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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발제] 감시와 처벌_2장 신체형의 호화로움 :: 0315(목)
김현 / 2018-03-15 / 조회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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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세미나] 감시와 처벌                                                 2018-03-15(목) 발제자 : 현

 

제 2 장 신체형의 호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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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 전까지, 형벌 실무를 지배해 온 1670년의 왕령은 신체형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끔찍한 신체형이 빈번히 시행되지는 않았다. 비율로 따지자면, 사형선고의 비율은 대체로 15% 미만의 비율이었고, 법원이나 왕권은 가혹한 처벌을 회피하려 했다. 실제로 유죄 선고의 대부분은 추방이나 벌금형이었는데, 이런 비신체형의 대부분은, 그러나 역시 신체형의 차원을 부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모든 형벌은 신체형적인 요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체형이란, 조쿠르에 의하면 ‘고통스럽고, 다소 잔인한 신체 중심의 형벌’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야만이나 광폭성은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기술로 봐야할 것이다. 형벌이 신체형이 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은, 첫째로, 형벌이 정확히 측정될 수 없다고는 해도, 적어도 평가, 비교하여 등급을 정할 수 있는 고통의 분류가 가능하다. 사형도 단지 생존권의 박탈이란 문제가 아니라, 그 종결까지 정교하게 고통을 분할하고 등급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체형에 해당한다. 둘째,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에 규칙이 수반된다는 점으로, 타격 형태, 고통의 질과 크기, 시간, 범죄의 경중 등과 같은 요소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신체형은 일종의 의식을 구성하는데, 형벌의 희생자에게 흔적을 남겨야 한다다는 것, 형벌을 부과하는 사법 측이 승리로 상징되는 힘의 과시, 이 두 가지 요청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렇게 형벌로서의 신체형은 마구잡이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세분화된 고통을 만들어내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는 조직된 의식이지, 단순한 분토의 표현이 아니다. 화려함을 갖춘 신체형의 극단성은 권력의 경제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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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고전주의 시대의 재판의 방식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다. 영국은 별도로 한다고 해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모든 범죄소송절차가 판결까지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피고인에게까지도 불투명한 것이었다. 사법관이 그의 마음대로 진실을 설정하고 문서의 형식이 되면, 그것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그런 것들만 증거가 되었다. 이런 식의 비공개적 소송 절차와 문서중심으로 된 형식은 곧 범죄사권에서의 진실 확증이 군주와 재판관들에게 절대적이고 독점적이었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국왕은 ‘처벌권이 속해 있는 최고권력이 어떠한 경우에도 군중 집단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취지를 명시하려 했을 것’(71)으로, 군주의 사법권 앞에서 모두는 침묵을 지켜야했다. 

 그러나 이런 비공개적 소송 절차에도 진실 확증을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이 지켜져야 했다. 증거와 관련하여, ‘진실하고 직접적인 것이거나 합법적인 증거’, ‘간접적이고 추측에 의한 인위적 증거’, ‘명백한 증거’, ‘중요한 증거’, ‘불완전하거나 사소한 증거’, ‘긴급한 또는 필요한 증거’, ‘절반쯤 완전한 증거’, ‘거리가 먼 증거’ 등의 구별은 현실적인 기능을 한다. 첫째로, ‘각각의 증거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개별적인 사항으로 분리되는 경우에도, 명확한 형태의 사법적 효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72)이고, 둘째로, 증거가 명확한 계산 규칙에 따라 상호 조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심한 형법상 산술을 따른다고 해도, 이런 체계의 규칙은 전문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절차의 비밀 유지 원칙을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 피고인이 유죄라 하더라도 판결 그 자체는 부당’(73)하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법적인 증거에 관한 이처럼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논리야말로 지식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력의 내적 조절을 이루는 한 방법’(73)이었다. 

