 현실적 성공이 보증하는 이상의 큰 위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지식과 현실이란, 일종의 전통, 즉 미셸 푸코가 담론이라고 부른 것을 낳게 된다. 그리고 담론의 내부에서 생긴 텍스트의 내용을 결정하는 본질은, 특정 작가의 독창성이 아니라 실은 그러한 담론의 실체적 존재나 그 무게이다.'(174)
곳곳에서 푸코의 그림자가 발견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특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보면서 <성의 역사>에서 봐 왔던 '성' 같은 게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어요.
그래서인지, 푸코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한 번 더 생각해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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