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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후기] 젠더 트러블 :: 젠더는 패러디다 (4/12 저자 서문, 역자 해제 후기) +6
삼월 / 2018-04-16 / 조회 1,419 

본문

 

젠더는 패러디다

 

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퀴어이론은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넘어선 정치적 급진성의 문제였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급진성 혹은 ‘성소수자의 인권’ 너머에 있는 ‘퀴어’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2002년 하리수가 화장품 광고에 등장했을 때, 광고의 카피는 ‘여자보다 예쁜 여자’였다. 미지의 존재였던 성소수자와의 대면은 정치적 급진성을 능가하는 상업마케팅을 통해 가능해졌다. 하리수를 소개한 광고카피에는 ‘여자’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다. 앞의 여자는 누구이고, 뒤의 여자는 또 누구인가. 그 여자들을 묶어서 같은 여자로 볼 수 있는가. 1990년에 쓴 이 책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주체로 가정해온 ‘범주’로서의 여성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과연 그런 범주로서의 여성 집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공교롭게도 이 질문은 최근 한국 땅에서 현실화되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누군가가 트랜스 여성은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이 아니라고 발언했고, 하리수는 이 발언에 분노하며 논쟁했다.

 

버틀러는 젠더가 일관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젠더는 인종, 계급, 지역의 문제와 교차되거나 경합하며, 그때그때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을 무시하고 ‘범주’로서 여성을 통일하고 보편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버틀러는 정체성에 근거하지 않은 페미니즘을 위해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허물고, 모든 권력의 기저에 있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섹스와 젠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을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는 몸’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타고난 몸(섹스)이라고 불렀던 것 역시 젠더라고 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수행성을 특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사이다. 우리는 타고난 ‘여성’이거나 만들어진 ‘여성’이 아니며, ‘여성’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타고난 ‘여성’도 없고, 모방해 가야 할 ‘여성’의 원본도 없다. 젠더는 패러디이며, 그것도 원본 없는 패러디이다. 하리수의 예쁨이 ‘여성’에 대한 과장된 패러디라면, 거기에 원본은 없다. 타고난 ‘여성’(혹은 진짜 ‘여성’으로 자신을 지칭하면서)으로서 하리수의 과장된 젠더 수행에 불쾌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광고카피 안에서 하리수의 예쁨과 비교대상이 되는 여자들이 ‘여성’을 모방하는 하리수에게 우월감을 느끼거나, 하리수보다 (‘예쁨’으로 대표되는) 젠더 수행을 잘 하지 못했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하리수와 여자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젠더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리수의 존재는 젠더의 모호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젠더의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하리수의 착실한 규범적 젠더 수행은 이성애 가부장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전복의 가능성: 젠더 위계와 젠더 생산의 문제

 

페미니즘의 목표가 젠더 위계를 없애 젠더 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버틀러는 젠더 위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의 문제에 주목한다.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젠더 위계에 입각한 젠더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문제 삼는다면, 버틀러는 젠더 생산이 젠더 위계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버틀러는 이성애 규범 하에서 생산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가 모두 젠더 위계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고 본다.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는 젠더를 생산하면서 위계를 확고히 한다. 하리수의 젠더 수행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규범적으로 부여되는 젠더 이분법을 허무는 일은 중요하다.

 

버틀러는 규범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성의 실천들인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이 젠더의 안정성에 제기하는 의문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고 버틀러의 논의가 동성애를 정치적 실천 혹은 신념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다. 범주로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여성’이 우연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는 점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규정에 있어 큰 도전이고 위험이다. 그러나 정치적 급진성은 바로 이런 우연적 토대 위에서 탄생한다. 이때 여성은 그 자체로 재의미화와 재각인화의 장소가 된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여성’은 정체성의 해체를 통해 정치성을 갖게 된다. ‘하리수는 여성인가’를 묻기보다, 누가 언제 여성으로서 정치성을 갖는가를 물어야 한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여성을 수행하고 있을 뿐 '여성'이라는 원본은 없다는...!
분명한 적을 상정하고 나서야 나를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규범체계가 확 느껴지네요.
1장 전반부 발제 끝냈는데, 서문에서 논의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이어져요.
잼나요.ㅎㅎ

후기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분명한 적을 상정하고 나서야 나를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규범체계!
흠. 요즘 선악 이분법 흑백논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중이었는데,
그 체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려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 부분 어렵지만, 재밌게 읽었어요. 이른 발제도 감사합니다!

이사랑님의 댓글

이사랑

삼월님의 글이 책보다 더 와닿고 재미있습니다. ㅎㅎㅎㅎㅎ '젠더 생산이 젠더 위계를 만들어낸다.' 젠더는 개인 안에서 규율이 되어 생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이 것을 부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껴지지만, 저는 '비체되기'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책이 더 기대가 됩니다. 내일 뵈어요! ^^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재미있게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젠더는 개인 안에서 규율을 통해 생산된다.' , 푸코과 버틀러를 함께 엮어나가고 계시군요.
저도 이사랑님과 함께 따라서 엮어보겠습니다.
사실은 후기에 '비체되기'에 대해 더 쓰고 싶었는데, 쓰다가 포기했어요. ㅠㅠ
세미나 시간에 나누었던 '비체되기'에 대한 이야기들 몹시 흥미로웠는데,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겠지요?
그 부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내일 봬요!

현님의 댓글

지난 시간에 빠져서 아쉽습니다. ㅠㅠ
후기 보니, 잘은 모르지만 원본 없는 재현은 어쩐지 시뮬라크르 같다는 생각도..!
저도 역시 기대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오 맞아요. 시뮬라크르 이야기 나왔어요. 역시... ㅎㅎ
'여성' 개념 이야기할 때 오리엔탈리즘이 많이 도움될 것 같아요.
설명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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