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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불교를 철학하다_7.분별, 8.중도 :: 0512(토)
샐리 / 2018-05-15 / 조회 826 

본문

제 7장. 부처는 똥이고, 소음은 음악이다

분별: 척도의 권력과 타자성

2018. 05. 12 발제자 : 샐리

1. 분별, 선택 이전의 선택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 

  중국의 선사들은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불도의 근본이라고 말함.

- “분별력이 없다.” = 기본적인 판단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비난? ≠ 구별

- 분별 : 똥을 보고 ‘더럽다’, ‘깨끗하다’ 같은 관념을 붙여 판단하는 것.  호오와 미추같은 ‘이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인식. 

  이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인식이란 점에서 분별은 인식이라기보다는 재인식이고, 호오의 판단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점에서 

  ‘구별’이라기보다는 ‘선별’. 

- 왜 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인간의 판단능력은 동물적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고, 분별 역시 동물적 본능에 속할 수 있음. 

  그러나 문제는 그런 감정은 너무 단순해서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을 막아버리고, 분별은 너무 빨라서 생각하기 전에 판단한다는 것.

  때문에 분별은 좋아하는 것이면 생각없이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고, 싫어하는 것이면 생각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게 함.

 

2. ‘옳은 것’의 힘

- 모든 분별은 척도를 갖고 있음. 분별이란 그 척도의 힘, 척도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 

  ex, 예쁜 얼굴에 대한 분별의 척도는 성형수술이라는 물리적 권력마저 행사

- 각자가 잘 안다고 믿는 것, 확실하다고 확신하는 것일수록 다툼이나 논란이 해결된 가능성은 작음.

- 아상 :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들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세상사를 보는 걸 당연시하고는 그것으로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 ‘정견’이란, 옳은 견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견해를 내려놓는 것.

  ‘정사유’ 또한 ‘옳은’ 것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의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분별은 개인적으로 행해질 뿐 아니라 사회적‧집합적으로 행해짐. 분별의 척도가 사회문화적으로 습득된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맛에 대한 감각은 물론 미감이나 옳고 그름의 기준도 많은 경우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음. 이것이 ‘재난’이 되는 경우가 있음. 

  ex. 야수와의 전쟁

 

3. ‘초경험적 경험’, 혹은 분별을 넘어선 분별

- 흔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음. 인간은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 숙련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처리하고 있음.

- 분별 또한 생각 없이, 생각 이전에 간택하는 것. 따라서 분별은 생각해야 하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 알아야 하지만 알 수 없는 것과

  만날 때 정지되며, 그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생각이 시작됨.

- 들뢰즈, ‘초험적 경험론’ : 경험을 넘어선 경험을 강조하는 입장 → 분별을 ‘넘어선’ 분별이 시작되는 지점.

- 분별심을 내려놓는다 = 타자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 

  =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만났을 때,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

- 배를 띄우려고 하는 사람에겐 깊은 물이 더 좋고, 물을 건너려는 사람에겐 얕은 물이 더 좋은 법. 

  그렇기에 분별을 떠난 사람 또한 어떤 조건에서는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음.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소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분별을 하게 됨. 

 

 

제 8장. 극단보다 더 먼 ‘한가운데’

중도 : 중도의 존재론, 파격의 논리학

 

1. 있으면서 없는 것

- 데카르트, 진리의 기준 = 명료함(개념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음)과 뚜렷함(외연이 확실하여 내부와 외부가 확연히 구별됨) 

  = 유무의 양변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하게 하려는 것.

- 명료하게 할수록 뚜렷함이 사라져 모호해지기도 하고, 뚜렷하게 할수록 명료함이 사라져 애매해지는 경우들이 있음

  (ex. 오케스트라). 

- 더 나아가 유무마저 가리기 힘든 것들이 있음. 최근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는 정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사건을 상상으로 구성하여 만들어낸 사건이고 상처 ⇒ 이 경우, 트라우마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 오케스트라의 소리나 운동하는 물체, 입자성과 파동성을 갖는 입자, 음악적 선율 같은 것은 모두 있음과 없음의 이항대립(양변)을

  떠난 중도가 일종의 존재론적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임을 보여주고 있음.

 

2. 중도와 중용의 차이

- 여장을 한 남자를 구별하는 것은 쉬우나, 이로써 참과 거짓을 가려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가 왜 남자이면서 여장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됨. 그저 ‘거짓’이나 ‘악’과 같은 범주를 들씌우고 말 뿐.

- 손쉽게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선한 이와 악한 이’를 구별하여 모든 일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판단하는 것은 

  흔히 행해지고 있음. 그러나 안목 있는 사람,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명백함 속에 가려진 

  안타까운 사정을 뚜렷하게 볼 수 있음.

- 중도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 

  분별을 떠나는 게 호오나 애증의 ‘감정’을 떠나 사태를 보는 것이라면, 중도는 이항적인 두 극단의 ‘범주’를 떠나 사태를 보는 것.

- 중도≠중용(지나침과 부족함, 과다와 과소를 피해 중간을 취하는 것). 중간이나 중용은 극단을 반쯤 떠나는 것. 

  석가모니는 양극단뿐 아니라 가운데 또한 떠날 것을 설했음. 

- 중도는 어떤 문제나 사태에 적용되고 관철되어야 할 ‘사유의 방법’에 가까움

  (ex. 중도의 논리는 적과 친구를 정의함에 있어, 적에게서 배울줄 안다면 적이 적인채 그대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보고 있음). 

  ‘부처란 이런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한, 부처는 수행이나 사고의 진전을 가로막는 마구니가 됨을 봄. 

  부처와 마구니의 양극단을 가로지르는 횡단적 사유, 그것이 중도의 사유가 됨.

 

3. 파격의 논리학

- 변증법이 대립되는 두 개념을 ‘화해’시켜 종합적인 중간을 만들고, 거기에 ‘더 높은 것’의 자리를 마련한다면, 

  중도의 횡단적 사유는 두 개의 이항적인 개념 모두가 무의미해지는 궁지로 몰고 감. 

  개념적 구별을 떠받치고 있는 암묵적 가정이나 근거를 깨버리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가라도 떠밀어버리는 것. 

- 중도의 사유는 사유를 선규정하고 제한하는 틀, 인식의 격자를 깨부수는 파격의 언행이란 점에서 차라리 ‘반논리학’이라고 

  해야 할 것. 또한 사유의 틀을 깨주기 위해 수많은 선사가 반복하여 사용한 파격의 방법이란 점에서 ‘파격의 논리학’이기도 함. 

- 석가모니께서 했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놈의 주둥이를 찢어 개에게 

  던져주었을 것이다”라는 운문 스님의 충격적인 대답. 이는 불조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옳다고 믿고 그럴듯하게 해석하려는 

  틀에 갇힌 사고를 깨려는 것. 

- 파격의 논리학으로서 중도의 사유는 어쩌면 중간의 균형을 취하는 게 아니라, 개념에 달라붙은 균형을 깨고 

  양변보다 더 먼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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