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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차라투스트라 3부(그냥 지나가기에 대하여~) +2
neovars… / 2018-04-03 / 조회 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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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세미나 후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그냥 지나가기~건강을 되찾고 있는자)

작성자: VARSA

 

[그냥 지나가기에 대하여]

차라는 큰 도시의 성문 곁에서 차라의 원숭이라고 불리는 어릿광대를 만났다. 어릿광대는 차라가 큰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큰 도시에 대하여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서는 큰 도시는 국가를 의미할 수 있는데, 큰 도시에는 신문이나 여론이 민중의 의사에 영향을 미치고, 영리한 자는 큰 도시를 지배하는 군주에게 아부하여 지위()을 얻고 있다. 그리고 군주는 다시 소상인의 경제력(황금)에 의존한다. , 생각하는 것은 군주지만, 조종은 소상인이 하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어릿광대는 차라에 의하여 자신의 직업 또는 경제적 기반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차라에게 온갖 썩기 시작하고 있는 것, 추잡한 것, 음탕한 것, 음울한 것, 물러터진 것, 곪을 대로 곪은 것에 모반적인 것이 함께 곪아터지고 있는큰 도시를 향해 침을 뱉고 발길을 돌리라고 권하고 있다. 이에 차라는 어릿광대에게 왜 너는 숲속으로 가지 않았느냐? 아니면 땅을 갈지 않았느냐? 바다에는 초록빛 섬들이 가득 떠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어릿광대를 경멸하였다.

그리고 차라는 어릿광대뿐만 아니라 큰 도시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이라면 들르지 말고 그냥 자니가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지나갔다. 여기에서 지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의욕만 앞세워서 자신의 능력 이상을 행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피하는 지혜로 이해된다.   

 

[배신자들에 대하여]

차라와 같은 부류의 사람의 첫 동반자는 송장과 익살군이다. 송장이란 죽음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자를 의미하고, 익살군은 송장을 비웃는 자를 의미한다.

그 다음 동반자는 신도들이다. 이러한 신도들 중 배반자가 있게 된다. 배신자란 젊은 시인이 그러하듯 한때는 빛과 자유 주변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녔다가 나아가 들고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어느덧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밀담이나 나누는 사람, 난롯가에 앉아 세월이나 보내는 사람을 말한다.

배신자 중 일부는 다시 경건해지면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양심에 반한다는 것을 알기에 얼굴이 빨게지고, ()을 두려워하는 족속이 된다. 따라서 저녁 시간을 기다려, 자신의 배신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여 배신자를 양상한다.

배신자 중 야경꾼이 된 자도 있다. 야경꾼이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을 의미하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이미 잠에 빠진 오래된 일, 즉 과거의 신화를 깨워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귀향]

 차라는 고향 집으로 돌아와(귀향), 아래 지역(세상을 의미)에서의 버림받은 일을 회상한다.

 거기에서는 잊는 것과 그냥 지나가는 것이 최선의 지혜이다---나 벌써 저들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저들의 소란과 고약한 숨결 틈에서 살아 왔다니!---나의 최대 위험은 언제나 선처와 연민의 정 속에 놓여 있었다---저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때도, 바보인 아는 그 때문에 내게 베푼 것 이상으로 저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는 이유는 데 익숙한 터에 이 같은 선처나 베풀고 있는 나 자신에게 그때그때 분풀이를 해가면서 말이다.

 차라는 버림받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었다. 저 아래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무익하다! 거기에서는 잊는 것과 그냥 자니가는 것이 최선의 지혜다---나의 최대 위험은 언제나 선처와 연민의 정 속에 놓여 있었다---나 자신을, 그리고 나의 부유함을 감추자.

차라는 완고한 현자들을 지혜롭다고 한 것처럼, 말을 삼켜버리는 법을 배웠다. 무덤파는 인부들을 탐구하는 자, 음미하는 자라고 부른 것처럼, 말을 둘러대는 법을 배웠다.

