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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오픈세미나] 차라투스트라가 뭐랬다구? :: 후기 +13
오라클 / 2018-06-06 / 조회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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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sprach Zarathustra [니체 오픈세미나] 차라투스트라가 뭐랬다구?

일 시 : 2018-0604(월) pm7:00 ~10:00 

회 원 : 람스, 모로, 바르사, 빠른거북이,  소소, 엇결과순결, 에피파니, 연두, 오라클, 올리비아 (모두 10명)​

손 님 : 기픈옹달, 라라, 마시멜로, 모덕승, 삼월, 샐리, 오성학, 이미지, 준민, 지승훈, 최은영, 케테르 (모두 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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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월 ~ 2018.5월까지 6개월간 [차라투스트라]를 함께 읽은 우리들은 어떤 의미화가 필요했지요.

함께 '에세이'를 쓰고, 그것으로 '오픈세미나'를 여는 것이 이러한 의미화작업이었습니다.

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더이상 돌아올 수 없게 만들었던 보다 높은 인간들의 '나귀축제'처럼,

우리의 오픈세미나가 이런 웃음과 역설로 가득한 시간이었기를, 여러분과 함께 즐거웠습니다.

 

 

모 로 :: 패터슨시의 패터슨씨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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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을 허무주의로 함몰시키는 주범은 매일 반복되는 의미 없는 노동이다. 하지만 패터슨 씨에게 버스 운행은 새로운 우연을 맞이하는 기회다. 무심한 표정이지만 실은 아이들의 할로윈 분장 계획, 어느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남녀 대학생의 대화, 두 남성의 시답잖은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일이 놀이가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할 것 없는 그의 노동, 버스 운행을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3부 ‘해돋이에 앞서’ 中)’의 경지로 둔갑시킨다.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현대인들이 꼭 고양해야 할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산책길에 마주친 시시껄렁한 힙합퍼들, 일상의 예술가인 세탁소의 래퍼와 꼬마 시인 그리고 패터슨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바 주인, 실연남 에버릿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주로 경청하는 쪽이다. 이들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아서 순진무구한 우연(3부 ‘감람산’에서)’들이다. 이들을 포착하기에 그는 반복적인 일상에 변주를 생성할 줄 안다. 

 

오라클 :: MeToo사건과 위버멘쉬의 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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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의 담론구조는 MeToo담론의 일반형태이다.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 담론은, 권력형 성폭력이 성의 문제 이전에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약화시킨다. MeToo운동의 창시자인 타라나 버크는 MeToo운동은 여성운동이 아니며, 남성들은 적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남녀대립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MeToo는 성폭력을 겪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여성운동이 아니다. 많은 희생자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MeToo운동의 주요동력이지만, 케빈 스페이시를 고발한 소년이나, 성폭력에 직면한 수백만 남성들을 배제할 수 없다. 남성들은 적이 아니다! 남녀 간의 대립을 불러와서는 안된다.”

다음, ‘가해자는 강자, 피해자는 약자’의 담론구조는 MeToo담론의 한계지점이다. 더욱이 피해자성 혹은 약자성이 MeToo폭로자를 정당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성과 약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MeToo폭로자를 보호받아야 할 신체로 규정하고 MeToo운동의 주체로 서는 것을 가로막는다. MeToo폭로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며, ‘억울함의 호소자’를 넘어 이제 ‘잘못의 폭로자’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자리에 있는 동안 그들은 보호받아야 할 약자였으나, MeToo폭로자의 자리에 서는 순간 이들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자가 된다. 타라나 버크 역시, “우리는 매우 구체적이고 신중해야 하며,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해야 한다”고 MeToo폭로자의 태도를 말한다.  

 

바르사(Varsa)​ :: 니체의 영원회귀 사유와 시간성에 대한 소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현대인들이 아무런 의미도 목표도 없이 존재자들을 지배하고 남용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플라톤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장된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힘의 의지’에 근거한다. 그리고 영원회귀의 출발점은 과거와 미래가 충동하고 있는 순간을 영원화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충돌은 자기 자신이 순간으로 존재하는 그런 인간에게만 발생한다. 인간이 순간으로서 존재할 때, 미래를 향해 자기 삶을 행위하고 과거를 긍정하고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서로 마주보며 그 양방향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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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거북이 :: 신의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

우리는 최근 촛불집회, 미투운동을 통해 함께 손을 잡아왔다. 작은 불씨를 놓치지 않고 불씨를 이어 받아서 큰 불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불씨가 세상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아왔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삶을 아프게 해왔고 실망시켜왔지만 결국 나(우리)는 나를 변화시키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믿는다. 우리 작은 신들은 작아서 보잘 것 없지만 작아서 함께 하는 순간 강력하다. 

