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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근대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0720 발제문 +1
선우 / 2018-07-20 / 조회 1,338 

본문

<서론 :: 초월적 방법>

 

칸트에서의 이성

 

  칸트의 철학에 대한 정의를 보자. “철학은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들에 대한 모든 인식의 관계에 관한 학문 또는 인간 이성의 최고 목적들에 대해 이성적 존재가 느끼는 사랑이다.” 이 정의만으로도 우리는 칸트가 경험론과 독단적 이성론에 전쟁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험론에서 이성은 목적들을 실현시키는 ‘수단’, ‘방법’이다. 목적들은 늘 ‘자연’의 목적들이다. 이성론은 확실히 이성적 존재가 글자 그대로 ‘이성적 목적들’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성이 목적으로 파악한 것은 여전히 이성에 대해 외재적이며 상위의 것들, 즉 의지의 규칙으로서 존재, 선, 가치이다.

  경험론에 대항해서 칸트는 ‘문화’의 목적들, 이성에 고유한 목적들이 있음을 주장한다. 더욱이 이성의 문화적 목적들만이 절대적으로 최종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성이 단지 ‘자연’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어떻게 이성이 단순한 동물성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게 된다.(가치로부터의 논변) 만약 자연이 자신의 고유한 목적들을,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 속에서 실현시키길 원했다면 수단과 목적 모두에 있어서 자신 안에서 본능보다 이성적인 것에 의존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귀류법을 통한 논변/ 자연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 만약 이성이 단지 방법을 강구하는 능력이라면, 어떻게 인간 안에 상반되는 두 종류의 목적, 즉 동물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상충됨으로부터의 논변/ 이성은 단지 ‘방법’이 아니라 목적과 연관되는 것이다.)

  이성론에 대항해서 칸트는 최상의 목적은 이성의 목적들일 뿐 아니라, 이성의 목적들을 정립함에 있어서 이성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성의 목적들에 있어서 이성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성의 ‘관심들’이 존재한다. 또 이성은 자기의 고유한 관심들의 유일한 ‘재판관’이다. 이성의 목적들 혹은 관심들은 경험에 의해서도, 이성 바깥에 있거나 이성 위에 있는 다른 결정 기관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성 자신을 재판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이성, 즉 내재적 비판은 초월적이라 부르는 방법의 본질적인 원리이다.

 

능력이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

 

  표상이 대상이나 주체에 ‘관계하는’ 양상에 따라 세 가지의 능력을 구분한다. 표상이 대상과 일치하거나 부합한다는 관점에서 대상과 관계할 경우 ‘인식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표상이 대상과 인과 관계를 맺을 경우는 ‘욕구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능력은 그 자신의 표상을 통해서 표상들의 대상들을 실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표상이 주체에게 효과를 미치는 한에서, 즉 주체의 활력을 증강시키거나 약화시키거나 함으로써 주체를 촉발하는 한에서 표상은 주체와 관련된다. 이때는 ‘즐거움과 고통의 능력’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능력이 ‘그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법칙을 찾을 때 우리는 그 능력이 ‘상위 형식’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상위 형식의 관점에서 고려된 능력은 ‘자율적’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들 각각이 상위 형식을 이룰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상위 인식 능력은 있는가?(순수 이성 비판) 상위 욕구 능력은 있는가?(실천 이성 비판) 즐거움과 고통의 상위 형식은 있는가?(판단력 비판)

 

상위 인식 능력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표상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 표상과 연관된 것으로서 다른 표상을 인지하기 위해’ 표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처럼 인식은 표상들의 종합이다. 이와 같은 종합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난다. 경험에 의존할 경우 종합은 후험적이다. 종합이 경험적일 경우 인식 능력은 하위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인식 능력은 자신의 법칙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서 찾는다. 경험에 의존하지 않을 경우는 선험적 종합을 수행한 것이다. 선험성의 특성은 보편성과 필연성이다. ‘모든’, ‘언제나’, ‘필연적으로’ 등의 말과 대응하는 경험은 없다. ‘직선은 최단 거리이다’에서 ‘최단’은 비교 혹은 귀납의 결과가 아니라 선을 직선으로 그을 수 있도록 해주는 선험적 규칙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에서 ‘원인’은 귀납의 소산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서 발생하는 어떤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험적 개념이다.

