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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근대철학] 칸트의 비판 철학 :: 0727 발제
개구리 / 2018-07-27 / 조회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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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실천 이성 비판에서 능력들의 관계

 

입법적 이성
  이렇게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는 진정으로 불일치 속에서 발생한다. 이성의 이념들은 사변적으로가 아니고 실천적으로 규정된다. 숭고의 감각은 숭고가 어떤 보다 높은 합목적성을 준비하고 또 도덕법칙의 출현을 준비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선험적 실천적 종합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법칙의 형식을 통해 규정되는 의지의 본성은 바로 자유의지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의 의미와는 좀 다르다.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자유의지라니 말이다. 자유의지와 도덕법칙 상호 간의 이런 함축은 실천 이성과 자유가 만나는 지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변 이성의 이념인 자유 개념은 실천 이성 안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덕법칙이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유 개념에 규정적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선험적 종합은 의지의 자율 속에서 발견된다.

 

자유의 문제
  실천 이성은 무엇에 입법하는가? 실천적 종합에 종속하는 존재 또는 대상은 무엇인가?
실천 이성은 자유로운 존재들에 대해 입법한다. 더 정확히 말해 자유로운 존재들의 인과성에 입법한다. 자유 개념이 표상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성의 범주인 현상은 자연 인과성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어떤 것의 결과가 되고, 각각의 원인은 선행하는 원인에 관련된다. 그러나 자유는 “어떤 상태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다. 자유 개념은 현상을 표상하지 않고 물자체만을 표상한다는 결론은 다음 세 가지 사항으로부터 얻어진다.
  1) 인식은 현상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근본을 파보려는 이성의 속성상 인식될 수 없지만 현상의 근원으로서 물자체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자체는 인식의 한계를 표시하고 인식을 감성의 조건에 제한하는 예지적이거나 초감성적인 ‘가상체’로 생각된다. 2) 이 가상체에 대응하는 현상체(인간)가 단순히 감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자발적인 능력을 발휘할 때, 자유는 물자체에 속하며 가상체는 자유로 생각되어야 한다. 자연적 존재를 넘어 예지적 존재(intelligence) 또는 이성적 존재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 인과성을 부여받은 초감성적 세계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3) 이성의 사변적 관심에서 자유는 필연적인 개념이지만 가상체처럼 개연적이며 규정되지 않은 개념일 뿐이다. 실천 이성은 물자체로서의 자유로운 존재에 대해, 그런 존재의 예지적이며 가상체적인 인과성에 대해, 그런 존재가 형성한 초감성적 세계에 대해 입법한다. 도덕법칙은 우리의 예지적 현존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 도덕법칙은 자발성의 법칙, 물자체로서 주체의 인과성의 법칙이다. 사변적 관심을 가지고 지성이 현상에 대해 작용하는 한에서 지성은 다른 것들에 대해 입법한다. 그러나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이성은 자유로운 존재에 대해 입법한다. 이성적 존재는 자신의 이성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부여한다. 자연 개념을 통해 지성이 인식 능력 또는 이성의 사변적 관심 가운데서 입법하는 것과, 자유 개념을 통해 이성이 욕구 능력 속에서, 이성의 고유한 실천적 관심 속에서 입법하는 두 영역으로 나눈다.
 
