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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발제] 오리엔탈리즘2부 4장 :: 0320(화)
오라클 / 2018-03-21 / 조회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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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 4장 > 발제 ▪2018-0320(화) 오라클 

 

제4장 순례자와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

 

3장 《동양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이 학문적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것이라면, 

      ······> 대표학자 : 레인(영), 사시ㆍ르낭(프), 볼네(프), 존스(영)

      ······> 대표저술 :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현대이집트인의 풍습과 습관》

4장 《순례자와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는 비학문적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것이다. 

      ······> 대표작가 : (프랑스)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네르발, 플로베르, 

                               (영국) 스콧, 킹스레이크, 디즈레일리, 워버튼, 버튼, 엘리엇

      ······> 대표저술 : 버튼의 《메디나와 메카의 순례》, 네르발의 《동양여행》

 

     [1] 순례자와 순례          

 

① 학문적 오리엔탈리즘 & 비학문적 오리엔탈리즘

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 레인 > 동양을 여행하거나 동양에 거주하는 모든 유럽인은, 동양의 불온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레인이 동양에 관하여 쓸 때, 동양의 시간적ㆍ공간적 배치는 재조정되었다. 동양적 생활의 비정상성(독특하고 이상한 달력, 이국적으로 배치되는 공간,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언어, 사악하게 보이는 도덕)은 유럽적 문체로 상세한 설명을 가한 뒤 크게 축소되었다. 레인은 동양을 동양화하면서 동양을 정의했을 뿐아니라 동양을 편집했는데, 자신의 인간적 공감이나 유럽인의 감성을 교란시킬 우려가 있는 것을 단절시켰다. 동양(이집트)은 레인에게 위험한 성적 매력을 발산했고, ‘자유로운 성적 교섭’에 의해 건강과 가정생활의 절도를 위협했다. 

비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 > 성적인 것 외에도 동양적 위협이 시간ㆍ공간ㆍ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유럽적 합리성을 마비시켰다. 동양에 체류한 유럽인들은 상상하지 못한 고대성,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아름다움, 무한한 거리감에 직면했다. 이것이 직접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문학적 서술의 대상이 되는 경우, 독특한 시정ㆍ독특한 분위기ㆍ독특한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바이런의 이단자, 괴테의 《서동시집》, 위고의 《동방시집》. 이들에게 동양이란 해방의 형식이었고 독창적인 기회로 가득한 장소였으며, 동양이야말로 자신이 과거에 상상한 모든 것을 완성하고 확인해주는 장소였다. 문학자들은 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레인, 사시, 르낭, 볼네, 존스)와 비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프_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네르발, 플로베르, 영_스콧, 킹스레이크, 디즈레일리, 버튼, 엘리엇)를 동시에 참조했다. 

 

② 동양체류ㆍ동양소재의 작품유형 (오리엔탈리스트 유형)

▶동양을 소재로 삼고 동양에 거주한 경험에서 쓰인 작품의 3유형 (오리엔탈리즘적 자아를 기준으로) 

  [ 1유형 ]  학문적 저술 : 지식의 엄격한 요구에서 저자의 감수성에 배제된 작품 

                 ex. 레인의 저술 속에서 레인의 자아는 단절되었다.  

  [2.3유형] 비학문적 작품 : 작품 속에서 저자의 자아가 노출된 형태로 존재한다. 

  [ 2유형 ]  학문적 저술에 봉사하는 작품 : 자아는 참된 지식의 배분이라는 임무에 따르거나, 

                 ex. 프_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네르발, 플로베르, 영_스콧, 킹스레이크, 디즈레일리, 버튼, 엘리엇 

  [ 3유형 ]  학문적 저술에 독립적인 작품 : 동양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되었다. 

                 ex. 버튼 

▶[참고] 2장 유럽인이 동양에 사는 의도 (의식은 유럽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동양을 여행하는 이유) 

1. ‘전문적 오리엔탈리즘에 학문적 소재를 공급한다’는 과제를 위해 자신의 체류를 학문적인 관찰로 생각하는 저술가.   

     ex.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현대이집트인의 풍습과 습관》

2. ‘전문적 오리엔탈리즘에 학문적 소재를 공급한다’는 목적은 같지만, 자신의 개인적 의식ㆍ스타일을 유지하려는 저술가

     ex. 버튼의 《메디나와 메카의 순례》

3. ‘사업의 달성’을 동양여행의 목적으로 삼는 저술가. 작품은 개인의 미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그 사업에 의해 함양되며 충만한 작품이 된다. ex. 네르발의 《동양여행》

······> 개인적인ㆍ비오리엔탈리즘적 의식이 작용할 여지가, 2ㆍ3유형의 저술가는 1유형의 저술가보다 크다.