  선험적 종합은 상위 인식 능력을 정의한다. 이 능력은 대상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법칙이든 대상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 능력을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발견할 때 이처럼 인식 능력은 인식 대상에 입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 능력의 상위 형식을 규정하는 것은 동시에 이성의 관심을 규정하는 것이다. 능력의 상위 상태와 관련하여 이성의 관심은 이성이 관심 가지는 바를 통해 정의된다. 이성은 본래 사변적 관심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성은 상위 형식 아래서 인식 능력에 필연적으로 종속되는 대상들에 대해 사변적인 관심을 체험한다.

  그 자체로 있는 사물이 어떻게 우리의 인식 능력에 종속될 수 있고 지배될 수 있겠는가? 원리상 이런 지배와 종속은 나타나는 대로의 대상, 즉 ‘현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이성의 사변적 관심은 오직 ‘현상’에 있다. 그러나 만약 이성이 단지 사변적 관심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성이 물자체를 고려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게 된다. 여기서 순수 이성 비판의 진정한 문제가 시작된다.

 

상위 욕구 능력

 

  욕구 능력은 의지를 규정하는 표상을 전제한다. 표상이 선험적일 때조차 표상은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연관된 즐거움의 매개를 통해 의지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때 종합은 경험적 또는 후험적이며 의지는 정념을 통해 규정된다. 따라서 욕구 능력은 하위 상태로 머문다. 욕구 능력이 상위 형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표상은 심지어 선험적일 때조차 ‘대상’의 표상이어서는 안 된다. 표상은 순수 형식의 표상이어야만 한다. “법칙으로부터 모든 내용을, 즉 규정 근거로서의 의지의 모든 대상을 내버릴 때 법칙에서 남는 것은 보편적인 입법이라는 형식뿐이다.” 이때 욕구 능력은 상위 능력이 되며, 의지가 더 이상 즐거움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저 법칙의 형식에 의해 규정될 때, 이 욕구 능력에 상응하는 실천적 종합은 선험적이다. 욕구 능력은 더 이상 자기 밖에서가 아니라, 즉 내용이나 대상에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신의 법칙을’ 찾는다. 따라서 이 능력은 자율적이라 할 수 있다.

  도덕법칙 속에서 이성은 저 혼자서 의지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상위 욕구 능력에 대응하는 이성의 관심, 즉 실천적 관심이 존재한다. 이 실천적 관심은 경험적 관심과도 사변적 관심과도 구별된다. 칸트는 이성이 근본적으로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늘 강조해 왔다. 욕구 능력이 자기 안에서 자기 고유의 법칙을 찾을 때 이 능력은 무엇에 대해 입법하는가? 어떤 존재들 혹은 대상들이 실천적 종합 아래 종속되는가?

 

능력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

 

  첫 번째 의미의 능력은 표상 일반의 다양한 관계들을 가리킨다. 두 번째 의미의 능력은 표상들의 고유한 원천을 가리킨다. 인식의 원천은 직관(감성에 원천을 두는 특정한 표상), 개념(지성), 그리고 이념(이성)이다.

‘표상’과 ‘나타난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선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대상’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또는 직관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우선 감성적 경험적 다양성으로서의 ‘현상’이다. 현상은 시공 가운데 나타난다. 시공은 우리에게 모든 가능한 나타남의 형식, 즉 우리 직관 혹은 우리 감성의 순수 형식이다. 나타난 것은 시공 중의 현상적 경험적 다양일 뿐 아니라 시공 자체의 순수 선험적 다양이기도 하다. 순수 직관(시공)은 분명 감성이 선험적으로 나타낸 유일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직관은 선험적 직관일 때조차 표상이 아니며, 감성은 표상들의 원천이 아니다. 표상은 나타난 것을 다시(re) 거머쥐는 일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수동성, 다양성과는 구별되는 활동성과 통일성을 함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인식을 표상들의 종합으로 정의할 필요가 없다. 표상 자체가 바로 인식, 다시 말해 나타난 것의 종합이다.