우리는 촛불을 들고, 용기를 들고 춤을 춘다. 신이 잔인하게 살해된 자리에서 신의 시체를 둘러싸고 함께 손을 잡고 원형으로 둘러싸며 춤을 춘다. 우리가 벌이는 이 축제를 통해 우리는 살아있는 신들을 만난다. 구원은 나에게 있다, 내 손을 잡은 너에게 있다. 함께 춤을 추는 우리에게 있다. 우주는 오늘도 가속팽창하고 있다. 거대한 우주의 일부인 우리는 그만큼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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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Olivia)​ :: 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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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교리가 적혀있는 낡은 석판들을 파괴했다. 세상이 나에게 세워준 가치와 기준들이 사라지자 길이 사라진 것처럼 막막하고 두려웠다. 내 힘으로 길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러자 이제 내 눈앞에 수만 개의 ‘가능성’의 길이 새롭게 펼쳐졌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힘의 의지가 만들어낸 혼돈을 수용해야 한다.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은 나도 힘의 의지의 주체인 것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녔다. 나는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고 그로 인해 현재와 미래도 바꿀 수 있다. 남이 보편가치로 나에게 선악을 정해줄 수 없으며, 내가 정하는 가치의 good과 bad만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나의 총체적인 good을 추구하는 god이다.

 

엇결과순결 :: 가구 만드는 남자의 니체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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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현재, 나는 가구학교라는 곳에서 가구 만드는 남자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집에서는 요리와 청소 등 모든 살림살이를 더불어 수행하고 있다. 어느새 ‘요리하는 목수’라는 가족들의 별명도 얻게 되었다. 하는 일의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관계에서도 내가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생겼다. 아들과는 이제야 진정한 친구같은, 함께 인생을 – 이성교제 문제, 삶의 태도, 가치관 등 –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아내와는 점점 더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는 –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고립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 경험도 하고 있다. 

나는 니체가 이끄는 대로 읽고, 생각한 대로 걸어온 길이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큰 변화인가 보다. 만나는 이들마다 한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걱정 어린 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오곤 했다. 이제부터 지난 3년간의 여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 에세이는 니체가 이끄는 도량에서 보낸 그 간의 여정을 정리해보고, 훗날 내 마음이 다시 흔들리게 될 때 스스로를 부여잡을 수 있는 밧줄 하나를 마련하려는 작은 시도이다.

 

윤영주(연두) ::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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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걷는다. 매주 남산을 걷던 나의 신체는 매일 나를 집 앞 공원으로 이끈다. 걸으며 일상의 리듬을 만든다. 발걸음을 조정하며 텍스트를 곱씹기도 하고, 치열했던 세미나의 토론을 떠올리도 하고,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다르게 보기도 한다. 다리가 생각한다. 빨리 걷다가 잠시 달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순간엔 잠시 멈추거나 벤치에 누워 기분을 낸다. 그렇게 나의 영토와 호흡을 맞춘다. 그렇게 나를 돌본다. 

나를 돌보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보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가벼워지려고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기예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교묘하며, 궁극적인, 그리고 가장 큰 인내를 요구하는 기예다. 언젠가 가볍게 날아보련다. 지금은 걷는 것이 내 속도이고 능력치이지만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힘에 부치는 것은 바라지도 말라고! 능력 이상을 바라면 고약한 속임수가 있어 자신마저 속이게 된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 다리에 의지하리라. 내 다리는 정직하니까.  