 문서 본위, 비밀 유지,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증거 조립의 요소를 갖춘 재판에서는 피고인 없이도 진실을 생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백이 필요로 하지 않아도 자백을 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첫째로 자백은 확실한 증거를 구성하며, 둘째, 피고인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진실이 완전히 힘을 발휘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만들어진 모든 상황에 피고인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자백하는 범죄자는 문서에 의해서 재구성되는 범죄의 안쪽에서 살아 있는 진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74) 이런 구조 속에서 자백은 이중의 양의성을 갖게 된다. 먼저, 자백은 유죄 선고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고, 부가적인 증거를 수반해야 하는 한편, 다른 어떤 증거보다 우선한다. 여기서 이차적 양의성이 발생하는데, 자백이 필요한 것으로 요구되는 만큼, 자백을 위한 강제권이 사용된다. 그러나 자백은 화해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백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고전주의 시대, 자백 입수를 위한 두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심문 전 피고인에게 요구하는 선서(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 그리고 고문(신체적 폭력)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고문은 형벌 구조 속에서였다. 여기서 구조란, ‘사법권이 비밀리에 행하는 조사의 요소와 피고인이 관례적으로 행하는 자백의 요소를 갖춘 구조’로, 이를 통해 진실을 생산하는 일이 목표였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은, 자백하고 고통당하는 피고인의 신체에서였다.

 이렇게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고문의 기능 속에서 진실에 대한 신체형을 포착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고문은 잔인한 것이기는 했어도, 야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절차와 규칙에 따른 것으로, 용의주도하게 체계화되어 있는 사법적 행위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 고문시키는 재판관과 고문당하는 용의자의 구도 속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위험이 따른다. 단순히, 용의자가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위험 외에도, ‘참고 견디는 자’, ‘강한 인내심으로 저항하는’ 경우, 용의자는 이 경기의 구도에서 이기고, 재판관은 직책을 사퇴해야 하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재판관은 증거 확보가 따르는 고문을 가했고, 아주 나쁜 중죄를 범한 경우, 고문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언뜻 성급하고 야만적인 듯 보이지만, 고전주의 시대의 고문은 ‘진실을 결정지을 신체를 대상으로 한 시험’(79)으로, 고통, 쌍방의 대결, 진실이란 3요소가 용의자의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고문은 죄인의 고백을 드러내는 수단(조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투이며, 진실을 생산하여 적을 제압하는 승리(결투)이다. 

 고문의 과정은 예심과 처벌의 요소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이 용의자는 무죄의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용의자인 한 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증거와 논증은 진실과 허위라는 이분법 속이 아니라, 연속적 점증법의 원칙을 따랐다는 것이다. 논증에서 어떤 단계에 이르는 것(진실의 생산하는 의식)은 유죄성의 단계를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곧 처벌도 포함한 것(처벌하는 의식)이었다. ‘신체형에서 심문당하는 신체는 징벌의 적용 지점이자 진실 강요의 장소이다. 또한, 추정 증거가 상호의존 관계에 의해 증거 조사의 한 구성요서이면서 유죄성을 형성하는 한 단편이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문에 따르는 고통은 처벌하기 위한 조치이자 동시에 예심 행위인 것이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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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예심의 단계에서 징벌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신체형은 형 집행 단계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공개적인 징벌 의식에서 수형자의 신체는 본질적인 부분이 되는데,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형벌을 받는 가운데, 신체 자체가 비밀스러운 소송 절차의 공개적 근거가 된다. 18세기 이런 화려한 공개적 형벌에는 (1) 죄인 스스로가 유죄 선고를 하고 (2) 다시금 자백하고 (3) 자신 속에 범죄를 각인시키고 (4) 징벌의 효과를 화려한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하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알리는 사람이 되는 것, 게시, 판결문의 낭독, 공개사과, 범죄의 인정을 통해 사항의 진실을 증명하고, 그 죄와 심판을 자기 신체를 통해 물질적으로 감당한다.

 (2) 자백 장면을 반복하도록 하는데, 유죄 선고에 스스로 서명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수형자의 신체를 통해 범죄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만듦으로써 재판을 정당화한다.

 (3) 신체형을 범죄와 연결, 죄인이 자신 속에 범죄를 각인시키도록 한다. 범죄 현장에서의 재현, 범죄 현장에서의 형 집행 또는 상징적인 신체형('하나의 시학')을 시행하고, 죄인의 죽음을 통해 그 범죄를 소멸시키도록 한다.

