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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불교를 철학하다: 14장 십이연기 +1
박사 / 2018-06-02 / 조회 873 

본문

<십이연기>

 

연기법: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남. 

십이연기: 생과 사, 늙음 등 열두 개 사태들의 연관을 연기법에 의해 포착하여 설명함.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 

 

1. 무명: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를 어찌할 것인가. 

포착되기 이전의 세계, 지혜가 작용하기 이전의 세계. 지혜와 무지 이전에 있는 것. 

애초에 주어진 세계. 무상하게 변화하는 세계 그 자체. 

무상한 세계란 무상한 변화가 무수히 많은 층으로 중첩된, 무한 속도로 변하는 세계. 

무명은 그 자체로 무지를 뜻하지 않지만, 무지를 낳을 수밖에 없다.=지식의 불가능성.

지혜란 그런 지식을 확장하여 얻어지는 게 아니라 무상이라는 바로 그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 

 

2. 행: 태초에 행동이 있었으니라. 

무언가를 하는 것.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 

관성, 타성, 습, 행 

행동, 행동을 낳는 의지는 생각이나 인식 이전에 존재하고 발동한다.  

생각 이전에 작동하는 의지를 보통 ‘충동’이라고 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작동하는 성분이다. 

흔히 ‘맹목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생존의 지속’을 명확한 목적으로 갖는다. 

무명은 행이 발 딛고 서 있는 조건, 생명체의 충동이 헤쳐가야 할 조건이다. 

살고자 하는 충동은 ‘행’을 발동시키고, 

행은 알고자하는 의지를 발동시켜 ‘식’을 가동한다.

 

3. 식: 동물 이전의 인식능력

생명체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것을 묶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 연결한다.

무명의 카오스와 다른 질서의 세계, ‘코스모스’를 구축한다. 

무상한 속도를 감속하거나 고정시키며 얻는 그때그때의 판단이나 그 자원이 되는 정보.

실상의 어떤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실상과 분리된 “무지”.

그러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에서 필연적 무지, 유용한 무지다. 

육처 이전의 식, 육식 이전의 식: 미생물, 세포 수준에서 존재하는 식. 

(육처:중생이 모태에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을 갖추어 태어남을 이른다.

육근: 육식(六識)을 낳는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근원.

육식:육근(六根)에 의하여 대상을 깨닫는 여섯 가지 작용.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을 이른다.)

 

4. 명색: 안팎의 식별이 ‘나’를 만들고. 

육처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환경과 개체의 만남-반복되는 만남에 대한 지각과 포착-그럼으로써 발생하고 발전한 지각능력과 그것에 의해 포착된 판단들. 

식이란 언제나 식별능력이 자신의 환경과 만나는 사건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신체에 발생한 변용이다. 

환경에 대한 적절한 행의 방식을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과 내부에 속한 것을 구별하려 한다. ‘나’는 식별작용을 수행하는 성분이고, 식별된 내용은 대상이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나와 대상, 나와 세계로 분할된다. 

나와 세계의 구별은 ‘나’라고 부를 의식이나 영혼 이전에, 세포적이고 분자적인 수준에서 행해지는 이 내부와 외부의 구별에서 연원한다. 

나와 외부를 구별하는 이러한 분할은 이제 ‘나’자신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색:물질적 성분을 갖는 모든 것, 감지 가능한 물질성을 갖는 모든 것. 

명:그러한 문질성을 갖지 않는 것. 만질 수도 볼수도 없지만 만지고 보며 작동하는 인지작용과 그런 인지작용을 하는 성분. 

 

5. 육처: 이유있는 허구의 여섯 시종들. 

‘아상’은 식과 육처 사이에 있다. (‘명색’)

육처에 속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 각각의 작용은 그 자체로는 나름대로 식을 형성하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통로지만, 의식은 다양한 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의식은 ‘나’라는 관념과 떼기 힘들게 결합되어 있다. 

육처에 함축된 감각기관의 개념은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유기체라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다. 

식을 조건으로 하는 명색의 식별이 ‘자아’를 형성한다. 

자아나 아상이란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가 갖거나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념’이 아니다. 

의식 이전에 작동하는 무의식에 속하며,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신체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세포적 내지 분자적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아가 실체임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한 나의 경계선, 실체적인 경계는 없다. 

육처 이전의 식이 유기체라는 통합적 전체가 발생하기 이전의 식이라면, 육식은 유기체의 기관이 발생한 이후의 식이고, ‘자아’라는 허구적 전체가 발생한 이후의 식이다. 

 

6. 촉:있어도 만나지 못하면 없는 것이니.

육처를 조건으로 접촉이 발생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작용이 발생한다. 

촉이란 만남이다. 보고 듣는 것, 냄새를 맡고 느끼는 것 모두 만남이란 사건을 통해 우리가 감지하는 것이고, 그렇게 감지하는 방식으로 어떤 만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지적인 지각이나 앎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발생한다. ‘생명’내지 ‘생존’이라고 불리는 과정과 결부된 것이다. 

저것이 약인지 독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만남이다. 만남이 만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 

 

7. 수: 기쁨과 슬픔의 자연학. 

만남은 만나는 것들을 산출하고, 그런 만남 속에서 어떤 변용을 야기한다. 

만남에 의해 발생한 변용을 감수작용이라고 한다. 

지각이나 인지작용과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느낌’같은 것. 그런 인지작용 속에 동반되는 쾌감이나 불쾌감, 기쁨이나 고통 같은 것. 

신체나 정신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과의 만남은 쾌감을 주고, 감소시키는 것과의 만남은 불쾌감을 준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분별작용. 

 

8. 애: 분별심은 왜 지혜 아닌 무지로 인도하는가

느낌은 의식의 방향을 설정한다. 실제 만남 이전의 선판단을 불러온다. 

