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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시간과 사랑따위 4/20 ㅡ 람스 +4
fabioo2… / 2018-04-21 / 조회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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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4/20 ㅡ 람스


1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마라>

니체와 매주 함께한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가네요
챗바퀴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매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몸만은  피곤해지지만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이렇게 고리타분한,  단순한 노동하는 동물로 ㅡ  전락함에 저항하게 된답니다.

고차원의 실존적 욕구불만이 동기가 되었기에 월요일 저녁은 * 크나큰 동경* 으로 다가오네요
여가시간은 소비에만 사용되고 시간이 남아도 그 속에서의 탐욕의 유혹은 꺼지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TV 안 보기, 시간 밀도있게 사용하기 등은 노력 하지만요)

저라고 해서 어떻게, 알기 쉬운 것, 재미있는 것 같이 공허나 공백을 메워줄 무엇인가를 갈망함을 원하지 않겠나요?. 하지만 

이는 내면적인 공허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대리만족에 지나지 않으므로 결국에는 질적인 불만족이 생기기 마련이겠죠. 

대리로 얻는 것은 마음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없기도하고. 

제 마음은  질적인 불만족을 양적으로 보충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 결과 때로는 제한 없이 양만 늘리는 꼴이 됩니다만.... 이번 주 또 한번의 니체의 기쁨에 놓여있습니다.


**나 너의 울적한 미소를 이해하겠다 . 이제사 동경에 찬 손을 뻗치고 있고

너의 충만이 거세게 파도치는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며, 탐색하며 기다리고 있구나! ** 369p

그리고, "숙명, 시간의 탯줄" 등  니체의 단어는 과거,현재, 미래에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약하게 시간을 

소비하는지 다시 한번 질문해 봅니다.


**시간의 역사** 로 유명한 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황막하고 잔혹한 블랙홀 안에서의 시간 속에서 
정보는 손실되지 않고 무엇인가 창조된다고 했죠. 

원자가 분열되고 아원자와 입자들이 어둠에서도조차 춤을 추듯이,
그럼 나 스스로  이 헬조선 안에서, 적어도 미래를 창조하는 삶, 능동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충동됩니다

만약 시간이 가는 방법을 바꾸려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면 될 것입니다.

우주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가만히 있는 사람들보다 *상대적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거죠. 

착시적 효과 같지만 실험으로 증명 되었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비행기와 로켓에 시계 설치한 후 매우 빠른 속도로 일정거리를 비행했는데 결과는 비행 후 원자시계들을 측정해보더니 지상에 있던 시계들보다 시간이 약간 느려졌지요 ㅡ이 효과를 시간팽창이라고 하는데 미래로 가는 여행에 이용됩니다.

 

그럼 다시 질문해 봅니다.

 

속도나 중력에 (의지에) 의한 다른 밀도의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나의 시간의 밀도는 존재하는가?

그것을  지배하는 창조자가 되는,  머무는 빛이 아니라 다가가는 빛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 입니다.

유행에만 급급하지 않은, 시간을 투시하여  그 진가를 끝까지 밝혀내는 겸허함을 갖춘 존재로서 말이죠.

 

 호킹는  2010년  *위대한 설계* 에서   다중우주 이론을 받아들이며

고정된  법칙보다도  ㅡ "모든것을 설명하는 궁극의 법칙은 없다” 라고 선언합니다.
과학사의 큰 전환점이였죠 ㅡ 왜나하면 초기우주의 양자역학적 기본원리, 불확정성의 원리 등등을 적용하면 
무수히 많은 생명체의 탄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신은 필요없다”  ㅡ 종교적 의미보다는 다중우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라고 말합니다. 다른 가능성을 열어보자  
절대자의 개입없이,

삶의 절대적 긍정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절대자의 개입없이,

니체 형님에게 감사합니다^

 

 

2 <사랑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마라>


우리 안에 자리잡은 공허함을 쫓아내기 위해서 물건을 채워 넣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수동적 인간이겠죠