 

소 소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때, 불현듯 “나도 저 하나의 빗방울이겠구나” 싶은 어마어마한 생각이 스쳤다. 내 삶을 만배속으로 돌리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저 떨어지는 하나의 빗방울이 지상에 부딪쳐 소리를 내면서 파동을 일으키고 곧 흩어지는 찰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아,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수많은 빗방울 소리만큼이나 다양한 소리와 파장(힘)으로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이 의식의 흐름은 내 생의 전부를 찰나로 존재하는 작은 빗방울 속에 넣었다가, 이번에는 이 수많은 빗방울이 내 하나의 생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삶은 힘을 가진 빗방울들이 지상과 마주쳐 내는 소리와 파장들의 찰나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하나의 작은 빗방울 같은 생명존재의 삶이 실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엄청난 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체의 것이, 생성과 소멸로 존재하는 ‘생명이 가지는 힘의 의지’였다. 나는 생명 자체였다. ‘내가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았던 것’이다. 순간, 니체의 정오처럼 나의 세계가 완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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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파니 :: 교육자 니체를 만나다: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고등래퍼2> 하온의 인터뷰를 보면서 갑자기 조앤 롤링의 일화가, 그리고 에피파니의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다. 하온 역시도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본질과 임무를 현시하게 되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출구를 찾은 이후로 하온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은 점차 긍정의 감정으로 변화해 갔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당당히 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중력의 정령들을 이겨내고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된 후 그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하온의 변화를 보며 오늘 나는 새로운 가능성의 통로를 발견했다. 위버멘쉬로의 가능성을! 그리고 우리의 멘토 차라투스트라와 하온은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너의 운명을, 너의 삶을 사랑하라고! 너에게 던져지는 모든 주사위들이 모두 네가 선택했던 결과였고, 그것이 너에게 최선의 결과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도록!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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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 스 :: 니체와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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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그의 중반기 창작시기를 통해 거대한 신화를 도입시켜 일종의 새로운 자기 의지의 세계를 창출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불가능성의 창작의 세계에서 혁명을 주도하였고 신화라는 계몽의 확산을 그의 작품 안에서 재창조하였지만 니체에게는 이 커다란 전율과 도취가 대중을 조작하려는 과거의 유산이라 치부하였다. 이제는 바그너가 구원이나 위안으로서의 음악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음악으로 선언하는 것이지, 목적에 필요한 어떤 형식적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극작가로서 극장기획자로의 바그너는 어떤 형식의 예술가로서의 월등한 우위에 위치하기에, 어느 정도 니체의 유아적 질투를 불러온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니체는 열정과 창작의 최고점의 시기, 1880년대 후반에 그렇게 사랑했던 바그너에 대해 무분별한 파시즘적 성경을 재창조하고 무의식, 충동에만 작동하는 비판에 집착한다. 결국 바그너의 대한 비판은  대립적 가치평가보다는 혼란스럽기만 한 평균화의 가치하락을 불러온다는 점이 명확하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니체세미나 회원들이 마지막 소감을 묻는 것에 별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전부이므로 더 남은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

공동체는 무엇보다 '공동의 신체'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우리가 '니체세미나'라는 공동의 신체로, 한몸처럼 움직였던 체험입니다.
함께 했던 공부, 같이 썼던 에세이,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 한 나귀축제 '오픈세미나'까지
이는 공동의 신체를 만들기 위해 공동의 리듬과 공동성을 생성하는 요소들이었겠지요.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살면서 어렵게 체험하는 귀한 것이니, 우리 모두 신체에 새기도록 합시다.
이 경험이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하는데, 그리고 공동체를 긍정하는데 중요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코뮨주의자이고, 앞으로도 코뮨주의자일 것입니다. ^.^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우리가 만들어간 '공동의 신체'는 참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 식으로 기분을 많이 냈던 것 같아요.
제가 세미나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아마 차라투스트라 텍스트가
그 상승과 하강의 경험을, 심연과의 마주함을 격렬하게 함께 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공동성이 자연스레 더 강하게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귀한 경험이었고, '한 번 더!'를 외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니체적 강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로망이 생겼습니다.
'고독 속으로 물러나라', '연민의 정을 조심하라', '그냥 지나가라'를 그렇게도 강조하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텍스트 외부의 강자들의 공동체를 떠올리게 되는 재밌는 상황.

