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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차라투스트라2부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 :: 0226(월) +2
neovars… / 2018-03-03 / 조회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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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결과 순결님이 2018226일 『차라투스트라(“차라”)는 이렇게 말했다2부 중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에서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까지 발제를 하였습니다. 발제자께서 니체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후기까지 고려해서 발제를 하셨기 때문에, 후기는 니체의 방식대로 제가 느낀 것을 적기로 하겠습니다. 저희 후기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비판을 원합니다(이하 존칭 생략).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

  차라는 꿈속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를 보게 되는데, 꿈이나 거울을 자신의 무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는 거울 속에서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과 비웃음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타자의 욕망으로 보입니다. 아직까지 차라는 타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이고, 따라서 다신 한번 산을 내려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137면의 나 너무 오랫동안 고독하게 살아왔나보다. 그리하여 침묵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보다. 나 온통 입이 되고 말았으며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냇물의 노호가 되고 말았구나라는 표현에서, 차라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어머니의 잔소리처럼 들리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140면의 너희 자신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너의 자신으로 하여금 위버멘쉬의 선조가 되고 조상이 될 수 있도록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위버멘쉬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위버멘쉬가 되려는 의지가 삶 자체인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것이 사람이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너희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를 의미하기를!”에서 진리의 탐구의 수단으로 서양의 형이상학(, 이데아 등)을 배격하고 있다.   한편 너희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나 비이성적인 것을 태싱으로 해서는 안 될 이다라고 하여, 형이상학의 배척이 비이성주의를 의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141면의 최상의 비유라고 한다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런 비유는 일체의 덧없는 것들에 대한 찬미가 되어야 하며 정당화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에서 유한성에 대한 긍정과 차이에 대한 긍정을 엿볼 수 있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될 각오를 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에서 위와 같은 죽음이나 고통은 항상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면서 형이상학이 출현한다. , 창조와 죽음은 공존하고, 죽음과 함께 하지 않는 창조는 형이상학이다.

 143면의 느낌을 갖고 있는 모두가 내게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욕은 언제나 나를 해방시켜주는 자이자 기쁨을 전해주는 자로서 나를 찾아온다. 의욕은 해방을 가져온다---나의 깨달음에 순진무구한 것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식에 대한 의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에서 감옥이란 관념의 감옥을 의미한다. 해방이란 삶에 내재해 있는 죽음이나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생성되는 과거(관성 또는 습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생식에의 의지란 자율성을 의미한다.

 돌 속에 하나의 형상, 내 머리 속에 있는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에서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란 표현은 마치 개체 내부에 본질이 있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 자체가 하나의 형상이다.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

 145면의 깨달음에 이른 자에게는 사람 자체가 빨간 뺨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깨달음에 이른 자는 말한다. 수치심, 수치심, 수치심, 그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라고---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들에게는 너무나 수치심이 없다에서 빨간 뺨이란 수치심을 느끼는 얼굴을 의미하고, 수치심이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자비라는 것은 우월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146면의 사람이 존재한 이래, 사람은 너무나도 적게 기쁨을 맛보았다---우리가 보다 기뻐할 줄 알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거나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궁리를 어느 때보다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에서 사람들은 생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것을 뺐음으로써 기쁨을 찾아왔다.

 주는 대로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가 받을 때는 그것이 특별한 경우가 되도록 하라!”에서 주는 대로 받는다는 것은 소비의 목적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한 경우란 받는 것 이상을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147면에서 진정 속좁게 생각하기 보다는 악행을 저지른 편이 낫다!---악행은 정직하다---그러나 속좁은 생각은 진균과 같다에서 악행은 사회로부터 평가를 받음으로써 고칠 기회가 있으나 속좁은 생각은 그렇지 않아서 내부에서 자신을 무너뜨릴 때까지 펴질 수 있다.

 148면에서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자에게 우리는 더 없이 부당하게 행동한다에서 집단 내부에서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와 집단 외부의 제3자를 구별하여 후자에 대하여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미래의 불행에 무관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제들에 대하여]

153면의 저들은 지나간 길 위에 피자국을 남기고는 어리석게도 가르쳤다. 사람들은 피로써 진리를 증명한다고. 그러나 피야말로 진리에 대한 최악의 증인이다에서 피자국과 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 공포는 현실도피를 낳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방해꾼이다.

후텁지근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 이들이 만나는 곳에 구세주라는 광풍이 일어난다에서 후텁지근한 가슴이란 자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차가운 머리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군자들에 대하여]

 155면의 도덕군자들이여, 너희는 아직도 금전상의 대가를 바라고 있구나---내게 화가 나 있는가? 나 결코 덕이 덕 자체의 보수라고 가르친 일조차 없거늘에서 도덕군자들에게 덕은 자신의 생명력의 희생 또는 억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보수를 요구한다. 그러나 덕은 새로운 덕을 창조함으로써 그 역할을 다한다.

 156면의 너희가 지난 덕의 공적 하나하나는 꺼져가는 별과도 같다. 그 광채가 끝을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돌고 있구나는 것은 덕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157면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한 줌의 정의에 긍지를 느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에 못된 짓을 해댄다---나는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다에서 응보적 정의 또는 평균적 정의의 입장에서 정의를 자신의 악행에 대한 정당화에 활용되는 경우이다. 선악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159면의 보수, 되갚음, 형벌, 정의에 따른 앙갚음 따위의 언설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심이 없을 때, 행위는 선하다라고 말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에서 보수, 되갚음 등은 행위 목적을 외부에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심이 없다는 것, 즉 무아도 바람직하지 않다.

