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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차라투스트라2부_구제에 대하여 :: 0319(월) +3
연두 / 2018-03-24 / 조회 1,890 

본문

 

실험실 맞은 편 새로 문을 연 카페에서 많은 분들이 수줍게 무료 커피를 받아오신 날이었죠. 소식을 알렸을 땐 모두 가만히 계시더니 하나같이 음료를 받아오셔서 뿌듯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차갑고 청명했던 월요일. 소소님, 에피파니님이 자리를 비우셨고요. 

 

베푼 뒤 앙갚음의 마음에 휩싸인 차라투스트라, 고독한 자의 밤의 노래, 예언자의 허무주의, 벗들과 헤어져 고독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차라투스트라.. 지난 시간부터 이번 시간까지 차라투스트라에게 감정이입하여 비탈에서 위태롭게 글을 읽다 보니 왠지 지친 상태로 세미나에 참여했었는데요(니체의 비유와 수사들에 감각을 맞추는 게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런데 세미나를 통해 텍스트가 더 선명해지면서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세미나 후에도 애매한 부분이 꽤 있던 아포리즘 <구제에 대하여>에서는 후기를 쓰며 감각의 아귀가 좀 더 맞아떨어지는 듯도 해요. <구제에 대하여>의 강렬함으로 끝내고 싶어서 그 다음 두 주제는 생략했습니다. 

 

 

<시인들에 대하여>

내 안에는 어떤 것, 즉 내일과 모레 그리고 장래의 것이 있다. 


"신체를 보다 제대로 알게 된 다음부터, 내게 정신이라는 것은 그저 정신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불멸의 것'이란 것도 하나같이 비유에 지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에 대한 비판을 '신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는 '이 세계'에 선명하게 발을 딛고 서 있다. 시인들이 노래하는 하늘 위, 구름 나라의 세계는 '저 세계', 피안이다. 그는 옛 시인이든 새 시인이든 시인들에 지쳤다. 하나같이 피상적이요, 얕은 바다들이니. 그러나 차라투스트라 안에는 '내일과 모레 그리고 장래의 것'이 있다.  그는 우리 안의 비시대성, 비시간성, 잠재성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크나큰 사건들에 대하여>

더없이 크나큰 사건들, 그것은 우리의 더없이 요란한 시간이 아니라 더없이 고요한 시간이다.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이 넘치는 섬에 머물 때 그 옆에 화산을 품고 끊임없이 연기를 뿜는 섬이 있었다. 그 곳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선원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보았고, 그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떠들썩한 소란이 있었다. 그  소란 속에 악마가 등장하고, 사람들의 영혼 밑바닥에는 근심과 동경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고, 울부짖어가며 말하는 선동가, 그들을 차라투스트라는 불개라 한다. 교회, 국가도 위선에 찬 개의 일종이다. 불개는 기꺼이 '자유'를 울부짖으며, 진흙을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는 술법에 능하다. 그들은 입상을 전복시켜 경멸하는 진흙에 내팽개치고 환호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생명이 다시 자라 입상은 전보다 더 거룩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리라. 바로 그것이 바로 담론의 중심이 되는 것의 위험이다. 

더없이 크나큰 사건들, 그것은 우리의 더없이 요란한 시간이 아니라 더없이 고요한 시간이다. 새로운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는 돈다. 소리 없이 그렇게.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대지의 심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금을 내뿜고, 오색찬란한 웃음을 터뜨리는 '다른 불개'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저 그 떠들썩한 소란이 궁금해 안달들이었다. 그것은 그의 그림자였을 뿐인데! 

 

<예언자>  

천 겹이나 되는 웃음

 

어떤 예언자의 가르침 하나가 세상에 퍼져갔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 모든 것은 동일하다. 모든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창조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모든 노고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모두 바싹 말라버렸고 사람들은 그렇게 지쳐버렸다. 예언이 와닿아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슬픔에 잠긴 채 배회하다 사흘 동안 마시지도 먹지도 않은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일체의 생을 거부하고 죽음의 관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먼지로 자욱한 영원의 내음을 맡으며 녹이 슬 대로 슨 열쇠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 세찬 바람이 문짝을 열어젖히고, 휘파람 소리에 검은 관 하나가 그 앞에 내던져진다. 관이 쪼개지며, 천 겹이나 되는 웃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아이, 천사, 부엉이, 바보나 아이만큼이나 큰 나비들의 천 개나 되는 찡그린 얼굴이 그를 향해 웃어대고 비웃어댔다. 