  우리는 수용 능력인 직관적 감성과 진정한 표상들의 원천인 활동적 능력들을 구별해야 한다. 종합은 활동에 있어서는 상상력에, 통일에 있어서는 지성에, 전체성에 있어서는 이성에 의존한다. 우리는 하나의 수용적 능력(감성)과 세 개의 활동적 능력(상상력 지성 이성 -이들이 특정한 표상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성할 수 있다.

 

능력의 두 의미 사이의 관계

 

능력의 첫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보자. 상위 형식 아래서 능력은 자율적이며 입법적이다. 능력은 자기에게 종속되는 대상에 대해 입법한다. 또한 능력은 이성의 관심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비판 일반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상위 형식들은 무엇인가, 이성의 관심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관심들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이 뒤따른다. ‘어떻게’ 이성은 관심을 실현하는가? 다시 말해 ‘무엇이’ 대상들의 종속을 확정하는가, ‘어떻게’ 대상들은 종속되는가? 주어진 능력 속에서 입법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상상력인가, 지성인가 혹은 이성인가? 첫 번째 의미의 능력은 이성의 관심에 대응하는 대로 정의된다. 또 우리는 두 번째 의미의 능력이 이성의 관심을 실현시킬 수 있는지 혹은 입법하는 일을 보장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1장 :: 순수 이성 비판에서 능력들의 관계>

 

선험적과 초월적

 

‘선험적’이라 함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말이다. 경험은 특수하고 우연적이기 때문에 보편성 필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선험성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지한다. ‘모든’, ‘언제나’, ‘필연적으로’ 혹은 ‘내일’ 이라는 말은 경험에 적용되기는 하지만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들을 ‘인식’할 때 사용한다: ‘내일’ 해는 뜰 것이다. 물은 ‘언제나’ 섭씨 100도에서 ‘필연적으로’ 끓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즉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을 ‘넘어선다’. ‘믿음’이 주체를 주체로 만든다고 말한 흄은 이러한 넘어섬의 측면에서 인식을 정의한 최초의 인물이다.

  인식에서 ‘사실’은 우리가 선험적 표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칸트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 아니라 ‘표상’이다.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경험 이전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험적 직관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실체, 원인 등 선험적 개념은 경험적 개념(사자)과 구별된다.

  우리가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을 넘어설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원리들 덕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원리는 경험 가운데서 시행될 기회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내일 해가 뜰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해가 실제로 뜨지 않고는 내일은 현재가 되지 않는다. 경험 가운데 주어진 것은 그 자체, 우리가 가진 표상들의 과정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원리와 같은 종류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흄은 인식이 주관적 원리들을 함축하며 이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주어진 것을 넘어선다는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흄에게는 이 원리가 단지 인간 본성의 원리, 즉 우리가 가진 표상을 결합시키는 심리적인 원리처럼 보였다. 칸트는 문제를 변형시켰다. 자연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표상들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는 원리와동일한 원리에 복종해야 한다. 이 동일한 원리는 우리에게서 진행되는 주관적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또 주어진 것이 이 과정에 종속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원리의 주관성은 경험적 혹은 심리적 주관성이 아니라 ‘초월적’ 주관성이다.

  우리가 선험적 표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문제를 확인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 표상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이 표상들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왜, 또 어떻게 경험 안에 나타나는 주어진 것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표상을 결정하는 원리들과 동일한 원리들에 종속되는가 라는 ‘권리’의 문제를 증명하는 연역이 필요하다. ‘선험적’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표상들을 일컫는다. ‘초월적’은 경험을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표상들에 종속시키는 원리를 일컫는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부른 것의 근본 이념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조화의 이념(합목적적 일치)을 포기하고 주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종속의 원리를 내세운 데 있다. 본질적인 발견은 인식 능력이 입법적이라는 것, 보다 정확하게는 인식 능력 속에 어떤 입법자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입법하는 자, 명령하는 자 이다.