저도 이 부분에서는 항상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 ‘사랑’ 이라는 고결한 감정을 채워넣기만 하고, 고독의 찬가 
따위만 유혹하면서 종잡을 수 없는 정신적 완성의 단어만 탐구중 입니다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선과 악을 결합하는 소금같이, 생명을 잉태하고  낡은 것을 파괴하는  긍정의 사랑**

이라는 니체의 번역 불가능한 문구에 심취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하지만,

"시간은 돈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돈은 증식해서 결실을 맺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라는 베버의 문구들이  머리 뒤 편에서 아른거리면서,  “사랑”이라는 이 잔혹한 단어가 또 다른 위태로운 궁핍함을 
엄습하는군요.

“관계는 돈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사랑은 자본속에서  증식해서 결실을 맺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라는 단어만 바꾸어놓은  
존재와 소유를 교환하는 세상 안에서,  정신적인 증여를 부정하고 대립적인 세상을 소용돌이 치면서 살려는 저, 바람의
손아귀에 든 먼지처럼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요.

인정합니다
나는 경박합니다. 내 삶의 한가운데서 불만족을 느끼면서 따지고 갈망하는 못난 기분의 동반자,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면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듯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긍정을 동경하면서 멀고도 가까운 감정들을 탐색해보는 시간들에게
동요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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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14-16 너무나 어려웠기에 다른 상징을 끄적거림을 용서하시고, 두 번째 파트에서 제가 좋아하는 하작가님의  짧은 글이 너무나도 연결점이 보여서 첨부합니다. 가볍게 읽으시길^^

 

<가난은 어디로 가벼렸나?>


이 역시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상당히 가난했었다. 막 결혼했을 무렵이다. 우리는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소리죽여 살았다. 스토브 조차 없어서, 겨울 밤에는 고양이를 껴안고 추위를 견뎌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사람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상황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여행도 가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오직 일만했다.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문론 있지만, 없는 것은 만들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 했다. 돈에 주리다 못해 마누라와 둘이 고개 숙이고 밤거리를 걷다가 만 엔짜리 세 장을 주운 적이 있다.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그때, 인생도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젊고, 세상 물정을 몰랐고, 그리고 서로 사랑했고, 가난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취직하지 않고 꽤나 멋대로 살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세상에서 낙오한 것이나 다름 없지만  불안이라 할 만한 건 없었다.


아무튼 뭐 가난했다.

그때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이런 일도 있었고 그런 일도 있었다며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른바 가난 자랑이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이면 흔히들 이런 유의 가난 자랑을 했다.

내가, 혹은 누가 과거에 얼마나 가난했는지,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 누군가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그런 건 가난 축에도 못 끼지" 하고 반격한다. “난 일주일 동안 고양이 사료만 먹고 살았다고" 어쩍고저쩌고.


이건 나 개인이 놓여 있던 환경이 피운 재주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가난했다. 고바야시 군은 먹을것이 없어서 표고버섯 기둥 부분을 한 사발 먹었다가 탈이 났다. 정상적인 인간 이라면 그런 것을 먹지 않는다. 호리우치 군도 무지하게 가난했다. 늘 배가 고파 비틀거리면 걸었다. 얼마 전까지 내 주위에 차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어봐야 요란한 소리가 나는 구닥다리 코롤라나 너저분한 라이트에이스, 그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인가, 모두가 신기게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되었다. 내 주위에는 메르세데스(벤츠)를 갖고 있는 사람도 몇명 있다. BMW를 산 사람도 있고, 볼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내 주위에 부자 지인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들 모두가 이제는 가난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나이에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다. 다들 나이를 먹었고, 그러다보니 그렁저렁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의 풍조도 상당히 큰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컨데 이제 세상이 가난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을 그저 돈이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밖에 파악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난 자랑 따위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끔 젊은 여자를 만나 얘기하다보면ㅡ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가끔입니다ㅡ 그녀들은 가난이 싫다고 단언한다.