 

[악 셋에 대하여]

 차라는 꿈에서 세계 저편(선악의 판단이 없는 세계)에서 저울을 들고, 세계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악담을 해온 이 세계, 차라가 보기에 그것은 인간적으로 좋은 것이였다. 그래서 차라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비판을 받아온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저울질해 보니, 저울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 위 세개는 원래 중립적인 것으로, 누가 욕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긍정적인 부분만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관능적 쾌락은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는 순진무구하며 자유로움, 지상 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자 온 미래가 현재에 바치게 될 넘칠 듯한 즐거움이고, 사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당한 강심제요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아껴온 포도주 중 포도주이다. 부부나 낯선 사내와 여인 사이에는 관능적 쾌락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게 한다.

지배욕은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탐할 때 누가 그것을 두고 병적 탐욕이라고부르겠는가! 고독의 저 높은 경지가 영원한 고독을 마다하고 자족하지 않는 것---산이 골짜기로 내려오고 높은 곳에 있는 바람이 낮은 곳으로 불어 내려오는 것---이 이름도 알 수 없는 것을 차라는 일찍이 베푸는 덕이라고 부른 바 있다.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향락은 스스로 일컫어 덕이라고 한다---자기향락은 자신으로부터 일체의 겁을 쫒아버린다---자기향락은 모든 애처로운 지혜까지도 경멸한다---복된 이기심은 일체의 하인 근성에 침을 뺃는다!

자아를 두고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하면서, 이기심을 두고 복되다고 말하는 자, 진정, 예언자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보라,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와 있다. 위대한 정오가!”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차라는 중력의 정령에 적의를 품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 무엇보다도 저 중령의 정령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새의 천성이렸다. 진정, 불구대천의 적의와 최대의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령의 정령이 있기 때문에 새는 하늘을 날 수 있다. 따라서 차라는 중령의 정령을 긍정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다.

 차라가 경계석(선악의 경계석)을 모두 옮겨 놓을 때까지, 사람들이 선악의 세계에 살면서, 가벼워지기를 원하는 자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요람에 있을 때, 요람에 사람들은 선과 악이라는 지참물을 넣어 주었는데, 이에 따르면 이웃사랑이 자기사랑 보다 우월하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자기사랑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자행된 것 가운데 가장 고약한 기만과 위선이 행해진 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이 나의 선이요 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며 까다로운 혀와 위장들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

차라의 취향모든 색에다 피를 섞는다. 취향이란 몰개성이 아닌 자신의 고유성(개성)을 의미한다. 색이란 대상을 의미하고,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읽기와 쓰기에 대하여)는 차라의 말이 연상된다.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고 타인의 생산물을 허구한 날 기다려야 만 하는 자(세리, 소상인, )는 복이 없지만, 차라는 "자신의 성장"을 기다려야 한다. , 언제나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차라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고, 삶 자체에게 즉 삶의 결과물인 현재의 상황에서 시도와 물음을 제기하는 자이다. 자신이 가야할 고정된 길은 없는 것이다. 루쉰은 "고향"에서 희망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실 지상에는 본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니, 저절로 길이 생긴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에 대하여]

 차라가 심연의 사상을 부르자, 심연은 차라의 마지막 깊은 곳을 백일하에 드러내었다. 차라는 심연의 사상을 보고 메스껍다. 메스껍다. 슬픈 일이로다"라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차라는 돌연 시체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7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 심연의 사상이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억제된 보고 싶지 않은 기억 또는 경험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연의 사상을 의식의 빛으로 끄집어 내었을 때 차라는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위버멘쉬)을 위해 최악의 것(심연)이 필요하다.