 

③ 순례자와 순례

‘동양순례’라는 형식 > 나폴레옹 이후(19C초~말) 동양은 여전히 순례의 땅이었고, 비학문적인 오리엔탈리즘 저술은 모두 ‘동양순례’라는 형식ㆍ스타일ㆍ의도를 취했다. 동양순례라는 관념에서는 다른 오리엔탈리스트 저술과 마찬가지로 재생적 재구성(자연적인 초자연 신앙)이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순례의 장벽 > 모든 순례자는 사물을 자기식으로 본다. 모든 동양순례는 성서에 기록된 여러지방을 통과하는 것인데, 유대-기독교적, 그리스-로마적 현실을 체험하려는 시도였다. 순례자들에게는 성서, 십자군, 이슬람, 나폴레옹, 알렉산더 같은 선구자들과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학자들이 만들어낸 동양을 통과해야 하는 장벽이 있었다. [장벽1. 학문적 동양의 존재] 학문적인 동양은 순례자가 심사숙고하고 사적인 공상에 잠기는 것을 억제시켰을 뿐 아니라, 네르발ㆍ플로베르(비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가 레인(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을 이용했던 것과 같이 학문적인 동양의 존재 자체가 여행자와 작품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이 외었다. [장벽2.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요구] 오리엔탈리스트 저술이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공적인 요구에 의해 과도하게 제약되었다. 샤토브리앙은 학문적 요구에서 독립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여행했다고 주장했다. 플로베르ㆍ비니ㆍ네르발ㆍ킹스레이크ㆍ디즈레일리ㆍ버튼은 기존의 오리엔탈리즘 문서관의 곰팡이를 일소하고자 순례를 시도했고, 그들의 작품은 신선한 동양체험의 저장고가 될 수 있었으나 결국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의 축소모형으로 끝났다. 

 

     [2] 영국인 순례자와 프랑스인 순례자          

 *19C 동양이란 여행가에게 어떤 것으로 보였을까? 여행가가 영국인인가, 프랑스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① 영국인 순례자

영국인에게 동양이란 영국영토였던 인도를 뜻했다. 따라서 중동을 통과한다는 것은, 식민지 인도에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행자의 상상력은 행정 및 영토보유, 통치권력이라는 현실에 의해 이미 제약을 받았다. 존스-레인이 그러했듯이, 스콧, 킹레이크, 디즈레일리, 워버튼, 버튼, 엘리엇에게 동양이란, 물질적 영토소유에 의해, 물질적 상상력에 의해 규정되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을 타파하고 프랑스를 추출했고, 1880년대까지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지역은 영국의 손바닥에 들어온 제국의 영토였다. 따라서 이집트ㆍ시리아ㆍ터키를 여행한다는 것은, 정치적 의지ㆍ정치적 지배의 영역을 여행한다는 것이었다. 디즈데일리의 《탕크레이드》는 단지 동양을 소재로 한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영토에서 현실의 힘을 조종하기 위한 정치경영술이었다. 

 

② 프랑스인 순례자

영국 순례자와 대조적으로 프랑스 순례자는 동양에서 심각한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영국 순례자와 달리 프랑스 순례자는 프랑스가 통치자가 아닌 장소에 왔다. 지중해는 십자군으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패배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동양순례는 19C부터 영국의 존재에 대항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선택되었다. 그 결과 볼네 이후의 프랑스 순례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장소를 목표로 삼아 사업화를 상상했고, 곧 ‘동양’에서 프랑스적인 거대한 콘서트 개최를 계획했다. 