“결혼 하고 싶죠. 하지만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건 싫어요.” 그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신념 표명'이다. 아주 확고한.

“가난이 싫은 거로군?”

“그럼요, 절대 싫죠."

“무라카미 씨는 옛날에 가난했나요?”

“그랬지.”

그녀들 대개는 내 대답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들은 가난이라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 당연히 난감해하면서 나 역시 난감해지니까. 그 시점에서는 얼른 화제를 바꾼다. 자랑삼아 가난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런 애기를 해봐야 상대는 그저 짜증스러워할 따름이다. 


가난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나는 때로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정말 노인네 같다며 싫어할 테지만, 예전 여자들은 

” 가난한 건 절대 싫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그랬다

그녀들에게는 돈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여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꽤 많았다. 외제차만 있는 남자랑만 여자애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는 어디까지나 극 소수였고, 적어도 나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내 주위의 보통 여자들은 차가 없거나 돈이 없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데이트 때도 내게 돈이 없으면 상대가 냈다. 그런 일은 수치도 뭣도 아니었다. 우리는 좀더 다른 것을 추구했다.물론 아무도 제 발로 가난해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유의 통과의례가 아닌가 하고,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에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실제로ㅡ이런 얘길 쓰자니 몹시 부끄럽지만ㅡ가난은 정말 즐거웠다. 한여름 무더운 오후에 너무 더워 머리가 띵해서 찾집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마누라와 둘이 ’참자'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간신히 집에 돌아가 보리차를 꿀꺽꿀꺽 마시는......

그런게 정말정말 즐거웠다. 옛날 일이라서 즐거웠다는게 아니다. 그 즐거움은 돈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른바 상상력의 문제다. 상상력이 있으면 우리는 많은 것을 이겨낼 수 있다. 돈 많은 부자든, 빈털터리 가난뱅이든.


가난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나? 가난은 사라져버린 것인가?

물론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난이란 사라질 수 없는 상황이다.


일요일 아침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라운드넥 셔츠에 헐렁한 버뮤다팬츠를 입고 고무 슬리퍼를 신은 아버지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흰색 메르세데스를 사랑스럽다는 듯 세차하는 관경을 목격한다. 그런 관경을 보면 나는 ’어이 아저씨, 거 좀 가난 한데요'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 건 당신의 개인적인 편견 아닐까?”  마누라는 그렇게 말하지만.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신은 필요없다! 절대자의 개입없이, 삶의 절대적 긍정을 노래하라"
니체한테서 가져온 긍정의 노래군요, 멋집니다. 람스님^^

<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 노동에 대한 니체의 정리 >
기존의 가치에 따르면, 노동의 숭고함을 이야기하고 노동을 찬미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노동은 화폐로 표현된 활동이며, 노동에 대한 착취는 미래를 대가로 한 약탈입니다.
"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상실보다,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 더 심각하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자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타자의 가치'를 생산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을 자유인으로 생산하기보다 노예로서 재생산한다. 따라서
'타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거부하고, '자기가치'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해야한다."

< 사랑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 사랑에 대한 니체의 정리 >
먼저, 사랑이 구속과 소유욕이라면, 우정은 구속이 아닌 사랑이고 소유가 아닌 열망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구속하는 소유욕이며, 희생으로 아름답게 포장한다.
 우정은 구속이 아닌 사랑이며, 소유가 아닌 열망을 공유한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이웃의 직접성(가까운 곳, 현재)을 넘어서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fabioo26님의 댓글

fabioo2… 댓글의 댓글

ㅅ감사해요 ㅎ  어려운 장이라 연결성없이 끄적였느데요

모로님의 댓글

모로

헬요일 월요일을 기대하게 되는 기쁨에 공감합니다ㅎ

람스님의 댓글

람스 댓글의 댓글

오늘도 그런마음으로  긴장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기가막힌 월요일 이였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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