 (4) 신체형의 느린 진행, 수형자의 절규와 고통의 과정은 이런 사법적 의식에 있어서 최종적인 시험의 역할을 한다. 예심 단계에서의 고문은, 그나마 생명을 구할 여지가 있는 도박이었다면, 집행 단계에서는 생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영혼을 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지옥을 미리보는 듯한 화려한 형벌의 집행에서의 고통 감내, 수형자가 죽음에 이르는 시간 등은 진실과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여겼다. 사람들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범죄와 무죄, 과거와 미래와 같이 그들이 궁금해하는 진실을 판독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체는 여러 번에 걸쳐 증거와 진실, 범죄와 처벌을 종합하게 만드는 수단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이런 형벌 의식에서의 본질적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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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사법적 신체형은 정치적 행사, 즉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의식행사이기도 하다. 고전주의 시대, 법에 대한 위반은 규칙이나 손해를 넘어 법을 포고하는 사람, 즉 지배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군주의 개입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자의 문제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해친 자에 대한 반격의 조처이다. 징벌은 단순히 손해에 대한 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국에 가한 과실에의 보상, 국왕의 인격에 가해진 공격에 보복까지도 내포한다. 그리하여 처벌권은 군주가 적과 싸울 권리의 한 측면으로, 생사여탈의 권력은 형벌을 명할 때 사용하는 권리에 속했다. 그러므로 징벌은 개인적이면서 공개적인 보복의 수단인데, 법에 대한 단순 금지에 그 목표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권위(군주의 신체적 정치적 힘)를 경시한 행위에 대한 보복까지도 그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신체형은 상처받은 군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의식으로, 군주권을 화려한 형태로 과시하면서 회복시킨다. 따라서, 경범죄가 판결에 있어서 손해와 균형이 비교적 잘 맞추어져 있어야 할지라도, 중죄에 대한 형벌집행은 불균형과 과도함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형벌 의식 속에는 권력과 법의 우월성에 대한 과시적 주장과 더불어, 적대자의 신체를 지배하는 물리적 힘의 우월성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처벌 의식은 '공포는 자아내는' 모양이 되는데, 18세기의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본보기 처형이 재발 방지 측면의 경제성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그보다도 범죄자의 처형당하는 신체를 통해 군주의 권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처형에 대해서는 그 차례가 세세하게 열거되었고 그것에 따랐다. 사형수를 둘러싸고는 군사적 기구 전체가 동원되었는데, 그 이유는 죄인의 탈출, 난동 방지 외에도 죄인을 구출 혹은 살해를 예방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렇게 군주는 사법의 수장이자, 군사의 수장이라는 측면 모두를 구현하게 된다. 공개 처형은 승리와 싸움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드러내는데, 범죄자와 통치자 사이의 싸움을 종결짓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그 권력, 즉 신체를 둘러싼 힘의 불균형을 명시해야 하는 행위였다. 이미 처형된 시체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것, 신체형은 이런 승리의 과시 의식을 통해 완성된다. 

 이런 대결의 장면에서 사형집행인과 ‘참고 견디는 수형자’는 마치 결투신청과 기마 창 경기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는데, 사형집행인이 명령대로 잘 시행했을 경우, 박수를 받지만, 실패의 경우 벌을 받거나 때로는 고발당하고, 사형수는 사면되는 것이 거의 관례였다. 그렇기에 판결 속에 확실한 명령에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사형수와의 대결에서 집행인은 비록 국왕 편의 결투자였지만,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은 결투자이자, ‘대단히 필요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죄인과 치욕을 나누게 되는 존재였다. 집행인은 비록 대리로 군주의 명을 시행하는 자였지만, 그렇다고 권력 그 자체가 집행인에게 현존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특별사면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형의 집행은 천천히 이루어졌고, 여기에는 우발적으로 특사가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결국, 형을 집행할 권력, 법에 대한 모욕에 대해 보복하는 권력, 법의 시행이나 보복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권력으로 통치자는 현존하는 것이다. 