모로님의 댓글

모로

우리의 나귀 축제에 함께 했던 어떤 분의 소감처럼 우리들은 상처받은 자들일지 모릅니다.
세상의 잣대에 힘겹게 맞서느라 기력을 잃었고, 무던히 나를 지키느라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세미나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평온했고 즐거웠습니다.
월요일 저녁이면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우리들의 차라투스트라의 동굴.
그곳의 안락함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건강한 에너지를 나눠 준 모든 멤버분들에게도 고마웠다는 말을 전합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ㅎㅎㅎ
저는 초반 1/3은 차라투스트라의 말투에 적응을 못해서 힘들고
차라투스트라가 혼낼 때마다 찔려서 대부분 늘상 불편했는데.
ㅋㅋㅋㅋ

소소님의 댓글

소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여러분과 함께 읽었다는 건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 그 이상의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질병을 얻는 시간이였고, 건강을 되찾는 자기극복의 과정이였습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의 정오를 ‘읽은 것’이 아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각자가 갖는 능동적인 ‘힘의 의지’가 있었기에 차라투스트라의 긴 여정을 자발적으로 함께 할 수 있었겠지요..
니체는 위버멘쉬로 가는 교량으로서 인간을 말하지만, 저는 이 ‘힘의 의지’ 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삼 벅차고 설레는 요즘입니다.
이 능동적인 힘의 의지로 사람과 만나고, 사물과 만나고, 더 많은 존재와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6개월의 여정, 함께여서 저도 행복했습니다. :)

에피파니님의 댓글

에피파니

삶과 함께하는 철학자로 만나고자 했던 니체 였고 차라투스트라 였기에 이번 수업은 제게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던 여정이었던것 같습니다. 이곳에 모였던 모든 분들이야말로  자신 속에 춤추는 별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혼돈도  마다 않은 소중한 벗들이 아니었나 싶고요... 아직도  오역과 혼돈이 함께 하지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차라와 함께 저 또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저만의 가치와 길을 찾아 힘차게 발을 내딛어 보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게된 길에서는 자기기만일 망정 그 길이 최선이었다는 최면이라도 걸어보려합니다!

이 곳에서의 모든 여정과 신체에 각인된 모든 경험들...
하나 하나가 제게는 소중하고, 좋은 추억이자 훌륭한 에너지가 될 것 같네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나눠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모임 이끄시느라 늘 수고하신 오라클 반장님께 감사드려요^^

홍시님의 댓글

홍시

오라클~ 이렇게 보기 좋게 요리해줘서 고맙습니다. 이거슨 니체 소식지? 월간 니체 - 뉴스레터?  ^^

연두님의 댓글

연두

오로지 반복만이 차이를 생성할 수 있다.
차이와 반복의 관계에 관해 제가 요즘 눈뜨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날의 나귀축제에서 우리는 영원회귀에 관해서 또 얘기했었죠. ㅎㅎㅎ
영원히 영원회귀에 대해 얘기할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
차라투스트라야말로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영원회귀를 더 선명하게 깨닫고 위버멘쉬로 이행하잖아요.
제가 매일 걸으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된 내용이기도 하구요.
저는 그가 하강, 상승을 반복하고,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고독으로 물러나는 체험들을 통해서
위버멘쉬-되기를 수행하게 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들뢰즈가 오로지 차이나는 반복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고,
완전히 동일성만이 되돌아오더라도,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지더라도
이후엔 차이가 생성된다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네요!
니체와 들뢰즈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다고 오라클님이 한 얘기도 이해되요.

반복을 긍정한다는 것은 훈련, 시도를 긍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역량의 향상을 통한 도약이라는 것도 가능합니다.
니체는 삶을 도약과 변신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와 훈련의 과정으로 보고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그 가르침을 저희에게 준 것 같아요.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내가 되어 있는 방식으로 그랬다."는
그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날의 오픈세미나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제게 또다른 부모이자 스승.
그래서 책을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ㅋㅋㅋ
과연 다른 것이 보이더군요. 그 때의 제가 아니니까요.

그 날 즐거운 마음으로 나귀축제를 준비하고, 흔쾌히 에세이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마땅한 방식으로 자기를 비웃는 법을 잠깐 제 신체에 장착했기 때문이에요.

용기를 잃지 말라, 그게 무슨 문제라고!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마땅한 방식으로 그대 자신들을 비웃어주는 법을 익히도록 하라!
,
사람에게 있어서 더없이 먼 것, 더없이 깊은 것, 별처럼 더없이 드높은 것, 그의 엄청난 힘.
이들 모두가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에 맞서 거품을 내고 있지 않는가?