  관념론자는 외부 사물(대상)의 존재를 의심한다. 실재론자는 우리가 감각하는 그대로 외부 사물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외적 대상의 실재성을 어떤 가능한 경험에 의해서도 확실히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새로운 관념론이라면 칸트는 관념론자이다.(선험적 관념론) 칸트는 경험한 모든 것의 실재성을 믿는다. 경험의 보편적인 조건인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 현식이 그 실재성의 근거이다.(경험적 실재론) 선험적 형식을 벗어나서는 우리는 어떠한 것도 경험할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문제는 칸트에게서 내재화되는 방향으로 나간다.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주체 안에서 본성상 다른 주관적 능력들(수용적 감성과 활동적 지성) 사이의 관계 문제가 중요해진다.

 

종합과 입법적 지성

 

  진은영은 칸트 해설서에서 인식의 세 가지 활동을 포착(각지), 구상력(상상력), 그리고 재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하여 ‘~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덧붙이는 선험적 통각, 활동하는 자아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 들뢰즈는 칸트의 포착과 재생(상상력)을 모두 상상력의 ‘종합’하는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종합으로 인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다. 인식은 종합 자체를 넘어서는 두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인식은 의식,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동일한 의식에로의 표상들의 귀속을 함축한다.(선험적 통각) 상상력의 종합 자체는 전혀 자기 의식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인식은 대상과의 필연적인 관계를 함축한다. 인식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종합하는 활동이 아니라 표상된 다양을 하나의 대상과 관계 맺게 하는 활동이다.(재인)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상상력 지성 이성)이 ‘입법적’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셋 중에 무엇이 진정한 ‘입법자’인가? 인식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다양을 종합하는 활동(상상력)이 아니라 표상된 다양을 하나의 대상과 관계 맺게 하는 활동이다.(재인) 또한 인식은 하나의 동일한 의식에로의 표상들의 귀속을 함축한다.(선험적 통각) 나의 표상들은 의식의 통일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 나의 것이다. 어떤 대상은, 나는 생각한다, 또는 의식의 통일의 상관물이다. 그러므로 코기토의 표현, 즉 코기토의 형식적 객관화이다.

  현상은 필연적으로 ‘범주’에 종속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범주’를 통해 자연에 대한 진정한 입법자가 된다. 지성은 범주라는 선험적 개념을 사용한다. ‘범주‘는 의식의 통일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자격으로 어떤 대상의 술어이다. 범주는 상상력의 종합에 통일을 부여한다. 이 통일 없이는 상상력의 종합은 우리에게 아무런 인식도 주지 못한다.

왜 상상력이 아니라 지성이 입법하는가? 현상이 범주에 종속되듯이, 시공에 종속되는가?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는 없다. 현상은 나타난 것이다. 나타남이란 시공가운데 ‘직접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시공은 현상으로서의 대상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을 포함하는 순수직관이다. 우리는 현상이 시공에 ‘종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감성이 수동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감성은 직접적인 반면 종속의 이념은 매개자의 개입, 다시 말해 ‘종합의 개입’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종합이 현상을 입법자로서의 역량을 가진 활동적 능력(지성)에 관련시킨다. 현상은 상상력의 종합에 ‘종속’되지 않는다. 현상은 상상력의 ‘종합을 통해’ 입법적 지성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시공과 달리 지성 개념인 범주는 초월적 연역의 대상이 된다. (시공은 형이상학적 해명의 대상이다.)

  지성은 이런저런 현상들이 그 내용적 측면에서 따르는 법칙들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지만, 모든 현상이 그 형식적 측면에서 ‘종속되는 법칙’을 구성한다. 그 결과 현상은 ‘감성적 자연’ 일반을 ‘형성한다.’

 

상상력의 역할

 

  입법적 지성은 무엇을 하는가? 지성은 개념들을 사용해 판단한다.(개념은 판단이다) 상상력은 종합을 통해 무엇을 하는가? 상상력은 도식을 산출한다.(생산적 상상력) 도식은 종합을 전제한다.(포착과 재생 - 재생적 상상력, 기억작용) 도식은 범주에 대응하는 시공간적 규정이다. (모든 도식은 일종의 시간규정이다. 시간계열(분량) 시간내용(성질) 시간순서(관계) 시간총괄(양상))도식은 개별적인 그림이 아니며 개념적 관계들을 구체화하거나 현실화하는 시공간적 관계들로 구성된다. 상상력의 ‘도식’은 입법적 지성이 개념들을 가지고 판단들을 만드는 ‘조건’이다.