그들의 동양이란 추억과 연상을 북돋우는 페허, 잊혀진 비밀, 숨겨진 교신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의 대예술가적 스타일이었다. 이러한 동양의 최고 문학표현은 네르발과 플로베르였는데, 그들의 작품은 모두 공상적이고 실현불가능한 차원이었다. 1884년 영국의 이집트점령 2년 뒤, 화가 루도빅 르픽이 “동양은 카이로에서 죽었다”고 말한 감상은, 영국인이 본 현실과 프랑스인이 본 꿈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③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볼네와 나폴레옹과 달리 19C 프랑스 순례자들은, 과학적 현실보다 이국적인 현실을 탐구했다. 샤토브리앙으로 시작된 문학적 순례자들에게 잘 나타나는데, 그들은 동양 속에서 자신들의 사적인 산화ㆍ강박관념ㆍ욕구에 공감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이처럼 문학적 순례자들은 자신의 실존에 관계되는 사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품 속에서 동양을 이용했다. 그러나 동양에 관해 쓴다는 것에 어떤 목적이 부각될 때, 자아는 강력하게 억제된다. 라마르틴은 자신에 관한 사명만이 아니라 동양에 존재하는 권력-프랑스에 관해서도 썼다. 곧 동양에 존재하는 권력-프랑스의 기획은 그의 혼, 그의 기억, 그의 상상력에 의한 사명을 억제했다. 레인은 자신의 자아를 철저히 통제한 순례자였다. 버튼(이슬람교도의 순례자), T.E.로렌스(메카로부터 거꾸로 역순례)도 역사ㆍ정치ㆍ사회에 관한 대량의 오리엔탈리즘 저술을 만들어냈으나, 레인만큼 자아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개인의 자아 억제를 기준으로 저술가를 배열하면, [레인 ······ 버튼, 로렌스, 찰스 다우티 ······ 샤토브리앙)

 

     [3] (프)샤토브리앙의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지극히 사적이고 과시적 자아)     

 

① 샤토브리앙의 오리엔탈리즘 

샤토브리앙의 《파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파리로의 여행 1810~1811》은 북아메리카를 여행한 뒤에 1805~1806까지 시도한 동양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나는 영원히 나 자신에 관하여 말한다”고 자신의 신조를 말했다. 샤토브리앙은 진실한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구축된 인격으로 동양에 왔다. 그에게는 나폴레옹이 최후의 십자군이었고, 그 자신은 ‘과거의 순례자가 가졌던 이념과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여행하기 위해 조국을 떠난 최후의 프랑스인’이었다. 샤토브리앙에게 동양이란 그의 노력에 의해 재생되기를 기다리는 낡은 캔버스 같은 것이었고, 동양인-아랍인은 ‘다시 야만상태에 빠진 문명인’이었다. 그에게 아랍인-동양인의 문명ㆍ종교ㆍ풍속은 저속하고 야만적인 것이어서, 유럽에 의한 재정복은 당연한 것이었다. 1810년의 샤토브리앙은 1910년의 크로머와 마찬가지로, 동양인은 정복될 필요가 있으며 서양인에 의한 동양정복은 정복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샤토브리앙의 사고방식은 낭만주의적 속죄관념으로, 죽은 세계를 갱생시키고 생명력이 은폐된 잠재능력을 유럽인이 자각시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사명이었다. 

 

② 레인 & 샤토브리앙 :: 개인적 자아 

레인의 산문에서 자아는 소멸되고 그 결과 동양이 현실의 모든 세부까지 보여주었다면, 샤토브리앙의 저술에서 자아는 강력해져서 스스로 창조한 기적을 응시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맛보게 된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비참한 현대동양의 참상을 초월하여, 동양에 대한 창조자적 위치에 섰다. 그는 더 이상 현대의 인간이 아니라, 신과 같은 시대를 사는 환상자가 된다. 레인과 달리 샤토브리앙은 동양을 소비하고자 했다. 그는 단지 동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양을 표상하고 동양을 대신하여 말한다.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초역사적으로, 인간과 토지, 신과 인간이 일체화되고 있는 초시간적 차원에서 동양을 표상한다. 샤토브리앙이 자기 이름을 피라미드에 새긴 행위는, 동양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억과 끝없이 과시되는 자아를 의미한다. 

