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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발제문] 반시대적 고찰I :: 4~6장​ +1
백조 / 2016-07-21 / 조회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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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I.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 4-5-6장​


< 4장 >
3장에서 우리는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옛 신앙과 새로운 신앙”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백한 것은 스스로 자신이 속물 교양인임을 고백한 것임을 보았다.
다비드 슈트라우스는 이제 더 이상 철학자도 사상가도 아니며, 오직 새로운 신앙인이고 싶어할 따름이며,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자랑스러워한다. 이 신앙을 글로 고백하면서 그는 “현대적 이념들”의 교리문답서를 쓰고 또 폭넓은 “미래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속물들은 더 이상 겁을 먹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냉소주의에 이를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
 
그리하여 이제 독일은 미래 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속물(이것은 바로 가장 인상 깊은 형태의 새로운 신앙)과 광신자가 된 속물(이것이 바로 우리 독일의 현재를 특징짓는 전대미문의 현상)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정신이 결핍된 광신자, 즉 정신을 자극하거나 고양시키지도 않으면서 삶의 지도자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장기간 큰 영향을 미치고 미래를 지배할 생각을 품고 있는 광신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므로 우리는 이들의 광신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 이들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위하여, 우선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진실한 대답을 바란다.
첫째, 새로운 신앙인은 자신의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둘째, 새로운 신앙이 그에게 부여하는 용기는 얼마나 멀리까지 미치는가?
셋째, 그는 자신의 책들을 어떻게 쓰는가?
고백자로서의 슈트라우스는 우리에게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 저술가로서의 슈트라우스는 세 번째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에서 새로운 신앙인의 천국은 물론 지상의 천국이어야 한다. 슈트라우스의 책에 이 낙원에 관한 부분(294쪽)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이미 여러 해 동안 어떻게 행하여왔는지를 단지 암시하고자 한다. (중략) 우리는 최근 수년 동안 위대한 국민 전쟁과 독일 국가 건설에 활력 있게 참여했다. 그리고 많은 시련을 겪은 우리 국민이 예상치 못한 훌륭한 운명의 전환을 통해 내면적으로 고양되어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역사 연구의 도움을 받아 이 사건들을 이해하게 된다. (중략) 이 과정에서 우리의 자연 지식을 확대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평이한 보조 수단 역시 갖추어져 있다. 끝으로, 우리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 연주에서 정신과 정서, 환상과 유머에 대한 더 이상 바랄 나위 없는 자극을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는 생활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삶을 영위한다.”
이 글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속물)은 이것이 우리가 찾는 사람이라고 환성을 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천국은 우리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속물은 그렇게 환성을 지르지만 우리가 그처럼 만족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욕으로 ‘천국 속의 천국’에 관계된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된다.
즉 위대한 시인과 음악가에게 바쳐진 작은 저 심미적 밀실 말이다.(“우리의 위대한 시인에 관하여”와 “우리의 위대한 음악가에 관하여”라는 두 부록) 그 방에서 속물은 마음을 고양시킨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모든 오점들이 떨어져나가고 씻겨나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밀실을 작은 정화의 목욕실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천국 속의 천국이라 찬탄해마지 않고 이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니체는 1872년에 씌어진 슈트라우스의 책에서 곰팡이 냄새를 맡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으며 잠든 친구는 꿈에서 밀랍과 진주로 예쁘게 모방하여 만든 고전 작가들을 보았고 특히 리본과 누렇게 변한 종이로 장식된, 형태를 갖추지 않은 하나의 인형이 ‘레싱’이라고 씌어진 표를 입에 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호메로스풍의 키메라로서, 앞에서 보면 슈트라우스, 뒤에서 보면 게르비누스, 한가운데는 키메라 – 모두 합해서 레싱이다.
이 장들(부록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지만, 이것들은 낡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젊은 적이 없었고 종조부의 착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심미적 천국에서 어찌 그런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슈트라우스의 겸손한 위대함과 게르비누스의 불손한 보잘것없음이 너무나 잘 화합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슈트라우스를 포함한 독일의 보잘것없는 작가들에게 레싱은 인기가 많다. 그들은 레싱과 빙켈만 등을 칭찬하고 찬양하지만, 그대들은 어떤 천재에게나 괴테가 명명한 바 있는 저 “둔감한 세계의 저항”이었고, 기분 나쁜 둔감한 자, 혹은 질투심 많은 편협한 자, 혹은 사악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대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천재들은 작품을 창조했고, 그대들에 대항하여 공격했고, 그대들 덕분에 그들은 하루의 일도 완성하지 못한 채 싸움으로 파괴되거나 실신하여 너무나 일찍 저 세상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이, 선한 일을 이룩한 그와 같이, 그러한 사람들을 찬양해도 된단 말인가!
진실로, 우리는 레싱을 필요로 한다고 괴테가 이미 외쳤다. 드디어 어린 호랑이가 부풀어 오른 근육과 번득이는 눈으로 그칠 줄 모르는 힘을 과시하면서 사냥에 나서기만 하면, 허영심 강한 모든 선생들과 심미적 천국 전체에 저주가 있을지어다!
 