그가 벗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재빠르게 그의 꿈을 해몽하기 시작한다.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적들의 꿈을 꾼 것으로 해석했으나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와닿지 않는 위로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그 허무주의가 극복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예언자의 예언에 변했던 그 자신이 자신의 적이었고, 극복해야 할 존재였다. 그는 성대한 만찬을 준비한다. 

 

<구제(구원)에 대하여>

지난날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것, 내게는 비로소 그것이 구제다!  

 

거꾸로 된 불구자

불구자에 대한 이야기는 고쌤의 위험한 책에서 충분이 이해될 만큼 다루었던 것 같다. 하나가 없는 자와 하나만 너무 많이 갖고 있는 자, 누가 더 불구인가. 이번에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이 <구제에 대하여>라는 중요한 아포리즘의 흐름이었다. 니체는 오늘날의 불구자, 토막토막 잘린 사람들에서 파편과 끔찍한 우연들이라는 지난날의 구제에 대한 이야기로 신박(!)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갇혀 있는 의지를 가르치다

이미 일어난 일, 그랬던 과거를 어떻게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니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관문이렸다. '지상에서의 오늘날과 지난날, 아! 벗들이여, 내게는 그것이 가장 참고 견디기 힘든 것이다'라고 차라투스트라도(!) 말했다. 의지란 해방을 가져오는 자이며 기쁨을 가져오는 자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의지가 갇혀 있다는 것을 벗들에게 가르친다. 되돌아가기를 바랄 수 없는 '갇혀 있는 의지'인, "그랬었다"는 더없이 쓸쓸한 비애와 몹시 분해서 이를 가는 원한(앙갚음)의 감정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갇혀 있는 의지는 비애에서 해방되기 위해 바보나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제(구원)한다. 

"과거에 있었던 것", 그것은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덩이'다. 그것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갇혀 있는 의지는 시간이 역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몹시 분해한다. 그리하여 의지는 통분으로 돌덩이를 굴리면서 그와 함께 분노와 역정을 나누지 않는 자에게 앙갚음을 해댄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통탄해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을 가져오는 자인 의지는 화를 입히는 자가 되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원한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의지'가 원한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지란 힘의 '방향'이다. 세미나하면서 복종하는 의지는 적극적 의지로, 쌍방향적인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었다. 복종조차 복종을 '의지'하는 것일 때, 원한(앙갚음)조차 '의지'하는 것일 때, 원한(앙갚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이라는 징벌

갇혀 있는 의지가 되돌아가기를 바랄 수 없다는 사실에 고뇌할 때, 의욕하는 자에게 의욕 그 자체와 일체의 생은 징벌이 된다. 그러면 광기의 설교가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그러므로 생도 끝이 날 테다.) 그것이 영원하지 못한 것은 '사라질 만'해서다. 그러나 과거의 어떤 행위도 절대 말살될 수 없다. 사물들의 정의 중 영원한 것은 '그랬었다'는 돌은 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징벌 또한 영원하다." 

 

의지란 창조하는 자

글을 쓰면서 '과거를 어떻게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라는, 어떤 역량과 관련된 것 같던 물음은 '대체 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원한의 감정으로) 의지하고 있는가'하는 어떤 알아차림에 가까운 물음으로 바뀌었다. 과거라는 돌덩이를 비애와 울분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그 때에야 그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의지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의지는 창조하는 자'라고 다시 가르친다. 일체의 '그랬었다'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러하기를 원했다!'라고 말하고 거기에다 '나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는 파편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일 뿐이다. 