 

③ 레인 & 샤토브리앙 :: 텍스트 

샤토브리앙은 쓴다는 것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었다. 샤토브리앙에게는 쓴다는 것이 곧 삶의 행위였다. ① 레인의 경우 말의 질서가 과학적 권위와 세부묘사에 의해 교란되었다고 한다면, 샤토브리앙의 경우 말의 질서는 자기본위의 변덕스러운 개인이 표출된 형태로 변형되었다. ② 또 레인이 오리엔탈리즘의 규준을 위하여 자아를 희생한 반면, 샤토브리앙은 그가 동양에 대해 말한 것 모두를 그의 자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③ 레인은 기술주의적 학문의 몰개성적 영역에 빠져들어 자기 작품은 개인적적 기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면 샤토브리앙은 자기 작품이 피라미드의 표면에 조각된 그의 이름과 같이 자신의 자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④ 레인 & 샤토브리앙 :: 서술방식 

동양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레인 같이 과학을 서술하거나 샤토브리앙 같이 사적인 언어를 기록했다. 과학적 서술이 문제되는 것은, 일반적이고 집합적인 여러 현상을 서술하는 것의 몰개성과 그대로의 현실을 동양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관찰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주관성이다. 사적인 언어가 문제되는 것은, 현실의 동양과 사적인 환상을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것(레인)도 아니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사적인 것(샤토브리앙)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동양을 실감하는 것을 막아왔다. 현대세계에서 오리엔탈리즘 안에서, 동양인이 갖는 인간적인 현실이나 사회적 현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힘을 구하려는 것은 헛일이다. 

 

⑤ 오리엔탈리즘의 지식-권위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결함은 레인과 샤토브리앙(영국인과 프랑스인)이라는 2가지 선택에서 유래하는 영향력 때문이다. 19C 오리엔탈리즘 같은 지식의 정통성은 이전 오리엔탈리즘의 선행하는 귄위로부터 생겼다. 샤시로부터 비롯된 학식있는 오리엔탈리스트의 태도는 먼저 일련의 단편들을 개관하고, 이어 그것들을 편집하여 배열하는 과학자의 태도였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스들은 서로의 작품을 동료 사이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인용하게 되었다. 버튼은 레인의 작품을 인용했고, 네르발의 동양여행은 라마르틴의 여행을 답습한 것이었고, 라마르틴의 여행은 샤토브리앙을 답습한 것이었다. 지식의 형태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선행한 학자로부터 인용을 주된 자양분으로 받아들였다. 사시와 레인 이후의 동양학자들은 사시와 레인을 다시 썼으며, 샤토브리앙 이후의 순례자들은 샤토브리앙을 다시 썼다. 이러한 복합적인 다시-쓰기의 작업과정으로 인해, 동시대 동양의 여러 현실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네르발과 플로베르 같이 뛰어난 순례자들조차, 스스로의 눈과 마음이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레인의 서술을 신용했다. 동양에 관한 지식의 체계에서 동양이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인용구의 집합이다. 따라서 동양에 관하여 쓴다는 행위 자체가 허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허구는 또다른 종류의 기획에 종속되는데, 라마르틴ㆍ네르발ㆍ플로베르에게 동양이란 독자의 흥미를 환기시킬 수 있는 심미적 소재의 재표상이다. 

 

     [4] (프)라마르틴의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초월적 사이비-국가적 이기주의)     

 

① 샤토브리앙의 현대판 

라마르틴은 1833년 동양여행을 시작했는데, 그는 선입감과 공감, 편견의 덩어리였다. 그는 로마인과 카르타고를 증오했고, 유대인ㆍ이집트인ㆍ힌두교도를 사랑했으며 자신은 그들에게 단테와 같은 존재라고 자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자마자 공상의 동양을 조작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를 상상과 추억의 종교로 간주했고, 예수와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루소와 주네브의 관계와 비교되었다. 그의 동양여행에 의해, 동양이야말로 ‘신앙과 기적의 땅’이라는 점이 밝혀졌고, 그는 동양에 의해 선택된 서양의 시인이 되었다. 그는 동양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샤토브리앙의 현대판으로 변모하였고, 동양은 유럽권력에 의한 처분을 기다리는 사적인 영토가 되었다. 과거에는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순례자였던 라마르틴이, 이제는 힘과 의식에서 모든 유럽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초개인적인 자아가 되었다. 