 대역죄라는 것이 있고, 국왕 살해자는 그 중 절대적이고 완전한 범죄자인데, 국왕을 살해하려는 것은 곧 통치 권력의 근본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처벌은 현존하는 신체형 중에서도 최고의 형태, 무한한 보복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18세기 의식 중심으로 된 신체형은 하나의 정치적인 운용 부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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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번한 민중 봉기, 내란, 고등 법원을 제쳐놓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국왕의 의지 같은 것들은 신체형 중심의 형벌의 존속을 설명하는 일반적이고 외부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이유는 신체형의 존속과 가능성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신체형에 반대하는 앙의 내용을 개별적인 것이며, 취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신체형 존속의 중요한 이유는, 신체형의 기능이 진실을 명시하는 것이자 권력을 운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체형으로 문서와 구술, 은폐된 것과 공개된 것, 자백의 역할 등이 확고하게 보장되며, 수형자의 신체에 죄를 비끄러매어 범죄를 명시하고 소멸되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진실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모든 처벌 기구의 핵심에 있는 것이며, 이 상관관계는, 형태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긴 하겠지만, 현대적 형벌제도의 실제 내용 안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99-100)

 ‘문명’이 비난하는 신체형의 ‘잔인성’은 우선 중대한 범죄에 특유한 성격이다. 한편, 처벌도, 공개적으로 범죄의 가혹함을 보이려는 한, 역시 ‘잔인성’을 떠맡게 된다. 잔인성은 신체형의 형태로 전환되는데, 범죄자에 대한 통치자의 보복으로, 범죄의 잔인성을 지배하여 소멸시킬 정도의 극단성을 통해 그것보다 우월한 것이 되게끔 기능한다. 따라서, 잔인성은 형벌과 범죄를 연결 짓는 원칙이자, 범죄에 대한 징벌의 분노를 의미한다. 신체형의 잔인성은 진실과 권력 확보의 수단, 완료되어 가고 있는 증거 조사의 의식, 그리고 통치자의 승리를 축하하려는 의식이다. 19세기의 형벌은 ‘평온한’ 조사, 폭력에 있어서의 거리를 통해, 범죄와 공권력의 징벌을 차별화하려고 했지만, 앞선 시대의 형벌은 단순히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속죄식에 따르는 잔인성은 전능한 권력에 의해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의례적 행사의 구성요인이었다.’(101) 당시의 처벌 의식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영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권력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감시하지 않더라도 화려함을 통해서 자신의 효력을 계속 쇄신시키기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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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징벌을 대신하여, ‘인간적인’ 징벌이 나타나게 된 여러 이유들 중, 살펴야 할 것은, 신체형 자체에 내재해 있는 요소이다. 신체형이란 의식을 완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민중이다. 이때, 민중은, 관객으로, 또한 처벌의 보증인으로서 참여의 역할까지 주어진다. 범죄자에 대한 보복 행위에 민중은 때로는 국왕의 편에서 협력하며 참여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들은 이런 군중들로부터 보호해야 하기도 했는데, ‘통치자는 자기의 권력을 시위하기 위해 군중을 불러 모아서 일시적으로는 폭력 행위를 묵인하고, 일단은 그것을 국왕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강조했던 것이지만, 곧 자신의 특권의 경계선을 내세워 그 폭력행위를 차단했던 것이다.’(105)

 그런데 이렇게 동원된 민중들이 신체형의 의식에 있어서 처벌의 권력을 거부, 반항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특히, 폭동에 대한 제재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을 때 그랬다. 이런 경우, 사형집행 시까지 사형수에게는 환호와 격려가 따랐고, 군중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고통의 목격이 아니라 법과 권력과 종교를 향한 저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며, 이 때의 처형 의식은 축제가 아니라, 외려 권력자가 농락당하고, 죄인이 영웅시된다.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고 생각할 경우, 또는 높은 신분이라면 가벼운 형에 처해질 범죄를 하층민이 저질러 사형에 처해질 때와 같은 경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하인들을 처형할 경우 등, 이는 폭동의 단초가 되었다. 

