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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발제] 저자 후기 정리 0424(화)
/ 2018-04-24 / 조회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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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정리                                                                         

 2018.04.24. 정리: 현

※ 《오리엔탈리즘》은 이 책을, 별도의 특수 문자 없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한 지적 권위에 기대어 바라보는 관념으로 사용하겠음

 

[오리엔탈리즘] 1995년의 후기

 

Ⅰ. 《오리엔탈리즘》이 유명한 저서가 되면서 오독과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를 바로잡고자(▷)

▶ 이 책의 목적을 반서구주의로 읽는 시각 : 서구 전체는 비유럽의 적, 아랍권을 침략한 약탈적 서구

   → 그리하여, 이슬람 세계만이 유일무이하게 완벽한 길이다? /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이슬람 주의, 무슬림 근본주의에 대한 지지다? / 《오리엔탈리즘》 은 아랍권을 옹호하기 위한 글인가?

▷ 인간의 정체성은 자연적이고 공고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구축되고 때때로 노골적으로 조작되는 것(570) :

   모든 지리학적 명명은 경험과 상상의 괴상한 조합에 불과하다.(568)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은 각각의 사회에서 권력을 쥔 쪽과 권력이 없는 쪽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단순한 학문적 공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570)

▷ 위와 같은 사이드의 주장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 공고한 실체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론(571) : 애국심,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 노골적이고 불쾌한 쇼비니즘이라는 반응을 동반. 그러나 무비판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벗어나 이질적이고,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인간의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사고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571) 이런 노력은 ‘동서양의 갈등’과 같은 스테레오타입보다 더 큰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확고하게 이분법적인 대립에 기초한 책 읽기가 위와 같은 오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 정치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절박함 : 이슬람을 둘러싼 정치적, 군사적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를 표명하게 만들었다.(574) 그러나 이 책의 의도가 그 (허구적인) 거대한 두 집단의 갈등을 영구화시켰다고 볼 수 없고, 갈등을 일으키는 이해관계에 불과한 것을 사실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믿지 않을수록 더욱 좋다.(575)

▶ 에드워드 사이드의 민족이 팔레스타인인이라서?

▷ 이 책을 저술하는 데에, 사이드가 제국주의의 동서 경계를 가로질렀고, 서양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의 출신지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576), 그의 민족이 단순히 팔레스타인인이라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적이고 무비판적인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항상 견지해왔다.

▶ 아랍 세계를 선동할 수 있는 개막 축포로의 왜곡 ( + 마르크스에 대해 더 철저하게 집중하지 않았다는 비난, 혹은 서구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비판)

▷ 인문학적 연구를, 비지배적이고 비근본주의적인 지식의 유형을 지향하는 사고에 대한 강압적인 제한을 넘어서는 이상적 추구(576)라고 사이드는 생각하며, 오리엔탈리즘 같은 체계의 족쇄로부터 지식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581)이었음을 밝힌다.

▶ 후라니 : 중립적 의미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고, 학문적이고 휴머니스트적인 방대한 성과물들을 언급하는 데에는 등한했다는 평

▷ 사이드는 후라니의 평에 대해, 사이드가 저서에서 비판한 학자들이 인간의 지식에 있어 공헌자로 알려짐이 마땅하며, 태도나 구조 속에 깃든 담론 차원에서 말한 것이 후라니의 비판적 평과 상충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 버나드 루이스 :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이드의 비판이 무의미하며, 사심 없는 학자적 이념에 폭력적이라는 평

▷ 그러나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적 의식뿐만 아니라 문학적 상상물 사이에도 강력한 ‘제휴관계’가 있다는 것(588), 식민주의적 권력이 그들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했던 이슬람과 동양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상당량은, 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에게서 유래했다.(589) 또한, 버나드 루이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이슬람 전문가들이 이슬람세계에 대해 경제적 착취, 지배 혹은 노골적인 침략이라는 의도를 가진 정부들에게 과거에도 지금도 자문을 해 주고, 그 정부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지(590), 어째서 지금껏 이런 제휴에 대한 내적 비판이 없었는지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Ⅱ.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평, 해석(▶)에 대한 저자의 입장(▷)

▶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 여러 문화들 중에서 서구문화와 유교문화 및 이슬람문화가 그 지지자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주로 다른 문화를 밀어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물 샐 틈 없는 구역과도 같다는 전제(594)