 

② 오리엔탈리즘에 충실한 동양관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낸 모든 동양관 가운데, 라마르틴 만큼 충실한 요약은 다시 없다. 라마르틴에게 동양순례란 단지 제국적 교만이 동양에 침투한 것이 아니라, 동양을 몰개성적으로 왜소화했다. 동양의 구체적 현실의 정체성은 위축되어 일련의 단편이나 라마르틴의 회고적 소감의 집합으로 변했다. 레인의 인간적 정체성이 이집트의 사물을 분류하기 위한 과학적 틀 속에 사라졌음에 비해, 라마르틴의 의식은 통상의 의식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5] (프)네르발ㆍ플로베르의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개인적ㆍ심미적, 도착적 공감)     

 

①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오리엔탈리즘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라마르틴의 초월적 사이비-국가적 이기주의에 대치된다. 네르발과 플로베르 작품 속에서 동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라마르틴 작품 속에서 제국주의적 《동양기행》이 차지하는 위치보다 중요하다.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라마르틴과 마찬가지로, 고전으로부터 근대문학, 학문적 오리엔탈리즘 저술에 이르는 광범한 독서로 준비하고서 동양에 왔다. (네르발은 1842~1843년, 플로베르는 1849~1950년에 걸쳐 동양을 방문했다.) 이들은 동양을 방문한 19C 여행가들 가운데, 동양방문을 가장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한 사람이었다. 

 

② 도착적이면서 공감으로 가득찬 오리엔탈리즘 

두 사람이 천재적이고 유럽문화에 완전히 젖어있었다는 점으로부터, 동양에 대한 도착적이면서 공감으로 가득한 비전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사고와 감정의 공동체에서, 이국적 장소, 사도-마조히즘적 취미, 죽음의 공포와 운명적 여인, 비밀주의와 신비주의의 매혹에 도취되었다.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일반적인 문학적 태도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화학적 관심도 동양에 도입했다. 이들에게 동양이란 이미 보았다고 느끼는 착각의 장소였고, 현실의 여행을 완수한 뒤에도 되돌아간 장소이기도 했다.

 

③ 19C 오리엔탈리즘 정신 :: 네르발, 플로베르 

19C 오리엔탈리즘에서 네르발과 플로베르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오리엔탈리즘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한다는 점 때문이다. 먼저 그들의 작품은 광대한 시야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네르발은 여행 중의 수기, 소품, 이야기, 단편들을 모아 《동양여행》을 출간했다. (*1839~1840년 빈여행, 1841~1843년 근동여행의 감상적 인상과 환상적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플로베르의 저술은 여행 이전에도 여행 이후에도 동양 속에 완전히 젖어있었다. 동양에 대한 언급은 《여행수첩》, 《성 앙투안의 유혹》, 《헤로디어스》, 《살랑보》에서 나타나며, 그의 중요한 소설에도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 나타난다. 

 

④ 네르발, 플로베르 (문학적 오리엔탈리스트) & 레인, 샤토브리앙, 르낭, 사시 (비문학적 오리엔탈리스트)

총괄적으로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동양적 소재를 끊임없이 수정하여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프로젝트 구조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흡수했다. 레인(네르발과 플로베르가 차용), 샤토브리앙, 르낭, 사시 같은 저술가들과 네르발과 플로베르은 대조적이었다. 전자의 동양이 파악되고 착복되고 환원되고 기호화된다면, 후자의 동양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광대한 장소로 거기에 살고 미와 상상을 위하여 이용되었다. 전자에게는 어떻게 하면 희망대로 동양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생생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면, 후자에게는 작품의 구조가 자율적ㆍ심미적ㆍ개인적 사실로서 문제되었을 뿐이다. 

 

⑤ 네르발ㆍ플로베르의 의의 ::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초월

네르발과 플로베르의 자아는 결코 동양을 흡수하지 못했고, 동양을 동양에 관한 기록이나 텍스트 의존적 지식(공식 오리엔탈리즘)과 동일시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한편으로 동양을 소재로 한 그들의 작품 영역은 정통적 오리엔탈리즘이 설정한 좁은 한계를 초월했다. 다른 한편 그들의 작품 주제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동양에 관한 지식이 부과하는 제약을 초월했다. 

 

     [6] 영국작가의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영국적 국가의식과 동일화한 우월감)     

 

영국작가들 > 대부분의 영국작가들은 동양순례가 무엇을 초래하는가에 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졌다. 인도야말로 현실적인 불변의 가치를 갖는 것이었고, 따라서 지중해와 인도 사이의 모든 영역이 인도에 대응하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스콧 > 그 결과 바이런이나 스콧 같은 낭만주의적 작가도, 중동에 대하여 정치적 비전을 갖게 되었고 동양과 유럽의 관계에 대한 과격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스콧은 뛰어난 역사의식을 가지고, 《부적》, 《파리의 로버트백작》에서 무대를 십자군시대의 팔레스타인과 11C의 비잔틴으로 설정하면서도, 열강이 해외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정치적 판단을 잊지 않았다. 