  상상력은 지성이 주재하거나 또는 지성이 입법적 능력을 가질 ‘때에만’ 도식을 산출한다. 상상력은 사변적 관심 속에서만 도식을 산출한다. 지성이 사변적 관심을 떠맡을 때, 즉 지성이 ‘규정하는 자’가 될 때, 바로 ‘그때에만’ 상상력은 도식을 산출하는 능력으로 ‘규정된다’.

 

이성의 역할

 

  이성은 왜 이념들을 형성할까? 지성은 판단하고 이성은 추리한다. 지성 개념은 주어져 있고 이성은 매개념, 즉 그 지성 개념의 외연에 전적으로 포함되는 다른 개념을 찾는다. 지성의 선험적 개념들(범주들)이 이미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특정한 문제를 야기한다. 범주들은 모든 경험 가능한 대상들에 적용된다. 따라서 이성이, ‘모든’ 대상(전체)에 대해 선험적 개념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념을 찾기 위해서는 더 이상 어떤 다른 개념에 의지할 수 없다. 대신에 이성은 경험 가능성을 넘어서는 이념들을 형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성은 자신의 고유한 사변적 관심 속에서, 모종의 방법으로 초월적 이념들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초월적 이념들은 제약들의 전체성을 표상한다. 그 제약들의 전체성 아래서 관계의 범주가,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부여된다. 그러므로 초월적 이념들은 어떤 무제약적인 것을 표상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실체 범주에 대해 절대적인 주체(영혼)를(정언적 추리), 인과성 범주에 대해 완전한 계열(세계)을(가언적 추리), 공통성에 대해 실재성 전체(최고 실재자로서의 신)(선언적 추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이념들은 지성 개념들에게 체계적 통일의 최대와 외연의 최대를 동시에 주기 위해 지성 개념과 관계한다. 지성은 이성 없이는 대상에 관한 지성의 과정 전체의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이성은 인식적 관심에 있어서 지성에게 입법적 권한을 넘겨주었을 때조차 역시 어떤 역할을 유지하거나 또는 오히려 지성 자체로부터 어떤 독자적인 기능을 되돌려 받는다. “순수 이성은 지성 개념의 사용에서 절대적 전체성에만 관심을 두고 범주를 통해 사유되는 종합적 통일을 절대적인 무제약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추구한다.”

  지성은 ‘형식적’ 측면에서만 현상에 대해 입법할 수 있다. 현상은 ‘형식적’ 측면에서만 범주에 종속된다. 내용적 측면의 경우 지성은 더 이상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현상은 형식적 측면에서 범주에 종속해야 하고 질료적 측면에서 이성의 이념에 대응하거나 이성의 이념을 상징해야 한다. 이념은 현상의 내용에 대응한다. 이런 차원에서 조화, 합목적성이 재도입된다. 그러나 여기서 현상의 내용과 이성의 이념의 조화는 단지 요청될 뿐이다. 이성은 자연의 체계적 통일을 가정해야만 하고, 이 통일을 과제로 또는 한계로 설정해야만 한다. 이성은 자신의 모든 과정을 끝없이 이 한계의 이념에 부합시켜야 한다.

  칸트는 이념은 허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이념은 객관적 가치를 지니며, 어떤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이 대상 자체는 규정되지 않았으며, 개연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이념의 대상인 규정되지 않은 것은 경험의 대상과의 유비를 통해서 규정될 수 있다. 또 이 대상은 지성 개념에 대해 무한한 규정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지성 개념에 대해 추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상의 내용에 대해 ‘상징화’하는 활동을 한다.