< 5장 >
나의 친구는 키메라적 환영을 통해 슈트라우스적 레싱과 슈트라우스의 진상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읽지 않으려 했으나, 우리는 계속 읽어나갔고, 음악적 성전을 지키는 새로운 신앙의 문지기에게 들여보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래서 선생은 문을 열고, 같이 다니면서 설명하고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슈트라우스가 하이든을 ‘훌륭한 수프’에, 베토벤을 ‘사탕과자’에 비교한다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사실이 확실해진다. 즉, 그의 사탕과자 베토벤은 우리의 베토벤이 아니며, 그의 훌륭한 수프 하이든은 우리의 하이든이 아니다.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말하는 바 베토벤의 “문제작들”(6번, 3번, 9번 교향곡) 속에서는 결코 공적을 발견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355, 356쪽의 고백(교재 216쪽 7-9줄)을 통해 베토벤은 숨을 헐떡거리며 짐을 굴리는 사람이고, 고전적 문필가인 그는 자신의 짐을 가볍게 놀이하듯 밀고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정적 가운데서 혹은 정돈된 새로운 천국에서 신앙심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가능한 신앙심 가운데 슈트라우스의 신앙심이 가장 놀랄 만한 것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그는 제물을 태우는 조그만 불꽃으로 자신의 신앙심을 깊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국민의 가장 숭고한 작품들을 초연하게 이 불꽃에 집어던져서 그 연기로 자신의 우상들을 그을리게 한다.
우리 시대의 슈트라우스류의 사람들은 어떤 예술가에 대해 그가 자신들의 일에 적합한가에 관해서만 알고자 하며, 오직 제단에서 불태우는 것과 그을리는 것 사이의 대립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기괴한 점은 단지 미에 관한 여론이 너무 메마르고 불안정하고 유혹되기 쉬워서 대단히 볼품없는 속물근성의 전시를 아무런 이의 없이 감수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 여론은 미적이지 않은 선생 따위가 베토벤을 재판하려고 앉아 있는 무대의 희극성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기괴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모차르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를 단지 칭찬하는 일도 비천한 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여기에서는 청중이나 선생에게서 수치심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선생의 솔직한 신앙고백과 죄의 고백을 기뻐하며, 특히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가 아니라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저질렀을 죄를 고백할 때 기뻐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고백해야 합니다. 나 이외에는 변함없이 옳은 사람을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서 있다.
 
< 6장 >
우리의 첫 번째 질문 ‘새로운 신앙인은 자신의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시되었다. 슈트라우스적 속물은 우리의 위대한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 속에서 벌레처럼 살고 있다. 이 벌레는 파괴하면서 살아가고, 먹어치우면서 경탄하고, 소화하면서 숭배한다.
 