‘좋음/나쁨’이 자연학적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범주로 독립하게 되면 실제 접촉이나 만남과 무관하게 ‘대상’에 달라붙어 실제 만남의 실상을 놓치게 된다. 

탐진치의 삼독심에서 ‘치’의 기원.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선판단을 중지하고,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 

‘지혜’란 선판단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올바른 판단, 분별심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정확한 분별이다. 

‘좋음/나쁨’은 ‘좋아함/싫어함’ 즉 애, 증으로 발전한다. 

좋아하는 것을 잡아당기는 마음이 탐심,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는 마음이 진심이다. 

탐심과 진심은 고통을 야기한다. 좋아하는 것과 멀어지는 고통, 싫어하는 것과 다시 만나는 고통.

 

9. 취: 가지려는 마음의 수동성

촉은 종합이고, 애는 그렇게 종합된 것을 향한 마음이고, 취는 무언가를 가지려는 마음이다. 

새로운 종합은 중단되고, 하나의 종합을 편집증적으로 반복한다. 

의식 이전의 욕망이다. ‘수동적 종합’

자아 성립 이전의 고착에 의해 발생하는 취착과 자아가 성립된 이후에 발생하는 취착으로 나뉜다.

 

10, 11. 유/생: 생성보다 존재가 선행한다는 믿음이라니 

무상은 어떤 대상에 취착하여 달라붙어 있는 것을 의미없게 만든다. 

취착하는 마음은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주기를 욕망하게 된다. 취착을 조건으로 유가 생겨난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유란 무상한 생멸의 변화의 한순간을 억지로 멈추어 세운 상태. 

무상이 고통의 이유가 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취착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생멸은 그런 ‘유’가 달라져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유와 무는 생멸이라는 현상의 두 극단을 표시하는 개념일 뿐. 생멸하는 것의 어떤 한 상태가 ‘유’다. 

생멸하는 것의 어느 한 순간을 억지로 멈춘 것이 ‘유’인데, ‘유’가 있고 그것이 생멸한다고 뒤집어 생각함. 

 

12. 노사: 고통과 두려움이 그려낸 생의 초상화.

무명에서 시작해 노사로 끝나는 십이연기는 무상한 세계의 실상에서 시작해 그 무상한 세계를 ‘노사’라는 상실의 고통으로 느끼는 과정에 대한 해명이다.  

 

십이연기의 전반부는 생명체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발생하는 ‘자연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무명 앞에서 생존에 필요하고 유용하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무지를 낳는다. 내외를 구별하고, 나와 대상을, 신체와 정신을 구별하는 작용이 반복되면서 내외를 가르고 나와 대상을 분할하는 경계선을 실체화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불가피한 무지다. 

 

그런 지식이나 인식을 다가오는 사건들에 덮어씌우며 판단하게 될 때 무명의 카오스에 기인하는 근본적 무지와 다른 차원의 무지가 발생한다. 접촉과 촉발이 야기한 감수작용에 애증의 마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탐진치가 우리의 삶에 침투하게 되는 순간. 

애로부터 이어지는 십이연기 후반부는 생명체의 자연적인 의지를 뜻하는 욕망의 과정과 달리, 그 욕망에 애증과 분별의 마음이 더해진 ‘작위적인’욕심의 과정을 다룬다. 

 

탐진의 마음, 취착의 마음이 야기한 생각 안에서 생이란 오래도록 갖고자 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대상이 되고, 죽음이란 밀쳐내고자 하지만 결코 밀쳐낼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이런 마음 안에서 생이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과정이란 의미에서 ‘노사’를 뜻한다. 죽음의 공포로 인한 고통이 모든 생의 순간을 채우게 된다. 

이런 점에서 ‘노사’의 관념은 접촉과 촉발의 자연학적 반응에 애증의 마음을 덧붙이기 시작하며 출현한 새로운 차원의 고통이 집약되는 최고의 고통이고, 모든 생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본원적 고통이다. 

 

생성의 과정 가운데 선택된 하나의 우연적 만남이 유라고 명명된 것임을 안다면, 거꾸로 그렇게 무언가 만나서 함께 하고 있는 우연적인 순간이야말로 우리 생 전체이고, 우리의 생을 직조하는 것임을 기쁘게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여래’라는 말은 이처럼 연기법을 깨닫고 연기적으로 오고 가는 모든 것을 선물로 긍정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댓글목록

소소님의 댓글

소소

잠재성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무명)와 드러나려는 어떤 의지(행)가 만나,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식) 하는 생명이 세상에 드러나고(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명색) 사이에 ‘나’라는 구분을 가지며,
유기체로서 작동하는 여섯 감각기관(육처)으로 대상과 마주쳐(촉)
쾌와 불쾌의 느낌(수)을 발동 시킨다. 이것이 탐심과 진심(애)으로 야기되고,
탐심에 의해  어떤 것을 고정화하려는 믿음에서(유) 소유하고자(취) 하지만,
생멸하는 세상에서 실오라기 하나 취하지 못하고 죽는(노사) 것이 존재의 섭리임을 깨닫는다면
삶과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게 드러난 고마운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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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로 계산할 수도 없지만 확률로만 따져도 우리가 세상에 드러난 건
로또당첨 될 확률보다 낮은 우연성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존재들과의 마주침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인지...
바꿔 말하면, 경이로운 사건(마주침)으로 삶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또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사람과 만나고, 사물과 만나고, 그렇게 무수한 존재와 만나야겠습니다.
이것이 니체식으로는 대단한 예술이 아니어도 창조이고 생성이겠지요.

박사님의 발제, 비록 몸은 함께 못했지만 먼 곳에서나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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