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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후기] 제10장 장자와 도가 중의 장자학 +1
백경희 / 2018-04-27 / 조회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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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장자와 도가 중의 장자학
 

어떤 책이나 논문의 목차만 봐도 저자의 핵심 생각을 대략 알 수가 있다. 이번에 본 중국철학사 제10장 장자편의 목차를 봐도 풍우란이 장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가 있다. 먼저 풍우란이 말하는 장자 사상을 살펴본다.

 

1. 장자와 초나라 사람 정신

『사기(史記)』에서 그리는 장자의 모습은 이와 같다.
“장자(莊子, 369?-286?B.C.)는 몽(蒙: 山東 曹縣, 일설에는 河南 商丘縣) 고을 사람이고, 이름은 주(周)이다. 그는 한때 몽 고을 칠원(漆園)의 벼슬아치였고, 양 혜왕(梁惠王), 제 선왕(齊宣王)과 동시대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통찰하지 않은 데가 없을 만큼 광범하나, 그 요체는 본래 노자의 사상에 귀착했다. 그의 저서는 10여 만 자에 달하는데, 대부분 우언(寓言)이다. …… 책을 이해하고 언설을 분석하는 데에 뛰어났고, 이야기를 설정하여 진리를 유추했다 그로써 유묵을 공박했는데, 당시의 석학들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사상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심원하고 또 자유분방했기 때문에, 왕공대인(王公大人)들도 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다. ……”

몽은 송(宋)나라 땅이므로 장자는 송나라 사람이지만, 장자의 사상과 문체는 굴원(屈原)의 문체처럼 초탈적이고 광활하여 초(楚)나라 사람과 가깝다.
그리고 장자는 맹자와도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면서도 논쟁한 적이 없다. 이는 맹자는 장자를 양주의 추종자로 보았기 때문이고, 장자도 맹자를 공자의 추종자로 보았기 때문에 각각 양주와 공자만 지목해서 얘기했을 뿐이지 장자와 맹자가 서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2. 도(道)•덕(德)•천(天)

장자학의 철학은 『노자』와 다르지만, 장자학이 논한 도(道)와 덕(德)은 『노자』와 같다고 한다. 도는 천지만물 생성의 총원리[所以生之總原理]이니, 사물이 있으면 도가 있다. 따라서 도는 “없는 곳이 없다.” 또한 도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존(永存)하며, 천지만물은 모두 그것에 의지하여 낳고 낳기를 그치지 않는다.
도의 작용은 또한 자연적이다. 하늘[天]은 즉 자연이라는 의미이다.
도란 천지만물 생성의 총원리이니, 이 원리는 바로 만물 가운데 표현되어 있다. 즉 천지만물 생성의 총원리를 도라고 일컫고, 각 사물의 생성의 원리를 덕이라고 일컫는다. 

 

3. 변화의 철학

사물의 형체는 한번 이루어진 후에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장자학의 견지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항상 변화[變] 가운데에 있지 않을 때가 없다.

 

4. 무엇이 행복인가?

모든 사물은 도로부터 각기 그 덕을 얻으며, 저마다 자연의 본성[性]이 있다. 자연의 본성을 따른다면 행복은 바로 그것이므로 달리 구할 필요가 없다. - 대붕과 뱁새의 비교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순응함은 자연과 더불어 조화함이니, 곧 천락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사회적 각종 제도는 장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다만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에 충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장자학은 무엇보다도 다스림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以治治天下]에 반대하고, 천하를 다스리려면 다스리지 않음[不治]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5. 자유와 평등

이상에서 장자학에서의 사회 정치 철학은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모두 절대적 자유가 있기 때문에 저 자연의 본성에 순응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동등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욱이 도와 합일할 수 있다면 일체의 분별을 행하지 않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인” 경지에 도달한다.

 

6. 죽음과 불사

좋지 않은 사물은 없고 옳지 않은 견해는 없다는 것이 「제물론」의 종지이다. 범위를 넓혀 말하면 모든 존재방식 역시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죽음도 우리가 하나의 존재방식에서 다른 하나의 존재방식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즉 죽음은 삶의 자연적 결과이다. 이것을 비통해하고 고뇌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고 인간의 정념을 배가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써 정념을 순화해야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똑같이 여길 수 있을뿐더러, 실제도 사생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개체가 우주와 합일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를 체득하여 거기에 동화하면”, 우주가 끝도 시작도 없듯이 우리도 끝도 시작도 없을 것이고, 우주가 영구하듯이 우리도 영구할 것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일체의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상태 속에서 겪는 경험이 순수경험이다.

