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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후기] 4장 공자와 유가의 흥기 :: 0321(수) +4
백경희 / 2018-03-26 / 조회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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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후기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시기를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라고 하며 ‘축의 시대’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제자백가들이 활발히 활동한 춘추전국시대가 이 축의 시대에 포함되며, 알려진 바와 같이 여러 다양한 생각이 꽃피웠던 사상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공자는 이 제자백가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가로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지위를 현재에도 누리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풍우란은 공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의 저작 중국철학사와 간명한 중국철학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풍우란이 본 공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이다.
⑴ 공자는 중국 최초로 학술을 민중화했고 교육을 직업삼았던 교수노유(敎授老儒)였고, 전국시대의 강학과 유세의 풍습을 열었으며, 중국에서 농부도, 공인도, 상인도, 관료도 아닌 선비라는 계급을 창립했거나 적어도 선양발전(發揚光大)시켰다.
⑵ 공자의 행적은 그리스의 “소피스트(智者)”를 방불케 한다.
⑶ 공자의 행적 및 중국 역사상의 영향은 소크라테스의 행적 및 서양역사상의 영향과 서로 비슷하다.
 
공자는 당시에 일부 귀족들만이 받았던 육예에 대한 교육을 일반인에게 한 최초의 인물이다. 교육가로서의 공자의 모습은 공자가 다른 제자백가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 중 한 가지이다. 
여기서 육예란 여섯 가지 인문 교양과목을 뜻하며 흔히 육경이라고 한다. 이는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춘추春秋를 뜻한다. 그 중에서 악은 현재 독립된 저작으로 남아 있지 않다. 
공자와 육경과의 관계에 관하여 전통적인 두 학파의 견해가 있었다. 한 학파는 육경 전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학파는 공자가 『춘추』를 짓고 『역경』을 서술하였으며, 예악을 개혁하였고 동시에 시서詩書의 불필요한 부분은 삭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자는 중국 최초의 개인적 교사이긴 했으나 최초의 저술가는 아니었다. 육경은 공자 이전부터 전해 온 과거의 문화적 유산이었다. 이 육경은 주대 초기 봉건시대에 귀족을 가르치기 위한 기본교재였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경부터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귀족들의 사범들, 또는 일부 귀족(비록 관직이나 명망은 잃어버렸으나) 가운데 경전에 정통한 사람들은 평민들 사이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禮에 밝았기 때문에 장례葬禮, 제례祭禮, 혼례婚禮 등 기타 의식이 있을 때 경전을 가르치거나 또는 숙련된 보좌역할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을 ‘유儒’라고 불렀다.
그러나 공자는 통념상의 ‘유’라고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일면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모습은 단순한 교육자임은 사실이며, 공자는 스스로 제자들이 국가와 사회에 유용하게 될 전 인격을 갖춘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공자는 각종 경전에 기초한 여러 분야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스승으로서 자기의 임무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제자들에게 해설해주는 것이라고 느꼈다. 『논어』에 공자 자신이 자기는 “성현의 말을 본받아 서술한 자일 뿐이지 창작자는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공자는 전통적인 제도나 사상을 전승케 하는 한편, 공자 자신의 도덕관으로 그 제도와 사상을 해설하였다.
“본받아 서술하기는 하나 새롭게 짓지는 않는다[述而不作].”는 정신은 공자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경전들은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전수되었으므로 수많은 주석과 해설서가 나오게 되었으며 현존하는 13경의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원문에 주소註疏를 달아서 확대한 것들이다. 
공자를 당시의 통념적 유자와 구분하여 신학파의 창시자로 만들어놓은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학파의 제자들이 바로 육경의 전문가인 동시에 학자였기 때문에 이 학파를 유가라 일컫게 되었다.
 
공자가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던 점들에 대해 풍우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우주론적 문제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신의 문제에 관해서는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였다. 공자 역시 그랬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신성한 사명이 주어져있다고 여겼으며, 그리스인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공자도 그랬기 때문에 “하늘이 내게 덕을 부여하셨다.”고 했고, “하늘이 이 문물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데 광(匡) 땅 사람들이 감히 나를 어쩌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 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로, 염유, 공서화 등이 비록 “천승의 제후국”에서 “병권을 맡고”, “읍재가 되고”, “외교사절을 응대할” 만하다고 그 능력들은 인정했지만, 유독 그들이 “인(仁)”하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후로 책을 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경우는 많다(플라톤의 대화편 등). 공자도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후로 책마다 ‘공자왈(子曰)’하는 곳은 극히 많다.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는 중국의 소크라테스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매우 높은 위치에 있다. 더구나 공자는 학술을 보편화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선비계급의 창립자 또는 적어도 선양, 발전시킨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업적의 위대함은 어쩌면 소크라테스를 능가한다고 하겠다.​

 

 

댓글목록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간결한 정리 감사합니다~ ^^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홈페이지에서 경희샘의 글을 보니 새삼 반갑습니다!
경희샘의 꾸준한 공부를 응원합니다. ^^*

김현님의 댓글

김현

읽기에 단어부터 어려운데, 단어들은 세미나 시간에 다 이야기해주시니 이해가 많이 됩니다.
저는 너무 생소하지만, 기픈옹달샘과 경희샘의 대화로 나중에 세미나 끝날 즈음에 풍월이라도 읊어보길 기대합니다....

지난 시간 파트 읽으며 공자의 위상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세미나 이후 저는 외려 맹자가 궁금해지긴 했지만...
공자를 새로이 볼 수 있는 여지도 보게 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__^

손미경님의 댓글

손미경

경희샘 반갑습니다.  그간 소식이 궁금했는데 중국철학사 공부하고 계셨내요
조만간 시간 함 내어서 만나요
저는 수욜 2시 루쉰 공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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