 

능력들 사이의 관계 문제 - 공통감각

 

  지성은 입법하고 판단한다. 상상력은 지성 아래서 종합하고 도식을 산출한다. 이성은 추리하고 상징화하며 그 결과 인식은 체계적 통일의 최대를 얻는다. 공통감각이란 이와 같은 능력들 사이의 일치를 말한다. 공통감각은 능력들의 선험적 일치, 혹은 더 분명하게는 그런 일치의 ‘결과’를 가리킨다. 공통감각은 타고난 심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소통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이다. 인식은 공통감각을 함축한다. 공통감각 없이는 인식은 소통될 수 없고 보편성을 가질 수도 없다. 칸트는 능력들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념, 능력들이 서로 일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조화로운 균형을 형성하도록 해주는 건전하고 올바른 본성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칸트 철학이 가진 가장 독창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가진 능력들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는 이념이다. 이 본성의 차이는 인식 능력, 욕구 능력,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표상들의 원천들로서의 능력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감성과 지성은 다르다. 하나는 직관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의 능력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 능력이 일치하는가? 칸트는 상상력의 종합과 개념에 맞추어 감성 형식에 선험적으로 적용되는 상상력의 도식을 내세운다. 여전히 미스테리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예정조화의 이념을 거부하고, 대신 주체가 가진 본성상 다른 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로의 전이는 독창적이긴 하다. 그러나 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나 이 일치의 결과로서 공통감각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 일반은 공통감각의 기원(발생)으로서 일치의 원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칸트는 “만약 우리가 이 능력들의 근원에 대해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런 탐구는 전적으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창조자 말고는 다른 근거를 내세울 수 없다”며 목적론적이며 신학적인 원리 아래 다시 숨는다.

  칸트의 처음 두 비판은(순수이성, 실천이성) 능력들 사이의 관계라는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단지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해결해야 할 궁극적인 과제로서 남겨둘 뿐이다.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미감적 공통감각)의 차원에서 우리는 일치의 근거 혹은 공통감각의 발생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능력들의 조화의 근거 물음에 대해서 처음 두 비판은 마지막 비판에 가서야 답을 찾을 수 있다.

      

합법적 사용, 비합법적 사용

 

  사변적 관심은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물자체는 정상적인 사변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현상은 상상력의 종합을 통해서 지성과 지성 개념에 종속된다. 입법하는 것은 지성이다. 이성이 지성에서 사변적 관심을 담당하도록 했기에, 이성 자신은 현상에 적용되지 않고 경험 가능성을 넘어서 이념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깔끔하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지 않은가?

  물자체를 알고자 하는 욕구는 어쩌란 말이냐? 도식이 아니라 공상을 하는 상상력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지성은 현상만이 아니라 물자체에도 개념을 적용하길 바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성은 지성 개념에 적용(내재적 또는 규제적 사용)되는 대신에 직접 대상에 적용되기를 갈망하고, 또 인식의 영역에서 입법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초재적 또는 구성적 사용) 이성의 초재적 사용은 우리에게 지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을 명령하는 것이고, 지성의 초월적 사용은 그저 단순히 지성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칸트는 사변 이성의 착각과 이성이 야기하는 그릇된 문제들을 들추어낸다. 그 그릇된 문제란 영혼, 세계, 신에 관한 것이다. 칸트는 전통적인 오류 개념을 ‘그릇된 문제’의 개념과 내적 착각의 개념으로 대치한다. 그는 이 착각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심지어 이성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결과라고까지 말한다.

  지성은 감성의 조건에 의존하여 현상을 종속시킨다. 합법적이다. 지성이 감성의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것 일반(물자체)을 알고자 ‘초월적’ 행위를 시도하면 비합법적이다. 지성의 초월적 사용은 비합법적이다. 이성이 스스로 뭔가 규정된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초재적 사용은 비합법적이다.

 

  이성은 물자체에 대해 그 자체 합법적이며 자연적인 관심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 관심은 사변적이지 않다. 이성의 관심들이 서로 무관심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위계를 갖춘 체계를 형성하듯, 더 높은 관심의 그림자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낮은 다른 관심에 투사된다. 만약 물자체가 우선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이성의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사변 이성은 물자체에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엇이 보다 높은 관심인가?

 

댓글목록

namu님의 댓글

namu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정수 샘도 마찬가지만 항상 그네들의 한마디에 많은 깨달음(?)을, 공감을 느낍니다. 모든 분들의 한마디가 나에겐 '나는 타자다'를 실감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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