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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불교를 철학하다_1.연기, 2.무상 :: 0414(토)
오라클 / 2018-04-16 / 조회 925 

본문

▪ 불교를 철학하다 > 1장 연기, 2장 무상                                                      ▪ 2018-0414(토) 오라클 

 

1장 연기: 외부에 의한 사유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

 

   1. 형이상학이여, 안녕          

#연기적 조건에 따라 ‘사물의 본성’이 달라진다. 연기적 조건이 ‘사물의 본성’을 결정한다.

 

[1] 형이상학적 사유 & 연기적 사유

연기란 무엇인가? >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로 요약할 수 있다. 연기가 불교의 요체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펼치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개념이다. 연기緣起란, 연緣하여 일어남起이다. ‘연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기대에 있음이다. 따라서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형이상학적 사유 > 이렇게 어떤 조건에 따라 존재하고 소멸하는 연기적 사유는, 무상하고 가변적인 세계에서 불변적인 것을 찾아헤맨 형이상학적 사유와 대립한다. 석가모니 당시의 인도인, 서구 고대의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 근대의 칸트, 현대의 후설도 무상한 것 저편의 확고하고 변함없는 것을 찾고자 했다. ‘본성’이란, 이런저런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고 남아있는 것(실체)이라고 믿었다. 

연기적 사유 > 연기적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연기적 사유는 “무상함의 저편을 찾는 게 아니라 무상함을 보는 것이며,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사물ㆍ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본성이 달라진다. 그래서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고 말한다. 

 

[2] 연기적 조건에 따라 의미와 본성이 달라진다

연기적 사유 = 차이의 사유 > 연기적 사유는 달라보이는 것에서도 ‘동일한 것’을 찾는 ‘동일성의 사유’와 반대로, 비슷한 것에서도 ‘차이’를 보는 ‘차이의 사유’이다. ① (연기적 조건에 따른 의미의 변화)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와 메나르는 두 사람이 연하여 있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글이지만 다른 문체-다른 의미를 갖는 상이한 글이 된 것이다. 시대와 조건이 다르면, 똑같은 글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② (연기적 조건에 따른 본성의 변화) ‘바이올린’이라는 물건의 본성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악기가 된다.”

연기적 사유와 본성 > ① (형이상학적 사유의 관점에서 ‘본성 없음’) 형이상학적 사유(불변의 본질을 찾는)에서 본성이란, 어떤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연기적 사유에서 특정한 조건에서만 본성이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에서는 본성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린에게서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는데, ‘자성自性(본래의 성질)’이 없다는 말과 같다. ② (연기적 사유의 관점에서 ‘모든 본성’) 바이올린이 연주자를 만나면 악기가 되지만,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고통스런 소리를 내는 ‘고문기계’가 된다. 겨울추위에 떠는 단하스님을 만났다면 대웅전 목불과 더불어 장작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만난다면 장난감이 되었을 것이고, 카페에 분위기를 내려는 사람과 만났다면 장식품이 되었을 것이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 장작이 된다.” 바이올린의 본성이 악기라고 한다면, 그런 만큼 바이올린의 본성은 장작이기도 하고, 장난감이기도 하며, 장식품이기도 하다. 그 모두가 ‘연한 조건’이 만들어낸 것이며, 그 모두가 ‘본성’인 것이다.

 

   2. 당신의 본성은 당신의 이웃이 결정한다          

#연기적 조건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달라진다, 연기적 조건이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

 

[1] 연기적 조건이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

인디언의 본성, 흑인의 본성 > 사람이나 동물에 어떤 불변의 본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것은 흑인들이었다. 백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인디언이 ‘인간’인지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논쟁을 벌었다. 라스카사스신부 같은 휴머니스트들은 ‘인디언’ 또한 인간이라며 노예로 부리는 걸 비난했지만, 그런데 그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흑인’도 인간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휴머니스트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연기적 조건이 흑인의 본성을 결정한다 > 흑인이 노예가 되었던 것은 백인들과의 끔찍한 만남에서 기인한다.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인디언들이 자유인이었듯이, 잘난 백인들과 만나기 전 흑인들 역시 자유인이었다. 어떤 사람들과 만나는가에 따라, 어떤 조건ㆍ관계 속에서 사는가에 따라 자유인이 될 수도 있고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연기적 조건이 흑인의 운명을, 흑인의 본성을 결정한다. 

