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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후기] <열풍> 1919년 :: 0321(수) +2
토라진 / 2018-03-27 / 조회 987 

본문

우리는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

 


이번 주는 루쉰이 1919년에 쓴 수감록에 대해 이야기했다. 1919년은 중국에서 5,4 운동(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루쉰은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 단일하고 분명하게 !!


루쉰은 이 혁명의 분위기에 다소 격앙된 듯 보인다. 국수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경하며 지나치게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숭배하는 것이 새로운 우상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낡은 것보다는 어쨌거나 낫다. 공자와 관우를 숭배하기 보다는 다윈, 입센을 숭배하는 것이 낫다. <수감록 46>

루쉰이 국수를 반대하면서도 서양 사상이나 외래 문물이 절대적인 가치가 아님을 역설했던 점을 비춰보면, 이런 극단적인 ‘숭배’는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중사상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에서 그 점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공자 존경을 강조하고, 전조 유로임을 자처하면서도 민국에서 돈을 인출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복고를 주장한다. 진보를 바란다면, 이 ‘이중사상’을 뽑아내야 한다. <수감록 54>

‘이중사상’이란 유교적 전통에서 뿌리박힌 ‘중용’(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中이며 평상적이고 불편적인 것이 傭이다.-네이버 사전)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이러한 ‘이중사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진보를 기반으로 확고한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한다.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으로는 세대의 질곡을 뚫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 흥겹게 앞으로  !!


그가 바라본 세계의 유일한 비전은 ‘근대화’였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이 처해 있던 최악의 현실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종족의 연장 – 곧 생명의 연속 – 은 분명 생물계의 사업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연장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진화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의 도중에는 언제나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건강함이다. 낡은 것도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저마다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바로 진화의 길이다. <수감록 49>

낡은 것을 버리고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는 죽음으로서 이룩된다. 루쉰에게 중요한 것은 이 ‘죽음’이었을 것이다. 불평등과 낡은 악습, 한 치의 의심 없이 답습되는 전통과 옛 사상의 죽음. 그 죽음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 새 생명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신진대사’의 원활한 활동은 과거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역동성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 한 점의 빛을 발하라 !!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진화의 최전선에 있던 ‘근대’란 무엇이며 그 진화의 길로 이어진 ‘근대’로 중국은 어떻게 진입할 것인가?

 

 이것은 바로 ‘온다’가 온다는 것이다. 온 것이 주의이고 주의가 도달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온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덜 왔고 다 오지 않았고 올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다. <56. 온다>

결국 ‘온다’로 설명되는 ‘근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온다’에 용감하게 맞서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가져다줄 서광을 맞아하곤 했던 주체는 민중들이었다. 그렇다면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빛이 스며들기 전까지, ‘온다’가 정말 오게 될 때까지 민중들은 어둠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나는 항상 두려워하며 중국의 청년들이 냉기를 벗어나 자포자기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로지 앞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바란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하고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은 소리를 내라. 한 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빈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수감록 41>

열기를 가지는 것. 차가운 몸을 덥히고 반딧불이처럼 자신의 몸에 작은 불을 밝히려면 움직여야 한다. 제자리걸음의 움직임이 아니라 어디든 길을 내서 나아가는 발걸음이어야 한다. 루쉰이 젊은 세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그 발걸음이 새롭게 때문이다.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은 신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이 연속되길 바라는 것이다. 

 

◈ 강건하고도 용감하게 버려라 !!


자신의 무덤이 젊은 세대들에게 밟혀 그들의 길이 되어도 좋다는 앞선 <무덤>에서의 그의 토로가 다시금 절절하게 되새겨진다. 그렇다면 <열풍>은 차가운 동토에서 그들이 내뱉는 가녀린 숨결이 일으키는 열기일 것이다. 하지만 황량하게 얼어붙은 땅은 그깟 숨결로는 녹을 기미가 없다. 루신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숨결의 따뜻함을 굳건히 믿고 있다. 나아갈 힘은 이런 부질없어 보이는 따뜻함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리시 다케오의 <어린이에게>라는 소설을 소개하면서 이런 인용을 끌어온다.

 

 인간 세상은 아주 적막하다......너희들과 나는 피를 맛본 짐승처럼 사랑을 해보았다. 가거라. 나의 주의를 적막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면 힘껏 해 보거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로 하여금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준 너희들’에 대한 나의 요구는 나의 감사를 먹고 힘을 축적한 새끼 사자와 같이 강건하고도 용감하게 나를 버리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63. ‘어린이에게’> 

그는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막한 세상에서 외롭고 나약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주시하는 그의 시선은 늘 위로가 된다. 지워지는 발자국에 대한 회한도 없고 새로 새겨지는 발자국에 대한 의심도 없이 허공에 대고 소리치며 길 없는 길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무뢰배!! 그가 바로 루쉰이다.

 

 우리는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 꾀꼬리라면 꾀꼬리처럼 소리고, 올빼미라면 올빼미처럼 소리치면 된다.
......우리는 또한 사랑 없는 비애를 소리쳐야 하고 사랑할 것이 없는 비애를 소리쳐야 한다. 우리가 낡은 장부를 깨끗이 지워 버리는 순간까지 외쳐야 한다. <수감록 40>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흥겹게 앞으로!
열기를 내고, 움직이려고 노력합니다.
루쉰의 응원을 받아 저도 무뢰배처럼 나아가려고 합니다. ^ ^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생명과 죽음, 진보와 방황
교차하는 모순 가운데 여러 생각이 들고 있어요.
함께 이야기하며 깊어지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다시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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