지성의 역할
  이렇게 감성적인 것과 초감성적인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의 자연을 형성한다. 초감성적인 것 자체는 감성적 자연과의 유비를 통해서만 자연으로 생각될 수 있다. 실천 이성의 논리적 검토를 통해 의지의 준칙이 보편 법칙의 실천적 형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준칙이 감성적 자연의 보편적인 이론적 법칙으로 성립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거짓말을 한다는 약속이 있다면 이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감성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거짓된 의지의 준칙이 모순 없이 이성적 존재를 위한 순수 실천 법칙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분명히 지성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입법적 지성에서 찾아낼 수 있는 ‘법칙에 합치하는 형식’을 사용한다. 즉 유비는 준칙이 실천 이성에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 행위가 유일한 입법자인 이성의 원칙에 따르는 경우인지 아닌지를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사변적 관심을 따를 때 지성은 입법하며 이성은 추리하고 상징화한다. 실천적 관심을 따를 때 이성은 자기 자신에게 입법한다. 그리고 지성은 판단하고 심지어 추리조차 하며 또 상징화한다.
  어떻게 지성은 입법적 실천 이성에 부합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욕구 능력은 표상과 표상이 산출하는 대상의 관계라는 인과성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사변적 관심에서 인과성은 근원적인 생산적 원인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의 한 범주로 귀속 될 뿐이다. 실천적 관심에서 입법적인 이성은 ‘인과성의 개념과 자유 개념을 결합’한다. 이성은 인과성의 범주에다 초감성적 대상(근원적인 생산적 원인으로서 자유로운 존재)을 부여한다. 지성의 형식인 범주는 경험 가능한 대상 이외에는 인식을 주지 않지만, 이 초감성적인 대상에 대해 순수하게 논리적인 의미를 할당 할 수는 있다. 이성은 실천적으로 인과성의 초감성적인 대상을 규정하고, 자유 원인으로서 인과성 자체를 규정하며, 유비를 통해 하나의 자연을 형성할 수 있다.

 

도덕적 공통감각과 비합법적 사용
  공통감각은 경험론에서 말하는 어떤 특수한 경험적 능력이나 감각이 아니다. 칸트는 공통감각을 공통적 인간지성이라 말했다. ‘감각에 의존하는 공통성’(부록2,p167)인 공통감각은 인식의 소통 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으로, 입법적 능력을 통해 규정된 능력들의 선험적 일치이다. 도덕적 공통감각은 이성의 입법 아래서 지성과 이성의 일치이다. 여기서 능력들의 선한 본성의 이념과 조화의 이념이 발견된다. 그러나 선한 본성에서 불구하고 능력들이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에, 비합법적 활동을 경고하는 철학적 반성이 필수적이다. 지성이 도덕법칙을 직관에 관계시켜주는 ‘도식’을 찾는 일이 생기고, 게다가 이성이 순수하지 않게 자신의 욕구를 의무처럼 여기는 일이 생긴다.
   사변적 관심에서 이성은 자기 자신에게 입법할 수 없음에도 입법자의 역할을 고집하는 것은 내적 착각의 원천이다. 실천적 관심 속에서 이성은 입법의 의무를 양보하지 않는데, 이 때 경험적 관심이 이성에 반영되는 이 비순수성이 착각의 원천이고 비판의 대상이다. 이처럼 순수 사변 이성 비판과 순수하지 않은 실천 이성 비판은 대조를 이루지만 초월적이라 불리는 이성의 내재적 사용 규정은 동일하다. 순수 이성 비판은 지성에 위탁하지 않고 스스로 입법하고자 하는 사변 이성의 초재적 사용을 폭로한다. 실천 이성 비판은 스스로 입법하는 대신 경험에 제약되려 하는 실천 이성의 초재적 사용을 폭로한다.
  실천 이성은 행복과 덕의 이율배반에 빠진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항상 덕이 될 수 없고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행복의 이념은 욕구와 경향의 만족을 함축한다. 순수 실천 이성 자신은 덕과 행복의 결합을 요구한다. 이런 실천 이성은 순수 이성의 내적 착각을 함축한다. 1) 순수 실천 이성은 욕구 능력의 규정 원리로서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배제한다.(순수 형식의 표상) 그러나 법칙이 이 욕구 능력을 규정할 때 욕구 능력은 이 규정 자체로 인해 만족을 체험한다. 이 만족은 감성적 경향에서 우리가 독립해 있음을 표현하는 소극적인 즐거움의 일종이며 지성과 이성의 형식적 일치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순수한 지성적 만족이다. 2) 그런데 이 소극적인 즐거움을 적극적인 감성적 느낌과 혼동하며 심지어 의지의 동기와도 혼동한다. 또 이 활동적인 지성적 만족을 느껴진 어떤 것, 체험된 어떤 것과 혼동한다. 3) 이율배반은 실천 이성의 내재적 만족에, 즉 만족과 행복을 불가피하게 혼동하는 데 근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때는 행복 자체가 덕의 원인이며 동기라고 믿고 어떤 때는 덕이 그 자체 행복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소극적이고 지성적인 만족과 행복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내적 착각이다. 이 착각이 야기하는 결과만을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 피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착각은 능력들이 선한 본성을 지녔다는 이념과 대립한다. “변증성 가운데 나타나는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은 진실로 인간 이성이 빠질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오류인 것이다.”