 

[잡 것에 대하여]

 162면의 나 지배하는 자들이 무엇을 두고 지배라고 부르는지를 보고는 저들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잡것을 상대로 벌이는 부정한 거래와 흥정을 말하다!”에서 부정한 거래란, 타인의 해방이 아니라, 타인에게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권력을 취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163면의 내가 느낀 역겨움이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어디에 샘이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인가? 진정, 나 즐거움의 샘을 되찾기 위해 더없이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야 했거늘!”에서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잡것들과 융화될 수 없기에 즐거움의 샘을 찾게 되었다.

 164면의 미래라고 하는 나무 위에 우리는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독수리가 부리도 우리 고독한 자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다 주리다!”에서 미래라는 나무란 희망을 의미하고, 독수리는 지혜를, 먹을거리는 영혼의 양식을 의미한다.

 

[타란툴라들에 대하여]

 166면의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너희야말로 타란툴라요 숨어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자들어렸다!”에서 평등은 차이와 창조의 부정과 개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167면의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무력감이라는 폭군의 광기가 너희 내면으로부터 평등을 부르짖고 있구나에서 스스로는 창조할 수 없는 무력감은 차이를 창조하는 자를 시기하게 된다.

 아버지가 침묵한 것, 그것은 아들에게서 발설되기 마련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폭로된 비밀임을 나 때때로 발견했다에서 아버지의 이중적인 또는 억제된 욕망은 아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저들의 질투심이 저들을 부추겨 사상가의 길을 가게도 한다---저들은 언제나 너무 멀리 간다는 것이다에서 사상가는 자신의 과도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169면의 사람은 자신들의 적의 속에서 형상과 유령을 만들어낼 줄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에서 부정, 즉 적의(敵意)에서 긍정, 즉 형상과 유령을 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

 172면의 너희는 민중을 우러러 공경함으로써 저들의 존재를 정당화해주려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불렀다에서 민주주의, 즉 다수결에 의하여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73면의 사막에는 예로부터 진실한 자,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자들이 사막의 주인으로서 살아왔다. 그와 달리 도시에는 자신들의 배를 넉넉히 채운 이름 높은 현자들, 이를테면 수레나 끄는 짐승들이 살아왔고에서 사막이란 고독을 의미하고 도시는 민중을 의미한다.

174면의 민중의 대변자로서 너희는 언제나 나귀처럼 완고하기도 했고---진정, 이른 높은 현자들이여, 민중의 하인이여!”에서 현자는 민중의 대변자이기도 하지만, 민중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민중의 하인이다.

 176면의 이름 높은 현자들이여, 의젓하게, 뻣뻣하고 꼿꼿하게 거기 그렇게 들 서 있구나!---너희는 바람의 광포함 앞에 몸을 움츠린, 잔뜩 부풀어오른 채 떨면서 바다를 가르는 돛을 본 적이 전혀 없는가?”는 강한 것은 잘 부러진다는 의미와 유사하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발제수준의 후기에.... 방대한 주석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새로운 관점이나 저와 다른 해석이나, 모든 점에 댓글을 달기란 불가능한 일이라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복이 넘치는 섬> p143 '돌 속의 형상'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1] 신의 부재증명과 인간의 창조의지

저는 <행복이 넘치는 섬>의 주제를 '신의 부재증명과 인간의 창조의지'로 읽었습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는 자(조물주)라고 간주되어왔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창조란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인간의 억측(가정)에 불과하며, 이 억측(신의 존재)이 인간의 창조의지를 가로막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신들에 대해 침묵하고, 인간이 스스로 위버멘쉬를 창조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 이 억측이 너희의 창조의지를 뛰어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너희는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일체의 신들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쉬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p140......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 그러나 이 억측(신)은 창조하는 자에게 신념을 빼앗아간다. p141 ......
 생식에 대한 의지가 나를 유혹하여 신에게 등을 돌리도록 했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창조할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p143"

[2] 내 안의 위버멘쉬를 깨우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차라투스라는 자신의 창조의지가 '인간을 위버멘쉬로 창조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단단하고 흉한 돌 속에는 위버멘쉬라는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으니,
나(망치)의 창조의지가 돌(인간) 속에 갇혀있는 형상(위버멘쉬)을 깨우도록 내몬다"는 것입니다.

"나의 창조의지는 나를 사람들에게로 내몬다. 망치(차라투스트라)를 돌(사람)로 내모는 것이다.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그 형상이 단단하고 흉한 돌 속에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부순다. ...... 나는 저 형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내게 어떤 그림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위버멘쉬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p143~14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을 조각하여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갇혀있는 '형상을 깨우는 것'입니다.
전자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작업자의 역할이 강조된다면,
후자는 잠재성을 현행화한다는 점에서 대상의 잠재력이 주요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작업자라도 돌의 잠재성이 아니라면 형상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돌(인간) 속에는 잠재적인 형태로 형상(위버멘쉬)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는 위버멘쉬가 존재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비판을 원합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 요거 보고 혼자 터졌습니다.
담금질로 멘탈훈련을 하시는듯 하네요 . 쿄쿄쿄쿄
항상 세미나 때도 선 나눠서 정리를 잘 해주시고 다른 시각을 말하셔서 도움 되고 재밌습니다.
주석까지 다신 꼼꼼 한 발제에 깜딱 놀랐어요..
저도 텍스트를 좀더 꼼꼼히 봐야 겟다는 반성을 하게 댔습니다.~
그럼 담주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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