▷ 각 문화와 문명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상호의존적인 것(594)으로 종족이나 본질을 구별 짓도록 강요하는 모든 기도들은 ‘동양’, ‘서양’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권력과 공모하는 방식까지 노출시키고 있다.(595)

▶ 폴 존슨 : “가장 기본적인 문명생활의 조건이 붕괴된” 제3세계를 재식민화하는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595)

▷ 그러나 더 이상 약소 민족들이 침묵한다거나, 지배자였던 유럽 남성이나 미국인 남성들에 의해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두드러지면서 이제 문화에 관한 학구적이고 이론적인 연구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심각하게 관심을 보일 것을 요구할 만큼 여성과 소수민족, 주변인들의 의식 속 혁명이 극적으로 명백해졌다.(596) 

▶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이 두 가지 흐름의 선구적인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을 꼽고 있는 듯 보임

▷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거의 무게 없는 소비주의와 함께 지역과 그 지역의 사람들을 압박하는 이론적이고 미학적인 강조의 우세를 보여주는 유럽중심적인 편견이 있으며,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경우, 이 초기 연구에서, 정치적 독립의 완수나 미완성의 자유주의 사업 둘 중 하나의 입지에서 생겨난 정복과 통제에 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597) 전자가 해방과 계몽이라는 이론체계가 사라지는 것을 강조한 반면 후자로 호명되는 예술가들의 첫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의 상당수의 이면에 주어진 강조점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598)

 

◈ 모색 (600~603)

저자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심사를 지리학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차이가 만든 적대감 위에 세워진 지식의 개념에 도전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그의 이 저서에 의한 시도는, 역사에 걸쳐 나타난 적대와 전쟁, 분리와 갈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재구조화한다는 사상이 깃든 《오리엔탈리즘》 이후의 책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나 성, 인종, 계급에 독점되어 있다고 믿었던 영역들이 다른 국민이나 성, 인종, 계급도 포함하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불평등이 아직 존재하지만, 이것은 영구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글을 맺는다.

 

[오리엔탈리즘] 2003년의 후기

 

 정체성이 존재론적 안정성을 가지거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만큼, 현재의 상황을, 고칠 방법이 없는 (예정된) 문명의 충돌로 보지 않아야 한다. 상황이 나아지는 유럽에 비해 미국의 이해는 나아지지 않았다. 태도의 경직성, 타락한 보편성과 진부한 승리주의가 장학하는 견고한 통제력, 노골적인 권력의 우위 때문에, 그리고 ‘타자들’에 대한 단순한 경멸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동양’은 지울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서구의 양식에 따르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진정한’ 동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재차 말해야 할 것이다. 후진성과 민주주의 결핍, 여권의 부재 등을 이유로, 폭력이 이루어져 왔지만, 근대성, 계몽,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간단히 호명할 수 있는 단순하고 합의된 개념이 아니다. 계몽, 교화라는 사명으로 질서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고 마지막 수단으로서만 힘을 사용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문명화 사명에 의해 초래된 파괴와 비참과 죽음의 이면에는 제국에 대해 조용하게 말하는 자발적인 지성인의 합창이 있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제3세계 독재를 근거로 명분삼아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은, 그 뒤편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학문적으로 자문, 지원해 온 일은 학자로서의 소명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을 수반한 수많은 뉴스 매체, 우익노선의 라디오, 타블로이드 신문 등, 이들은 미국을 선동하기 위해 허구와 광대한 일반화를 재순환시키고 있다.

 혹자는 아랍과 이슬람교도가 제국의 약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의 피해주의라고 말하지만, 어째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면서도,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해온 것, 그리고 계속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말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이어서 이데올로기적 허구, 그것이 가져온 형이상학적 대결과 같은 것들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한다. 

 덧붙여 그는 대체 모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문헌학은 해석 기술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라 말한다. 소외감이나 적대감으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관용과 환대로 전개되는 휴머니즘 정신을 포함한 세계문학에 적용되는 것이 문헌학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차원의 문헌학은 독일에서 점차 쇠퇴하고, 더욱 악화되어 교육이 민족주의자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으며, 종교적 교조주의가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합리적인 해석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현대의 세속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역사의 세계이다. 조작된 문명의 충돌에 기대기보다는, 광범한 이해, 시간과 인내, 해석 공동체의 믿음에 의해 지지된 회의적인 탐구를 통해, 권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개성과 주체적 직관을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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