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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후기] 불교를 철학하다. "분별이 나에게 주고간 것" +2
후니크 / 2018-05-15 / 조회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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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음이고 분별하지 않는 삶이라는 관념이 이해되어 [후기]를 쓰는 동안 작성완료를 누르기 직전까지는 고민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후기]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는 이 글에서, 혹여나 내 무의식은 그 나름대로 정해진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를 쓸테고, 머리에서는 익숙한 말들을 키보드로 채워넣으라는 명령을 손으로 보낼테니까요.

 

평소 욱하기로는 어디에 두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제어가 어렵다고 말하면 다들 오해하실터이니,

익숙하지 않거나 그러한 상황이 닥치면 무의식에서 자리잡은 '욱'이라는 관념으이 작동하는 편이라고 말씀해두겠습니다.

최근에, 최근까지 이 부분이 고민이었는데,

놀랍게도 책을 읽기 전 같이 공부하는 샐리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죠.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날 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침착할 수 있는지"

이 후기에 채워질 내용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자 이를 사회복지를 통해 설명해볼까 합니다.

예전 대학시절 전공지식을 머리에 채워 넣는 동안 수 많은 진심과 탐심이 작동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전공생 대다수가 사회복지를 '노인복지', '아동복지', '청소년복지', '장애인복지'라는 식으로 분류해서 사유하거나 '나랑 저 분야는 맞지 않아'라는 분별이 작동했을 그 시점을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줄곧 사람들은 사회복지라는 전공이 마치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그 누군가를 클라이언트라고 정의내리게 됩니다. 타자들을 대상화시키려면 수단이 필요했고 비로소 '사회적약자', '취약계층'등의 분류를 생산해 그 틀안에 집어넣기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위에 말한 생각들이 자연스러웠고 누구 하나 이견이 없었기에 저 또한 그 시절을 지내왔습니다.

물론 일말의 경험들을 또 다시 제 척도로 분별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시절 우리들에게 분명한 점은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일수도, 학교에서 생겨났을 수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개인들의 기준이었을 수도 있는 그 경험들 속에 사실은 진심과 탐심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이렇게 분별과 관념들이 제 자리인냥 우리들의 머리 속에,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일 수 없겠지요. 

저는 진심과 탐심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의심을 시작해야 한다고 답을 내렸습니다.

 

간택하지 않는 삶, 분별하지 않는 삶 속에서 우리는 간택하지 않을 수도 없을 뿐더러 분별하지 않기란 어려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의심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이 들지?'

'왜 나는 저게 싫다고 생각하는 거지?'

'지금 겪은 것들은 별로인데, 나는 왜 별로라고 생각하지?'

 

단순한 질문들만 나열했지만 나름대로 순서가 있습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이 들지?'​ -> (1)감정을 파악

'왜 나는 저게 싫다고 생각하는 거지?' ​->  (2)감정의 원인을 파악

'지금 겪은 것들은 별로인데, 나는 왜 별로라고 생각하지?'​ -> (3)감정의 주체인 나를 파악

 

예전 시절을 떠올리며 의심을 교육과 학교의 문제로 돌리며 상세히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따분하실터이니 

이제 슬슬 정리하겠습니다.  

의심을 통해 질문하게 되고 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론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욱'하는 저의 관념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진심과 탐심을 넘어 의심이라는 도구로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되었습니다. 불편한 상황과 마주해서 관념이 '욱'을 작동시키라는 분별을 일으켰을테고, 그렇다면 그 관념과 분별을 바라보자는 생각이지요.

기존의 지승훈 프로세스가 단순한 사고의 편의성에 의해 [불편하다 -> 화가 난다 -> 화를 낸다] 였다면

[불편하다 -> 화가난다 -> 왜 화가 날까 -> 내가 저 사람에게 화가 났구나 -> 화를 낼지 말지 "결정" 한다]

로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추가하는 것 만으로도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머리 속의 익숙하게 자리잡은 진심과 탐심을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혼자 고민하며 생각한 방법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아참, 샐리가 했던 대답은 

"책 읽어보세요"


였습니다.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할 수 있는 답을 찾고자 했음'은

결론적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생겨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금주 세미나에 가서 코뮨동지들과 얼른 생각을 나누고픈 마음이 드는 이 밤이네요. 

댓글목록

라라님의 댓글

라라

훈~ 오랜만이예요. 후기 잘 읽었어요.
저도 욱하지 말고 왜 화가 날까~ 내가 저 사람에게 화가 났구나~라고 바꾸어 생각해 볼게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1.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다람쥐는 귀엽지만 쥐는 징그럽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물에 대한 오호(좋고 싫음)와 미추(아름다움과 추함)의 분별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호미추의 분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나의 감각이나 인식에, 사물에 대한 오호미추가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를 보아야 합니다!

2.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인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그의 행동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 차앞을 끼여드는 차를 보고, 우리는 "그가 얌체같거나 무례하거나 혹은 나를 무시한다든가" 하는
생각에서 화가 나고, 그래서 크락션을 울리거나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는 주먹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끼여든다는 생각없이 끼여들었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미안함을 무릅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행동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 이것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가로막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보는 나의 판단에, 타인의 어떤 의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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