 

실현의 문제
 실천적 관심은 대상을 인식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상을 실현하기 위한 대상과 이성 사이의 관계이다. 선한 것들 자체는 그것들을 실현하는 우리의 물리적 힘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단지 그것들을 실현하는 활동을 의욕하는 도덕적 가능성을 통해 규정될 뿐이다. 감성적 결과들과 관계없는 도덕법칙은 아무것도 아니며 감성적 결과들과 관계없는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도덕법칙을 물자체의 인과성에 대해, 순수 초감성적 자연에 대해 입법하는 것으로 보면 충분한가? 실천 이성은 단지 초감성계와 그 초감성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자유 인과성에대해서만 입법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모든 입법은 초감성계를 감성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며 이 자유 인과성이 도덕법칙을 표현하는 감성적 결과를 낳아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게 한다.

 

실현의 조건
  도덕적 선의 실현은 감성적 자연과 초감성적 자연의 일치를 전제한다. 이 일치는 행복과 도덕성의 균형이라는 이념 속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들의 전체성’으로서 최고선이라는 이념 속에서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행복과 덕의 이율배반대로 행복과 덕은 직접 결합되지 않는다. 그럼 행복과 덕의 일치라는 최고선은 불가능한가? 무한을 향해 가는 전진(죽지 않는 영혼)의 관점에서, 그리고 감성적 자연의 예지적 창조자 또는 ‘세계 도덕적 원인(신)’을 통해 행복과 덕은 결합 될 수 있다. 영혼과 신의 이념은 실천 이성의 대상 자체가 실현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자유, 영혼, 신이라는 이념들은 사변적 관점에서는 모두 개연적이며 규정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도덕법칙으로부터 실천적 규정을 얻으므로 ‘실천 이성의 요청들’이라 불린다. 이 중 자유 이념만이 도덕법칙을 통해 직접적으로 규정되므로 요청이기보다는 ‘사실의 문제’ 또는 정언 명제의 대상이다. 다른 두 이념은 그저 자유의지의 필연적 대상의 조건일 뿐이며 상상력이 본질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처럼 도덕적 공통감각은 신앙을 용인할 뿐 아니라, 감성적 자연이 초감성적인 것의 결과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게끔 해주는 상상력의 활동도 용인한다. 그러므로 상상력 자체가 도덕적 공통감각의 일부가 된다.

 