 

영원히 돌아오는 것은 '순간'이다 

갇혀 있는 의지는 무엇에 갇혀 있었던가. 그것은 과거다. 의지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킬 때, 의지는 드디어 해방을 가져오는 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된다. 의지는 스스로를 구제(구원)한다. 그 때 그것은 드디어 시간과 화해한다. 시간과 화해해야 비로소 삶을 긍정하게 된다. 그 일체의 화해를 넘어서는 것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힘에의 의지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차라투스트라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몹시 놀란 듯 보였을 때, 아마도 그가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짐작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다시 읽어내려간 그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의지하라는 니체의 명령, 그것이 내 앞에 있었다.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은 '순간'이다. 내게 무수한 순간들이 밀려오고 있다. 

 

댓글목록

모로님의 댓글

모로

감각 맞추기의 어려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거꾸로된 불구자편에서 토막난 사람들의 파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는..ㅋ
<그랬었다>를 <나 그러하기를  원했다>로 과거를 구제하려면 나만의 덕을 생성하는 것이 관건이며, 굳이 '나'라는 주체를 표기한 점이 포인트라는 생각이 드네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맞아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나 그러하기를 원했다>의 상태로 갈 수 있는지 궁금했고,
그것을 텍스트를 통해, 차라투스트라의 안내를 통해 읽어내고자 했습니다.
비극적 과거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떠나기가 어렵잖아요. 심지어 어떤 비극적 사고가 삶에 치명타를 입혔다면요.

그래서 <그랬었다>의 무기력감, 비애감, 원통함에에서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의지가 삶을 저주하지 않고, '어떻게' 삶을 욕망하고 생성하게 되는가.
이것이 <구제에 대하여>에서 제가 가진 물음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과거를 어떻게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는 낯설지만 이젠 익숙한 이 물음은
굴릴 수 없는 돌덩이를 굴리려고 울분을 토해내는 갇힌 의지를 알아차리는 문제,
그리고 이미 과거를 향한 갇혀 있는 의지가 작동되고 있으니, 그것을 멈추는 문제로
(갇혀 있는 의지의 몰락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전환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때 의지는 창조하는 의지로서 잠재성을 발휘하게 되는 거죠.

아직도 계속 후기가 저의 의도를 다 담아내진 못한 것 같아요. 글쓰는 능력이 많이 모자라서. ㅎㅎ

아, 난 후기 쓰기를 원했었다. 원했다. 원할 것이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시간에 대한 구제'는 니체철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음은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참조입니다^.^

[1]
힘의 의지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때, 시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될까?
그것은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나타날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시간은 주어져 있는 선험적인 것이며,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 혹은 되풀이되는 것일 뿐,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과 '되풀이되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을 구제하는 2가지 방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시간의 의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1] '갇혀있는 의지'가 시간을 구제하는 방식 ::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앙갚음의 정신
갇혀있는 의지는 시간을 '과거에 있었던 것-이미 지나간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랬었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악의를 품고 있는 관망자입니다.
따라서 갇혀있는 의지는 '앙갚음-원한의 정신'으로 자신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2-2] '광기'가 시간을 구제하는 방식 :: ‘되풀이되는 시간’에 대한 생의 부정
갇혀있는 의지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게 의욕 자체와 일체의 생은 징벌이 됩니다.
의욕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행위와 죄를 되풀이하고,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광기는 시간을 '되풀이되는 것-결국에는 사라질 것'으로 노래합니다.
'생존이라는 징벌'은 우리의 삶 자체가 영원히 되풀이되는 행위이며 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기는 “생존 자체가 영원한 징벌이며 정의이며, 구제는 필요없다”고 합니다.

[3] '창조하는 의지'가 시간을 구제하는 방식 :: ‘영원회귀의 시간’을 위한 창조의 정신
이제 시간의 의지가 자기 자신을 구제하지 않는 한,
‘생존 자체가 죄’가 되는 광기의 터무니없는 노래를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시간의 의지는 시간과 화해를 넘어서 힘의 의지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은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미래의 생성를 위한 시간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잠재성을 발견하고 현행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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