 

[2] 연기적 사유 :: 외부성의 사유, 차이의 사유

연기적 사유 = 외부성의 사유 > 연기적 조건이란, 바이올린이 만나는 ‘이웃’, 흑인이 만나는 ‘이웃’이다. 어떤 것의 본성은 그것이 만나는 ‘이웃관계’가 결정한다. 칼은 당근의 ‘살’이라는 이웃과 만나면 도구가 되지만, 사람의 ‘살’이라는 이웃과 만나면 흉기가 된다. 이웃(타자)이란 밖(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올린이나 흑인의 본성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기적 사유는 어떤 것의 본성을 외부에 의해 포착하는 ‘외부성의 사유다.

형이상학적 사유(동일성의 사유) & 연기적 사유(차이의 사유) > ① (비유)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짐을 본다. 불변의 실체나 동일성을 찾는 사유는 밥에서 쌀을 보고, 풀이나 술에서도 쌀만 본다. 반면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쌀이 어떤 조건에 처하는가에 따라, 밥이 되기도 하고, 술이 되기도 하며, 풀이 되기도 함을 본다. ② (비교) 동일성의 사유가 다양성을 제거하여 동일한 것에 이르려는 환원적 사고라면,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이 조건에 따라 달라짐을 보는 다양성의 사고다. 동일성의 사유가 변함없는 것을 통해 변화 없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암묵적으로 배양한다면, 연기적 사유는 무상한 변화의 세계를 긍정하고 변화의 선을 타고 갈 것을 가르친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신의 사고를 어디로 밀고 가는지는 알고 선택해야 한다. 

 

   3. ‘자업자득’의 업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자업자득(내부, 동일성, 인과=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기(외부, 차이, 이탈)가 필요하다.

 자업자득은 현실순응ㆍ현재충실을 가르치지만, 연기는 시도ㆍ이탈ㆍ자유를 추구한다.

 

[1] 업(관성적 힘)과 연기(이탈의 힘) 

중독자의 신체처럼, 같은 것을 반복하게 하는 업의 힘이 ‘관성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고, 해서는 안되는 것도 반복하게 만든다. 늘 하던 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에 의해 배제된 것들은 생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배제된 것들을 계속 배제한 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업자득이다. 그것은 사고능력을 제한하고 생각 밖의 일들에 무능하게 만든다. 이는 자유로운 사고와 반대되는 갇힌 사고다. 자유란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힘에서 시작되며, 이로써 ‘업이기를 중단한 업’으로 정의되는 부처의 업에 다가가게 된다. 

 

[2] 업에서 벗어나는 연기 

① “좋은 업은 좋은 업을 낳고 나쁜 업은 나쁜 업을 낳으니 좋은 업을 쌓는 게 중요하다”면, 나쁜 업의 과거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연기가 중요한 것은, 업의 힘-관성적인 성향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과거의 업에서 벗어난 새로운 업-새로운 성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연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② 문제가 되는 것은 업이라는 말로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 경우 충실성은 오히려 현재를 과거의 업에 복속시킨다. 과거의 업이 현재를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다. 지금의 연기적 조건은 과거와 다른 삶을 향해 업의 방향을 바꾸게 한다. 업의 궤도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조건에서 어떤 게 좋은 삶인지 매번 다시 생각하고,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한다.  

 

 

2장 무상: 차이의 철학과 필연적 무지 "세상에 똑같은 두장의 나뭇잎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무상(항상적인 것이 없음)에서 허무를 보지만, 어떤 사람은 무상에서 차이를 본다.

   세계는 무상이며, 따라서 동일성의 환영무지를 벗어나, 무상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 (인식론적 관심)

   세계는 무상이며, 동일화의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윤리적 관심)

 

   1.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          

 

[1] 본체가 무상(항상됨이 없음)이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는 무상無常이다. 잎 뒤에 숨어있는 본체가 아니라, 잎이 나든 지든 눈앞에 드러나는 본체다. 무상이 바로 본체이며,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이 본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본체가 어디 따로 숨어있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진행되는 무상한 변화만이 본체다. 운문은 “떨어지는 잎과 함께 믿고 있었던 확고한 본체가 소멸한다”는 생각을 정면에서 뒤집으며, “스러지는 것이 본체라고, 그게 본체를 그러내는 것”이라고 답한다. 