 

디즈레일리 > 디즈레일리의 《탕크레드》가 실패한 이유는, 작가가 동양의 정치학이나 영국의 지배체제가 갖는 이해관계에 관하여 너무 깊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레바논 부족의 수령은 이슬람교도-유대교도-유럽인을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어떻게 조종하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 탕크레드의 동양탐구 여행은 거의 없어져 버린다. 디즈레일리의 동양현실에 대한 비전은, 순례자의 변덕스러운 충동을 조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엇 > 한번도 동양을 방문한 적이 없는 조지 엘리엇조차 《다니엘 데론다》 속에서 동양순례에 대응하는 유대인의 조국부흥이라는 주제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양사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영국의 현실 속을 방황하여야 했다. 

 

영국작가(학문적 자아) & 프랑스작가(문학적 자아) > 그리하여 영국작가들이 동양적 모티프를 이용하고자 할 때마다, 개인적 환상을 방해하는 일련의 장애에 직면했다. 영국인 작가의 작품 중에는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네르발, 플로베르 같이 동양을 주제로 한 작품에 필적하는 작품이 전혀 없다. 그것은 초기 오리엔탈리즘에서 (영)레인과 대조적 위치에 있었던 (프)사시와 르낭이 자신들의 저술을 창작으로 의식한 것에 대응된다. 

 

킹레이크 > 킹레이크의 《이오덴》이나 버튼의 《알메디나와 메카의 여행》(1855~1856)이라는 작품들이 갖는 형식은, 엄격할 정도로 연대기적이며 충성스러울 정도로 단선적이다. 마치 저자들이 모험을 이야기한다기 보다도, 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여행을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킹레이크의 작품도 교만한 자민족 중심주의와 영국인이 본 특징없는 동양에 관한 서술을 나열한 것 뿐이다. 킹레이크는 동양언어에 관해 아무런 지식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ㆍ동양문화ㆍ정신적 풍토ㆍ사회에 관하여 광범위한 일반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흥미는 동양에서 보아야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양(황폐하고 죽은 정신적 미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가 만난 동양사람은 서양인의 자아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라마르틴과 마찬가지로 킹레이크는 그의 우월감을 국가의식과 동일화하여 만족했다. 킹레이크의 의견이란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국가적인 의지의 표현일 뿐이며, 그의 자아는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이기는 해도 주인은 아니었다. 그의 저술은 동양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산출하고자 시도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그의 지식에도 그의 개성에도 그러한 능력은 없었다.

 

     [7] (영)버튼의 오리엔탈리즘적 자아  (제국주의 권위의 반역자이자 대행자)        

 

버튼의 전문성 > 킹레이크와 달리, 버튼은 동양에 관해 새로운 것을 산출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여행가로서 버튼은 타고난 모험가였으며, 학자로서 버튼은 유럽의 어떤 오리엔탈리스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유럽지성을 엄격한 익명성과 학문적 확실성에 의해 유지해온 규격화된 선생들과 그는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버튼이 쓴 것에는 모두 이러한 투쟁심이 나타나 있는데, 번역한 《아리비안나이트》 서문은 적대자들에 대한 경멸을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는 어떤 전문학자보다 많은 것을 알고, 어떤 학자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었으며, 어떤 학자보다 참신한 방식으로 소재를 취급할 수 있었음을 과시하였다. 

 

버튼의 작품 :: 레인 ······ 버튼 ······ 프랑스작가 > 오리엔탈리즘 작품 중에서 버튼의 작품은, (영)레인으로 대표되는 것과 프랑스작가로 대표는 것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버튼의 동양체험 이야기는 순례로 조립되어 있고, 작품에서 버튼은 주역으로 등장하고, (프랑스 작가들 같이) 공상적 모험담과 환상의 중심을 차지함과 동시에, (레인과 같이) 동양의 사회와 풍습에 관한 권위있는 주석가ㆍ방관자로서의 서양인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버튼의 정체 :: 제국주의 권위의 반역자 & 권위의 대행자 > 버튼의 저술 속에는 동양에 대한 제국주의 유럽(영국)에 대한 국민적 일체감이 그의 개인주의와 싸우고 있다. 버튼은 자신과 아랍의 공감ㆍ연대를 형성했음에도 결국엔 제국주의자였다. 버튼은 스스로를 제국주의 귄위에 대한 반역자로 위치시킴과 동시에 동양에서의 권위의 대행자라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서로 대립하는 2역할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가? 이는 동양에 대한 지식의 문제이다. 이 때문에 버튼의 오리엔탈리즘이 19C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이 되어야 한다. 