 

7. 순수경험의 세계

이상에서 순수경험 속에서 개체는 우주와 합일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순수경험(Pure experience)은 [이지적] 지식이 없는 경험이다. 순수경험을 할 때에는 경험자는 경험내용에 대해서 단지 그것이 “그러함”을 감각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개념적 분별이 있으면 성취가 있고, 성취가 있으면 훼손이 있지만, 순수경험에는 성취도 훼손도 없다. 따라서 달인(達人)은 분별을 피하고 순수경험에 머무르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그 지극한 경지는 머물러 있으면서도 머물러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경지에 이르면 만 가지로 상이한 사물일지라도 우리의 인식상으로는 사실상 이미 구별이 없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진정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좌망(坐忘)”이 곧 그런 경지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8. 절대적 소요

인간은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절대적 소요가 가능하다. “심재”하고 “좌망”한 사람의 경우, 이미 “사생을 같은 일로 여기고 옳고 그름을 한통속으로 여기니”, 그 소요는 의존대상이 없고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이다.
「소요유편」에서 말하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육기(六氣)의 변화를 다스리며 무궁의 세계에 소요하는 사람”은 즉 우주와 합일한 사람이다.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가 “자아가 없고”, “공적이 없고”, “명성이 없기” 때문인데, 무엇보다도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지인(至人)이라 한다. 지인은 어떤 처지에서든 간에 자득(自得)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이것이 소요(逍遙)의 극치이다.
이것이 장자학의 신비주의이니, 장자학이 사용한 방법은 인식의 측면에서 모든 분별을 없애고,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학의 방법은 위진(魏晉) 이래로 다시 거론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장자학에서 무척 특이한 점은 그 신비주의는 유심론적 우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 역시 장자학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합치한다.

 

9. 장자학과 양주의 비교

이로써 보건대, “은자(隱者)”나 “양주(楊朱)” 등이 “전생보진(全生保眞)”의 방법으로 은거(隱居)와 피세(避世)를 고집한 것은 천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생을 같은 일로 여기고, 옳고 그름을 한통속으로 여길” 수 없다면, 인간세상[人間世]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회피하든, 결국 완전히 “화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풍우란이 말하는 장자사상은 주로 곽상의 주를 의지하여 해석한 장자사상인 것 같다. 물론 위진 시대 곽상이 편집한 『장자』 판본이 후대에 주로 유통되어 장자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순응함으로써 절대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니 타고난 자신의 분수를 받아들이고 살라는 곽상의 입장은 주어진 환경과 사회를 아무 비판없이 수용하라는 말로 들려 많이 거북했다. 분명 세상에는 차별과 차이들이 있는데 이를 없는 듯이 여기라니.

 

그리고 풍우란은 도가사상이 양주-노자-장자로 이어지며 발전했다고 보는 입장이나, 옹달쌤은 장자와 공자 사상의 연관성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하였다. 우리는 당연히 맹자가 공자에 대하여 당연히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맹자』에 그려진 공자의 모습보다 『장자』에 그려진 공자의 모습이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 사상의 적통은 순자로 볼 여지가 더 많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왕으로 상징되는 중앙권력 내부로 들어가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고 싶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와 처음부터 중앙권력 내부로 들어가려는 뜻이 없이 변방에서 살았던 장자는 삶의 변두리성이라는 면에서도 닮아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노장철학 혹은 도가사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사상과의 연관성, 유사성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도가사상에 접근했는데, 옹달쌤에 의하면 『장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로 목수, 바퀴 깎는 노인, 소 잡는 백정 등임을 볼 때 장자의 생각들은 농경사회 농부들의 삶에 기반하기 보다는 오히려 도시 변두리 기술자들의 삶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 공부한 노자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이 ‘군주의 통치술’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은 점을 볼 때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지금처럼 노장사상이니 도가니 하며 한 범주로 묶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드는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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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현님의 댓글

저도 백조님께서 후기에 쓰신 것처럼, 풍우란이 본 장자는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분수에 맞게 딱 그만큼에 만족하고 살아라, 라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그보다는 저도 기픈옹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위치성(변두리성)을 보면서
 논어와 장자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지난 수업 때 많이 했습니다.
지난 주에 순자 이야기를 조금 들어서인지 이번 주, 순자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ㅎㅎ
2주 만에 뵙겠어요. 담주 세미나 시간에 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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