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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후기] 커트 보니것 :: 0405(목) 첫번째 부분 +2
토라진 / 2018-04-09 / 조회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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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첫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의 더듬거림으로,
 ‘커트 보니것’의 단순해서 심오했던 이야기 속을 한껏 헤엄치고 나온 기분입니다.
 특히 처음 세미나에 참여해주신 분들 덕분에 새로운 자극과 활력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결석 하셨던 분들도 모두 참여해 더욱 열기 가득한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제부터 지난 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가며 후기를 적어보겠습니다.
 
∈ 호니커 박사와 그를 찾는 사람들

 

 [고양이 요람]은 여러 인물들이 불쑥 튀어 나와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곤 합니다. 중심 인물은 원자 폭탄을 개발해 노벨상을 수상했던 호니커 박사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 즉 그의 부인과 세 자녀, 동료인 브리드 박사 등이 있습니다. 이 때 호니커 박사의 부인과 세 자녀의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서사가 함께 맞물려 들어가면서 말이죠.
 하지만 호니커 박사는 어떤 인물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현실 감각이 없는 은둔자처럼 보이다가도 세계의 폭력성을 이미 간파한 허무주의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가부장제에 물든 비정한 인물인 것 같다가, 작은 생명에 눈길을 두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매번 달라집니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도 그에 대해서는 새로운 서사가 펼쳐지는 다음 이야기들을 통해서 조금씩 드러나게 되겠지요.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말이죠.
 첫 번째 질문, 호니커 박사가 발명한 ‘아이스 – 나인’(액체를 결정화하는 물질) 한 판을 세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던 세 자녀들은 그것을 어떻게 했을까?
 두 번째 질문, 호니커 박사가 중요시했던 ‘진실’은 과연 어떤 것인가?
 세 번째 질문, 과학자들이 리서치(research)하는 이유 – 다시 찾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뭘 잃어버렸는가?
 서사와 인물들의 질문들을 통해 나온 이러한 의문점들은 마치 지뢰처럼 다음에 펼쳐질 이야기 속에 포진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기상천외한 상황과 유머 속에서 터져 나올지 모릅니다. 그 숨겨진 지뢰를 찾아 나가며 그 지뢰를 밟고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 질문의 지뢰를 찾아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또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는 지뢰의 뇌관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 내기도 했습니다.

 

“내 영혼이 불타는 고양이털에서 나는 연기처럼 악취를 풍기는 듯했다.”(46쪽)

 

 이것은 ‘고양이 요람’을 만드는 실뜨기에서처럼, 실체 없는 존재로서의 ‘고양이’에 대한 은유적 비아냥처럼 보입니다.
사실 ‘고양이’는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화자의 집에서 고양이는 죽은 채 발견되는 대목에서입니다. 여기에서의 고양이는 생명의 총체로 상징화되는  듯 보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이에 대한  답을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생명의 비밀은 ‘단백질’에 있다는 기사를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단백질 덩이리인 인간은 그래서 악취를 풍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마치 불타는 고양이털에서 나는 연기의 악취처럼 말이죠.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면서 말끝을 흐리게 되기도 합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바람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말이죠.

 

 “여러 법원 잔디밭에 대호알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 말이에요. 그 사진에서는 대포알을 쌓아놓은 방법이 아주 특이해 보이네요.”(78쪽)

 

 위의 인용은 호니커 박사 연구실의 추모비 사진에서 전사한 주민들의 이름을 살펴보고 있던 화자에게 브리드 박사의 비서였던 파우스트가 한 말입니다. 호니커 박사는 ‘아이스-나인’를 만들어내기 위해 원자의 구조 방식에 대해 늘 생각해왔고, 그런 이유로 대포알 쌓아 놓은 묘비를 사진으로 찍어놓았던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편의를 위해 수많은 생명이 잃어간 그 자리에서 말이죠.
 이 아이러니는 결국 위에서 제기했던 질문인, “다시 찾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뭘 잃어버렸는가?” 에 대해 또 다른 변주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그곳에서 호니커 박사가 다시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질문들은 다음 이야기로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ш 보코논교와 기독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호니커 박사라고 한다면, 중심이 되는 서사는 “보코논교”의 형성과 그 내용일 것입니다. 보코논교는 샌로렌조 공화국에 한정된 종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기독교와 닮은 듯 보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서구 문명의 기초를 닦았던 기독교와 가장 먼 원시 종교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일단 보코논교는 하나님을 신으로 모십니다. 그다지 신성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신의 절대성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와 다른 듯 닮은 보코논교의 특징은 다음의 문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려는 진실은 파렴치한 거짓말이다.”(20쪽)