 

버튼의 동양인-되기 > 버튼은 여행을 거듭하면서 자신이 사는 대지의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는 T.E.로렌스보다 성공적으로 동양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 핵심부에 잠입하고 인도인 무슬림의사로 가장하고 메카순례를 완수할 수 있었다. 버튼은 인간생활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규칙과 기호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잘 알았다. 그의 산문에서 상이한 문화의 정보와 행동체계를 흡수함으로써, 상이한 문화 사이를 빠져나가고자 하는 의식적인 교섭을 읽게 된다. 버튼의 자유는 동양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유럽인의 근본을 벗어난 결과 생긴 것이다. 

 

기존 오리엔탈리스트와의 차별성 > 버튼은 동양에 살았고, 동양을 직접 보았으며, 동양에 젖은 시각에서 동양의 생활을 이해하고자 노력을 거듭함으로써 동양에 관한 지식을 확보했다. 이러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동양에 관한 일반론을 조립했다. 버튼의 작품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순례》, 《아라비안나이트》번역에서 각주 하나하나는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버튼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동양에 관한 모든 것이 버튼의 풍부한 학식의 개입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는데, 버튼의 개입은 그가 자기 이야기를 위해 얼마나 훌륭하게 동양생활을 관리했는가를 증명한다.

 

버튼의 2가지 목소리, 2중의 의도 > 이러한 버튼의 전문성은 그가 동양을 단숨에 장악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르게 한다. 그러한 높이에 올라간 그의 개성은 제국의 소리와 만나고 그것과 뒤섞인다. “이집트는 정복되어야 할 하나의 보물이다”《순례》고 말했을 때, 동양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버튼의 목소리가 동양지배를 바라는 유럽적 야망의 함성과 일체가 된다. 버튼의 2가지 목소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오리엔탈리스트 겸 제국의 대리인이 산출하는 작품들을 예언한다. 버튼의 작품에는 이중의 의도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동양에 산 경험을 과학적 관찰을 위하여 이용함과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개성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튼은 어디까지나 유럽인이고, 버튼이 습득한 동양사회에 관한 지식은 유럽적 자의식을 가진 유럽인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에 관한 유럽적ㆍ서양적 지식의 체계인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에 의한 동양지배와 동의어가 되고, 이 지배력이 버튼의 개성적인 문체의 괴기성조차 압도하게 된다. 

 

     [8] 19C 오리엔탈리즘          

 

19C 오리엔탈리즘의 특성 > 19C 오리엔탈리즘은 영감으로 가득한 관찰의 체계로부터, 플로베르가 규율화된 지식의 기숙사라고 부른 것으로 변모되었고, 버튼과 같이 무서운 개인주의자의 개성조차 왜소화하여 제국의 서기라는 지위에 오르게 했다. 동양은 하나의 장소라는 것부터, 현실의 학술적 지배의 영역이자 잠재적 제국지배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오리엔탈리즘의 변화 > ① 초기 오리엔탈리스트 :: 르낭, 사시, 레인 같은 초기 오리엔탈리스트의 역할은, 자신들의 작업과 동양의 쌍방에 대하여 무대장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② 19C 오리엔탈리스트 :: 그 뒤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학술적이든 상상력이 풍부하든 이 무대를 철저히 지켰다. ③ 20C 오리엔탈리스 :: 그 뒤에 와서는 무대가 경영(사업)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경영이라는 게임을 위하여 개인보다도 제도를 설정하고 정부를 개입시켰다. 이것이야말로 19C 오리엔탈리즘이 남긴 유산이고, 20C는 그것을 받은 상속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20C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자유와 지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조사하여야 한다. 어떻게 하여 오리엔탈리즘이 완전히 형식화되고 자기복사를 반복하게 되었는가를 조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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