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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한 줌의 정치_2부 위선의 사회와 뻔뻔함의 사회 :: 0303(토)
윤도봉 / 2018-03-08 / 조회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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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시대, 한줌의 정치> 2부 위선의 사회와 뻔뻔함의 사회                                             발제: 2018.3.3(토) 윤도현

 

 

1.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

 

‘통치’란 푸코에 따르면 “목적에 용이하게 이를 수 있도록 정리된, 사물들의 올바른 배열”로 국가와 결부되어 사용하더라도 “가능한 최대의 부가 산출되도록 보장해야 하며, 사람들이 충분한 생계 수단을 제공받도록 또한 인구가 증가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 권력과는 구별됨

 

하지만, 통치자는 사물의 올바른 배열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닌, 통치자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며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른 권력에 일방적 행사가 되어버렸고, 본질을 은폐하며 한다는 것이 아니라, 뻔뻔스레 다 까놓고 하고 있다. 그리고 법의 준수라는 엄준한 명령은 아랫것들 못살고 약한 자들에게만 의무가 되어버렸다.(지금 그나마 바로잡아가고 있겠죠??)

 

‘재난’이란 홍수나 태풍과 같은 통상적 재난이 아닌 지속적이고 대한민국 전국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을 재난이라고 지칭하며 이 재난은 재난의 해결을 임무로 하는 국가적 통치행위 그 자체에 의해 야기되고 생산된다는 점.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 ‘통치’가 재난을 야기하는 시대,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초상인 것이다

 

 

2. 스펙터클의 정치학

 

스펙터클이란 알기 쉽게 말하면 ‘구경거리’이다. 스펙터클이 지배적이 된다 함은 시각적인 외양에 의해 지배되며, 그것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됨을 뜻한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삶에서 분리된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 스펙터클에 인간이 예속된 사회를 뜻한다. 스펙터클은 단지 상품에 한정된 개념은 아니다. (디자인서울-새빛둥둥,ddp등, 청계천 등)

스펙터클의 정치학은 보여주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보이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보이지 않게 하는 그런 종류의 프로세스라고 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정치에서는 수동성을 슬그머니 요구한다. “정치는 이렇게 시선을 받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테니, 당신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

스펙터클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인 한, 그것이 ‘멋들어진 것’이 되려면 잡스런 것, 훼방놓는 것이 끼어들면 안된다. 조그만 잡음이나 외침, 항의의 소리라도 끼어들면 그 스펙트럼은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지며, 역으로 붕괴의 형태로 반대의 의미를 갖는 스펙터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3. 정치적 류머티즘 혹은 류머티즘적 정치체제

 

- 통치자로선 아마도 자신들이 통치하는 곳이 어떤 갈등도 없고 어떤 소음도 없는 세상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 게다. 

 

우리의 몸은 면역이란 개념을 통해 외부에서 침입한 세균을 공격도 하지만 공생도 하면서 그런 세포가 모여 기관이나 몸을 이룬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공생한다는 것은 그런 이질적인 것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얻는 순환계이다.

따라서 면역능력이 강할수록 면역체계는 유연해지고, 이질적 요소에 대한 공격성은 완화된다. 반면 면역체계의 과잉반응은 심지어 자기 신체의 일부조차 외부로 간주해 공격한다.

G20 또한 표면적으로는 글로벌한 수준에서 서로가 공존하고 공생하자는 것을 슬로건으로 내건다. 그러나 G20, G200이 될 때까지 숫자를 아무리 늘린다 해도, 이질적인 목소리나 불화의 표출을 억제한다면 그것은 그저 몸의 외형만을 키우면서 거꾸로 배제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무능력한 신체를 뜻할 뿐이다. 

정치적 류머티즘 혹은 류머티즘적 정치체제라는게 가능하다면 사회적 약자나 불만을 가진 자를 더욱더 강하게 배제하고 척결해야 하는 류머티즘의 글로벌화를 뜻하는 것 아닐까? 이런 것이 G20 이라면 동조하여 놀아주는 것이 나닌 자기를 잡아먹는 병임을 알려주고 치료할 생각을 하게 해주고, 공생하는 방법을 찾도록 촉발해야 한다.

 

 

4. 시민을 야습하는 국가

 

법이 삶보다 앞설 수는 없다. 삶의 최소치마저 무시했을 때는, 저항으로 인해 자신이 와해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법보다 공무원과 그 무리들이 법보다 무례하다. 돈을 벌기 위한 공간으로 도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국가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잠든 사이 시민을 야습하고 있다.

야습으로 부서지고 죽어가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손을 함께 잡고 습격의 장소를 새로운 삶의 장소로 만들어 활기가 피어나도록 해야한다.

 

 

5. 망국적 포퓰리즘과 근본적 포퓰리즘

 

포퓰리즘이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대중의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포퓰리즘이 대중의 욕망을 정치의 기초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쉽게 비난하며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정치가 제대로 서기 위해 발 딛고 설 출발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망국적 포퓰리즘은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조 원대의 4대강 공사비로 재정이 바닥나는 판인데도, 부자들 세금을 깎아주고 법인세 깎아주는 것 같은 짓이 아닐까?

 

 

6. 무능한 자들의 전쟁과 철없는 분들의 통일구상

 

북한이 붕괴되고 통일이 되리라고 가정해보자. 남한의 대통령이란 자리에 앉아서 그런 보고를 받았다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단순한 통치자의 관점에 서 있다 해도 통일 뒤에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도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2015년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해, 대북협력 정책에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고 대북강경론으로 일관하려 했다.

전쟁과 같은 비극은 대부분 전쟁이나 정치에 능란한 정치가가 아니라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고함치며 목소리 높이는 방식 외엔 싸움이나 정치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 얼치기들에 의해 어이없이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말 웃길 정도로 비극적인, 끔찍한 운명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운명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어이없는 비극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7. 위선이 아쉬운 시대

 

마음에 없는 선의의 가면을 쓰는 위선이 지배하는 시대와 더러운 속내를 까놓고 드러내는 뻔뻔함이 지배하는 시대가 있다면 그중 어떤 게 더 나을까?

 

대통령들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비리와 부정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것을 감추면서 선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종종 마음에도 없는 선행을 해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비리나 부정이 드러나도 거꾸로 “뭐가 문제인데?”라고 반문하며, 뻔뻔함의 시대를 보여준다. 

뻔뻔함 때문에 위선도 아쉬워 보이는 세대에 살면서 우리마저도 새로운 일상이 된 이런 사실에 무감각해지며 위선마저 사라진 뻔뻔함의 사회에 살게 될까 걱정된다.

일상이 된 것은 아무리 불법적이고 나쁜 일이어도 이렇듯 자각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임을 자각하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 말대로 ‘섬뜩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의 일상 전체가 자기를 등지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있지 않고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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