 

[2] 무상의 통찰은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이고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상이란, 항상 그대로인 것,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 조건이 달라져도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이란 그런 동일성이 없음이고, 그런 동일성에 반하는 ‘차이’이 있음을 뜻한다. 무상을 본다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항상된 것을 찾음이 달라보이는 것마저 ‘동일화’하려 함이라면,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동일성이 없다 함은, 오직 차이만이,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의 통찰은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2. 환幻(환영), 필연적 무지          

 

[1] 우리가 동일성을 찾는 이유

세상의 실상은 무상이고, 차이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는다.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① (삶의 필요와 동일성) 무상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 학교에서 수업할 때 출석을 부를 때. 차이를 구별하는 능력이 단순히 차이를 구별하는 데만 머문다면, 실제 생활에선 사람을 봐도 누가 누군지, 말을 들어도 그게 무슨 소린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일화하려는 의지가 생겨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생겨난다. 동일성 없는 차이란 카오스이다. 동일성은 무상을 보려는 입장에서는 유감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유용성을 갖는 ‘필요’이고 누구도 피하기 힘든 ‘필연’이다. ② (언어적 편의와 동일성) 이름 붙은 것들, 언어로 말해지는 것들은 편의를 위해 무상을 지우는 동일성의 힘과 의지를 가동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쓰지 않고서는, 무상의 가르침도 세상의 존재론적 진실도 알려줄 수 없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로 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 아니고선 전할 길이 없기에 망설인다. 선사들이 도란 말로 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근본적 무지, 필연적 오류 (동일성의 무지, 동일성의 오류)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차이)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 아니라, 눈 앞의 뱀이 이전의 뱀과 동일하다고 보는 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귀로 분별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빛이 없어서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를 ‘근본적 무지’ 혹은 ‘필연적 오류’라고 한다. 근본적 무지(차이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란 동일성을 찾는 빛 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본적 무지는 자신이 세상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르고, 반대로 세상을 잘 보고 있다는-실상을 잘 알고 있다는 오인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중의 무지다. 차이의 세계-차이의 조건에서, 동일성의 사유-동일성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산출한다!

 

   3. 집단적 환상과 무상의 정치학          

 

[1] 동일성의 사유, 동일성의 욕구, 동일성의 권력

동일성의 사유-동일성의 욕구는 집단적 환상을 낳는다. 필연적 무지는, 개인적 무지나 주관적인 오류가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비슷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이고 객관적인 무지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 또한 동일하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한일전 축구경기에서 일본팀의 축구스타일을 응원할 수 없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의 동일성에 부합하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동일성의 이지가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라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남자가 이런 일로 울면 안 되지”란 식으로, 남자는 웬만한 일로는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동일성(정체성)이 강요된다. 동일성의 권력이 질서와 조화의 이름으로 강요된다, 동일화의 무지는 경책되기보다 권고되는 무지이고, 억제되기보다는 조장되는 무지, 나아가 가르치기도 하고 강요되기도 하는 무지다!

 

[2] 동일성의 무지, 동일성의 환영 / 동일화의 애착, 동일화의 집착

이는 개인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환(幻. 환영)이다. 피할 수 없는 근본적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환영이요, 전도된 세계다.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실상을 보지 못해 만들어진 허구적 환영이지만, 피할 수 없는 환영이고, 비슷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환영이다. 

동일화의 의지, 동일성을 포착하는 ‘동일성의 사유’가 현실적 힘을 갖는 집단적 허구를 만들어내고 유지한다. 차이의 사유,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의 사유가 가동시키는 권력과 폭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중단시키고자 한다. 동일화하려는 의지에 반하여,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삶의 필요로 인해 동일화하는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실상이 무상한 변화의 흐름만 있는 것이라면, 동일성 안에 차이를 새겨넣고 차이가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필연적 무지에 의해 구성되는 피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 업종자(관성)와 명언종자(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동일성의 세계에 대해 그것이 꿈ㆍ환영ㆍ물거품 같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무상한 차이화를 놓치고 있는 동일성의 환영이 무지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고 차이가 긍정되는 세계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의 실상을 놓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인식론적’ 관심보다는 동일화하려는 의지의 다른 이름인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각자의 삶을 벗어나게 하려는 ‘윤리학적’ 관심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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