두 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종교가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용기는 얼마나 멀리 미치는가?’
만약 용기와 불손함이 한가지라면, 이 물음에 대한 답도 이미 주어졌을 것이다.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는 예를 보자.
오래되고 존경할 만한 우주조차, 마치 그의 칭찬을 통해 비로소 신성하게 명명되어야 하고 또 그때부터는 오직 중심 단자(單子)인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진동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칭찬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비유가 실패했다고 가정했을 때의 다음 절차는 슈트라우스가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마비되고 시든 것이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찌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실제로 자기를 찌르는 것이 아닌 더욱 폭력적인 절차를 선택하는데,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러한 우리의 이념을 정면으로 내려치는 쇼펜하우어를 펼쳐 든다.”
그러나 어떤 이념, 즉 우주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슈트라우스의 이념조차도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념을 가진 사람만이 얼굴을 가지기 때문에 절차는 다음과 같은 개별적 행동으로 이루어딘다.
슈트라우스는 쇼펜하우어를 펼쳐 든다 – 그것도 열어서 친다. 이에 쇼펜하우어가 기회를 잡고 슈트라우스의 얼굴을 친다. 이제는 슈트라우스가 “종교적”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다시 쇼펜하우어를 떨쳐버리고, 욕하고, 부조리, 신성모독, 포악한 행동에 대해 말하고, 심지어는 쇼펜하우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판정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슈트라우스에 대해 “그는 연구는커녕 책장을 넘길 만한 가치도 없는 저자다.”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쇼펜하우어가 그의 목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그는 헛기침을 함으로써 쇼펜하우어를 떨쳐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찬사의 양을 가득 채우기 위해 슈트라유스는 게다가 늙은 칸트를 추천한다. 우리는 칸트에 대한 무지에도 용감무쌍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칭찬의 정수를 쏟아넣는 유명한 산문작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슈트라우스가 칸트의 이성 비판으로부터는 자신의 근대적 이념의 성서를 위해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또 슈트라우스가 어디서나 매우 조야한 사실주의의 마음에만 들게끔 말하고 있다는 황당무계한 사실은 이 새로운 복음서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이 복음서는 끊임없는 역사 연구와 자연 연구가 힘들게 이뤄낸 성과라고 자평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적 요소 자체를 부인한다. 속물의 수령 및 그의 “우리”에게는 칸트의 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고백서에는 정말 축제일에나 맛볼 수 있는 기쁨에 찬 치유 불가능한 낙천주의가 굴러다니는 부분이 있다(142, 143쪽). 낙천주의는 여기서 자신의 일을 고의로 가볍게 생각한 적이 있다. 염세주의자를 진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행동(쇼펜하우어를 반박하는 일이 전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어야만 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처럼 “건강하지 않고 쓸모없는” 철학에 대해서는 어떤 논증도 낭비해서는 안 되고 기껏해야 말과 농담만을 낭비하면 된다는 것을 알리는 데는 대단히 근거가 박약한 궤변들로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쇼펜하우어의 장중한 설명을 이해한다. 즉, 만약 낙천주의가 평평한 이마 밑에 낱말만 들어 있는 사람들의 생각 없는 말들이 아니라면, 낙천주의는 그에게 그저 부조리한 사유 방식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멋대로 놀아나는 사유 방식처럼 보이고, 인류의 이름 없는 고통에 대한 통렬한 조롱처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만약 슈트라우스와 같은 속물이 그것을 체계화한다면, 그는 그것을 또한 비열한 사유 방식, 즉 “나” 또는 “우리”의 극히 둔감한 쾌적함에 관한 이론으로 만듦으로써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슈트라우스는 초기 몇 세기 동안 기독교가 보여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부정의 욕망과 금욕적 정화의 경향을 달리 설명하지 못하고, 오직 앞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성적 향락과 그로부터 산출된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통해서만 설명한다는 것이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반시대적 고찰...!!?? 첨엔 잘 안붙었는데...., 점점 재미있어지는 거 같아요.
맥락이 보이니까 그런 듯~!! 그리고 텍스트를 잘 읽는 세미나회원들 때문인듯 해요.
그래서 캄샤해요, 특히 백조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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