 ‘18세기 사법관과 더불어 식견을 갖춘 철학자들의 참고 진술이 재판에 관여하게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법 사건들이 있었’다.(109) 그러나 이를 둘러싼 민중 폭동에 대한 것은 언급된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하층민으로부터 발생한 소동이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이들은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본보기가 되어야 할 처형 현장에서 불안이 끊임없이 야기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대규모적 형벌의 구경거리는, 구경하던 사람들에 의해 역전될 위험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의 진실과 권력의 과시가 되어야 할 처형 의식에서 민중은 형벌 받는 사람과 더욱 가깝게 느꼈고, 위협 받는다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 연대의식이 공유되었다. 18, 19세기의 개혁자들은 처형이 민중 위협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들 중 하나는 처형제도의 폐지였다. 

 신체형에 대한 민중의 관여가 제기하는 정치적 문제는, 17세기 말 아비뇽에서, 1세기 후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사형집행인과 사형수와의 신체적 대결, 싸움의 역전, 민중으로부터 쫓기고 몰리는 집행인, 폭동으로 구출도니 사형수와 같은 국면의 전환, 후자의 경우, 일어날지 모를 봉기를 미리서부터 경계하기 위해 구경거리의 대부분이 약화되었음에도, 결백을 주장하는 사형수에게 보내는 민중의 감정, 권력은 여기에서 정치적 공포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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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처형이란, 자백의 선언으로 유죄를 공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언술은 사실 보다, 본보기 징계와 훈계의 의미로 유포된 허구가 더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자료에 나타나는 마지막 절규의 내용은, 당시의 인쇄물이나 대중문학에서 발견되는 도덕관에 의존해 있어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사법당국은 신체형을 당하는 사형수가 자신이 당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 확인해 주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는 비밀 본위, 분서 중심의 진실을 죄인의 신체와 언술 속으로 옮겨 놓는 과정이었다. 사법은 또한 범죄나 죄인의 수치스러운 과거 이야기를 재판 전에, 재판에 대한 의혹을 억제하기 위해 문서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 역시 효과는 양의적이었다. 사형수의 범죄가 과시되어 그 범죄의 규모 때문에, 또는 때늦은 후회의 표명 때문에, 영웅시되기도 했다. 이때 사형수는 법, 권력자 등에 대항하는 사람으로 부각되고, 죄를 후회하고 판결을 받아들이면, 사람들은 그가 죄로부터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다. 신체형에 의연하다면,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명이 되었다. 사형수에게는 영광과 혐오가 공존했고 때로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유포된 범죄에 대한 문서를 상층부가 만든 선전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형벌의 실무를 둘러싼 하층민과 상층권력의 대립적 공격이 만나는 장소’(117)였다. 전단은 민중들의 정치적 관심에 비롯되어 읽혔다. 이 전단은, 사건에 대한 영향력, 범죄인들에게 부여하는 영광의 측면, 텍스트 안에서 사용되는 말에 대해서도 양면적으로 읽힐 수 있었다.

 <처형대에서의 폭동>에서, 사형수의 신체를 두고, 유죄 선고를 한 권력 측과 민중은 대결한다. 처형 후의 범죄에 관한 선언은 재판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범죄자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형벌제도의 개혁자들은 전단배포의 금지를 요구했다. 민중들은 그 나름대로 사소한 서사시적 영웅 행위와 같은 위법행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전단은 민중 측, 위법행위가 안고 있던 정치적 기능이 변화하면서 중요성을 상실했다.

 전단은 또한, 범죄문학이 발전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안에서 범죄는 예술이며, 기괴성, 위대성, 그리고 특권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문학에 등장하는 범인의 책략과 판단력, 지력 등으로, 탐정과 대결의 구도를 갖추게 되면서, 범죄자는 기존의, 자백과 신체형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범행의 진실은 자백이 아니라 탐색으로, 신체형의 집행 시간으로부터 수사의 국면으로, 권력과 신체의 대결은 지력싸움으로 전환되었다. 추리문학의 탄생으로, ‘범죄자의 영광과 신체형에 의한 어두운 영웅시의 풍조’(120)도 사라졌다. 이제 영웅도, 대규모적 처형도 없다. 영웅시되던 범죄자는 이제 일상적 사회면 기사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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