 차라가 깨어나자 짐승이 차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만물이 제 스스로 춤을 추지---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이 돌고 돈다---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 오는 것이다.” 세속의 관점에서 크거나 작거나에 관계 없이 영원회귀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크기의 생명이고 그리고 자신에게 신실하다. 다만, 우리가 세속의 관점에서 그 생명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짐승은 차라에게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되었다. 이렇게 차라의 몰락은 끝난다고 말하자, 차라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자신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라의 주위에 위대한 적막이 흘렀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바르사를 비롯하여 모두들 '자신만의 해석'이 생기는 것 같아, 요즘들어 세미나가 더욱 즐겁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시지요? 저만 그런가요? ㅋㅋㅋ
바르사의 후기 곳곳에도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있네요. 바르사와 수다를 떤다는 기분으로 써 볼께요. ㅎㅎ

[그냥 지나가기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 도시가 개선과 개악의 여지가 없다면, 이 도시를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그냥 지나가라"고 합니다.
이 도시가 개선과 개악의 여지가 없다는 평가는, 한편 차라투스트라의 역량(힘)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 도시를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도시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태도(의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르사의 해석처럼, 불의에 대항하는 것보다 선차적인 것은, 자신의 '힘의 의지'입니다.

[세 개의 악에 대하여]
세계 저편(선악의 판단이 없는 세계)에서 저울을 들고, 더없이 사악한 것을 인간적 관점에서 저울질해보니,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을 올려놓은 저울은 균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개의 무거운 질문을 올려놓자 다른 저울판에 3개의 무거운 대답이 놓이면서)
이 세개의 악은 사람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쁜 수도 있으며, 선악으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중령의 악령에 대하여]
중령의 악령은 기존의 가치가 인격화된 것으로, 보편도덕(삶의 가치), 무-취향(삶의 스타일)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차라투스트라는 보편보덕과 대결하는 자신의 덕을 가르칩니다.
사랑('이웃사랑'에 대결하는 '자기사랑'), 가치('선과악'에 대결하는 '자기가치'),
선과악('만인의 선-만인의 악'에 대결하는 '나의 선-나의 악')

다음, 차라투스트라는 무-취향과 대결하는 나의 취향을 가르칩니다.
'매사에 만족하는 취향'이 아니라, '까다로운 취향', '미라-유령을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라 '피를 섞는 취향'
'도둑과 위정자'보다 '아첨꾼과 더부살이 족속'을 역겨워하는 취향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고 '타인의 생산물 기다리는' 자(세리, 소상인, 왕)가 아니라, '나 자신을 기다리는' 취향
'물어물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길에게 물어가며 길을 가는' 취향...
그래서, 길을 묻는 자들에게 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길을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나의 길이다. 너희의 길은 어디 있지?"

[바르사 후기 가운데... 내가 뽑은 명문]
차라의 취향은 모든 색에다 피를 섞는다. 취향이란 몰개성이 아닌 자신의 고유성(개성)을 의미한다.
색이란 대상을 의미하고,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읽기와 쓰기에 대하여)는 차라의 말이 연상된다.
---> 다른 텍스트와 연결을 만들어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는 맥락!!입니다.

차라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고, 삶 자체에게(삶의 결과물인 현재의 상황에서) 시도와 물음을 제기하는 자이다.
자신이 가야할 고정된 길은 없는 것이다. 루쉰은 ‘고향’에서 희망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실 지상에는 본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니, 저절로 길이 생긴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 니체와 루신이 함께하는 멋진 교차입니다.

심연의 사상이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억제된 보고 싶지 않은 기억 또는 경험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연의 사상을 의식의 빛으로 끄집어내었을 때 차라는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위버멘쉬)을 위해 최악의 것(심연)이 필요하다.
--->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위버멘쉬)을 위해 최악의 것(심연)이 필요하다!
      심연에 관하여 이보다 멋진 비유와 통찰이 있을까요?!!!!!!!!!!!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아! 사람이 영원히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니.
짜라가 영원회기에서  봉착한 딜레마가 아닐까 싶은데요.
 자코메티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걸어가는 사람"
우리는 실패하였는가?
그렇다면, 더욱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잃었을 때,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대신에 계속 걸어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이것이 하나의 환상같은 감정일지라도
무언가 새로운것이 또다시 시작이 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나가야 한다.

* 예술의 전당 자코메티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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