아, 지체 높은 자들 모두여!
함께여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함께여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었어요.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정말 많은것을 생각하고 깨닳는 6개월이였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였지만
혼자 였다면 절대 하지못했을 시간입니다.
에세이 까지 쓰니 더 깊은 깨닮음이 있었습니다.

니체 덕분에
나를 긍정하는 생각과 글이 전보다 분명해 졌음을 느낌니다.

반장으로 편집으로 고생하신 오라클님 감사하구요
다른 모든 세미나 회원들도 감사합니다.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축제를 통해 최고조에 달했던 몸과 정신이 급락하면서 열기를 식히고 있습니다.
기분좋은 쾌락은 나귀제에서 보냈고 이제는 다시 다음 등반을 위한 또다른 심연을 찾아야할 시점인것 같습니다.
그 심연 너머에 건너 오라고 손짓하는 이가 니체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의 동굴이, 우리의 공동체가 좋아서......
이 몰락의 시간을 무사히 마치고 여러분과 함께 다시 건강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있기를......

빠른거북이님의 댓글

빠른거북이

차라투스트라를 함께 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저는 이전에 니체를 따라 고독 예찬론자였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고독을 넘어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준 그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는 니체를 넘어서, 넘어서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에 빠져 있습니다.

람스님의 댓글

람스

창조자가 되는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머무는 돌이 아니라 다가가는 빛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 ,
데미안을 통해서 소개받은 니체의 창작력에 이번 시간을 통해서 또 한번 감탄 했지요.
항상 시간에  쫓기어 살기에  글들을 통해 니체와 나의 시간성을 비교하려는 시점이 다가왔었어요.

1 나의 시간 밀도,
2 비시대성의 시간들,

이런 것들을 다루어 보려 했지만 , 다른분들이 이미 선수 치셔서 ㅎ  ‘취향’ 이라는 니체의 단어에 집중하다가
바그너까지 다시 생각하고 들어보는 중요한 시간 이었죠.

취향 없이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결국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캐
한다 생각이 드는데요, 유행에만 급급하지 않은, 일정의 노력을 투시하여  그 진가를 끝까지 밝혀내는 겸허함을
갖춘 존재로서 ㅡ 뭐, 이런 과정을 니체가 곰곰이 고민해 봤던 게 아닐까요.

요즘은 ‘생각 좀 안 하게 쉬운 영화, 쉬운 음악 좀 듣자’ 라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던지요.
바쁘다는 이유로 기계화되는 기쁨만 따라가고,  자기 유지와 자기 파괴가 서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복되는
세상이 무섭게 느껴져요.  무지한 쾌락은 잔혹함과 너무나 어울린다는 생각에 고귀한 Great ‘B’ 들을 많이 들어보는
 에세이 시간 이었어요 ㅎㅎ

타인에게 귀 귀울임을  잘 하는 편이지만, 미숙한 인덕 때문인지 여타 모임에서는 "무슨 개소리야! " 하고 자리를
밖차고 나오기도 합니다만, 여러분들의 말과 의견들은 마음에 새겨지는 용감함이 무장 되어있고 건강한 판단력이
존재합니다.( 거의 75% 즘 동의되는 의견들, 정말 제일로 높네요! 제가 참여하는 것들 중에서요!)
니체 덕분에 좋아하는 아도르노도 다시 펼쳐보았고 여러분들의 ‘언어의’ 힘도 느껴보았어요.  모두들 고마워요~

소소님의 댓글

소소

마치 엉겹결에 시작된 사람과의 연애처럼
처음엔 그의 이상한 말투와 행동이 낯설고,
속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뱅뱅 돌려 말하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과 의도를 모르고 만나다가,
정작 연애가 끝나고 나니 그가 보이네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서투른 연애처럼 말과 행동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상대를 하루 빨리, 또 명확하게 파악하고 싶었던
나의 섣부른 태도가 그를 더디 만나게 했나 봅니다.
사랑이 그렇듯 직접적인 말 몇마디로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처럼
니체는 텍스트가 아닌, 차라투스트라의 온 여정을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와 만나길 원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것도 모르고 텍스트에서만 그의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고 했으니 말이죠.
서툴렀기에 풋풋하고 가슴 깊이 남을 니체와의 조우가 한동안은
그리울 것 같네요! 여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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