 

 위의 말은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말씀”의 하나님으로서 신은 절대적인 가치로 상징화되고 ‘말’을 통한 명령과 지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보코논교에서는 이것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 것처럼, 그 진실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진실인 것이죠. 결국 진실은 진실 아닌 거짓을 통해서만 진실임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그 진실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보코논교의 그랜펄륜(아무런 가치가 없는, 허울뿐인 조직)처럼 말이죠.
 결국 보코논교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종교의 허상일 뿐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그것들의 증거들을 찾아내야 할 테지만요. 작가가 만들어낸 커래스, 캔-캔, 윔피터, 빈-디트, 랭-랭 등 보코논교의 특별한 종교 용어들 역시 기독교적 요소들을 비틀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신과 같은 신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은 어떤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거짓말의 ‘하나님’을 숭배함으로써 이중부정의 효과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ф 죄와 벌 
 
 종교와 더불어 작가는 과학자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화자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발명과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고 사용 목적과 폭력성에 대해서는 묵인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과학자들에 대해서 말이죠. 예를 들어 원자 폭탄과 같은 비극이 벌어졌을 때, 그 희생자들에 가해진 폭력에 대한 죄는 어떻게 부과되고, 누구에게 전가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문제는 좀 더 확대되어 나아갑니다. 스스로 종교적 힘을 통해 면죄되었다고 믿는 종교인들과 어떤 법률적 절차와 윤리적 양심에 굴하지 않고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한 죄수가 호니커 박사에게 보냈던 [서기 2000년]이라는 책을 보냅니다. 폭탄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의 난교파티가 펼쳐지는 내용의 책이었죠. 또한 26명을 살해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죄수 모클리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과연 죄에 대한 벌은 누가 내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죄란 어떤 것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그 죽음을 방관하는 자들의 죄과는 과연 어떤 벌로 내려지는 것일까요? 보니것은 새롭게 구축한 세계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실험을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고양이 요람]은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 그 문장들이 빚어내는 페이소스와 유머, 기괴한 설정 등이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문자 사이의 행간에는 인간과 역사, 과학과 종교 문제들이 묵직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설렁 설렁해 보이는 서사와 헐거워 보이는 문장들이 철저하게 계획되고 빈틈 없이 맞물려 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합니다. 간간히 섞여 들어가는 유머란 최고단수의 무봉술 같은 것일 테구요.

이제 첫 번째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이어질 세미나에서 더욱 풍부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길 기대하겠습니다. ~~^^​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역시 반장님다운 멋진 후기! 나온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그걸 다 담아낼 수 있을까,
그 곤란에 몸살을 앓으시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덜어낼 건 덜어내고 다질 건 다져서 내놓았군요.^^
보니것의 허먼 멜빌에 대한 존경이 작품 안에 어떤 호명(조나)으로, 또 형식(시작 부분)으로 녹아든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보니것 만의 친절한 구성도 특이했고요.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에 일일이 다 번호를 붙이고 제목을 붙이는 게
작가 입장에서는 번거롭기도 하고 또 작품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을 텐데
자기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 가열참이 좋았어요. 제목 붙이는 센스도 매력 폭발이었죠.
예상치 못한 지점에 심어둔 유머도 유머지만, 그의 기발한 언어조탁 능력에도 감탄했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에게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깊은 슬픔이
이토록 경쾌하고 우스꽝스런 이야기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었어요. 
이 세계의 바닥을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해야 이런 묵직하고도 텅 빈 통조림이 나올까 싶은...^^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댓글의 댓글

역시 희음님다운 훌륭한 답글! 제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중요한 내용을 짚어주셨네요.
제목을 붙이는 방식이 보르헤스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왔고......
무엇보다도 유모에 깃든 비애가 느껴진다는 점이 중요했었는데 말이죠~~
텅 빈 통조림! 어쩐지 보니것다운데요? ㅋㅋㅋ
함께 즐겁게 읽어나가봐요. 더욱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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