실천적 관심과 사변적 관심
  사변적 관심은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실천적 관심은 이성적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실천적 관심, 즉 보다 높은 관심의 관점에서 볼 때 초감성적인 것이 감성계 속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면 감성계는 사변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신앙은 사변적 명제이다. 그러나 신앙은 도덕법칙으로부터 얻은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현실적으로 되지 못한다. 신의 현존에 관한 모든 사변적 증명에 대한 도덕적 증명의 우위성이 나온다. 인식의 대상으로 신은 간접적, 유비적으로밖에 규정될 수 없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신은 도덕적 창조자로서 오직 실천적일 뿐인 규정과 실재성을 얻는다.
  관심 일반은 목적 개념을 함축한다. 사변적 이성은 자연에 대한 탐구 이상을 표상하지 않기에 여기서 목적들은 궁극 목적을 표상하지 않는다. “세계가 인식된다는 사실은 세계의 현존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세계에 관한 이 고찰 자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궁극 목적이 이미 전제되어야 한다.” 이 궁극 목적은 한편으로는 목적 자체로 생각되어야만 하는 존재들에게 적용되고, 다른 한편 실현되어야 하는 최종 목적을 감성적 자연에 부여해야 하는 존재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궁극 목적은 필연적으로, 실천 이성의 개념 또는 상위 형식을 갖춘 욕구 능력의 개념이다. 오직 도덕법칙이 목적 자체로서 이성적 존재를 규정한다. 도덕법칙은 도덕성과 행복을 통일함으로써 초감성적인 것을 실현할 것을 명령한다. 실천적 관심이, 목적 자체로서 그리고 감성적 자연 자체의 최종 목적으로서 이성적 존재를 함축한다. “모든 관심은 결국 실천적이다. 그리고 사변 이성의 관심조차 제약된 것에 불과하며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만 완벽하게 된다.”

 

3장 판단력 비판에서 능력들의 관계


느낌의 상위 형식은 있는가?
  다시 말하면 즐거움 또는 고통과 같은 주체의 상태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표상은 있는가? 도덕법칙을 순수 형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법칙의 결과로서 존경은 고통의 상위 상태이고 지성적 만족은 즐거움의 상위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만족은 감성적 결과도 특정한 느낌도 아닌, 느낌에 대한 지성적 유비이기 때문에 도덕법칙은 순수 형식의 표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상위의 즐거움일까? 느낌의 능력은 감성적 기호와도 지성적 성향과도 관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자신의 원리 속에서 무관심해짐으로써만 상위 형식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표상된 대상의 현존이 아니라, 나에 대해 단순히 어떤 표상이 끼친 결과이다. 이는 상위의 즐거움이 순수 판단력, 다시 말해 순수 판단 작용의 감성적 표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미감적 판단에서 형식이라는 반성된 표상이 아름다움이 주는 상위 즐거움을 일으킨다. 형식은, 대상이 유발하는 감각이라는 내용적 요소와 달리, 그 대상에 대한 상상력이 행하는 반성의 소산이다. 미감적 판단력은 대상의 현존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기 때문에 칸트는 상위 형식을 지닌 느낌의 능력에 대해 ‘자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느낌의 능력에 있어서 판단력은 입법하는 대상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반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법칙을 정하는 것을 자기자율이라 한다. 느낌의 능력은 현상도 물자체도 어떤 영역도 가지 않는다.

 

미감적 공통감각 –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로운 일치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어떤 객관성, 필연성, 보편성을 요구한다. 아름다운 대상의 순수 표상은 개별적이므로 미감적 판단의 필연성과 보편성은 주관적이다. 여기서 보편 필연적인 것은 단지 즐거움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타당성을 지니리라고 가정한다. 이때 상상력은 규정된 지성 개념과 관계하지 않지만, 개념의 능력 일반으로서의 지성 자체와는 관계한다. 즉 상상력은 지성의 규정되지 않은 개념과 관계한다. 상상력은 “개념 없이 도식을 산출한다.” 자유로서의 상상력과 규정되지 않은 지성의 일치로, 능력들 사이의 자유로우며 규정되지 않은 일치 자체이다. 이 일치가 바로 미감적 공통감각(취미)을 규정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즐거움은 이 일치의 결과일 뿐이다. 이 즐거움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놀이로 지성적으로 알려질 수 없고 오직 느껴질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모든 능력들이 함께 이 자유로운 주관적 조화를 먼저 이룰 수 없다면, 어떤 한 능력이 입법적이며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미감적 공통감각이 논리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숭고에서 능력들의 관계 –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로운 일치
  다른 유형인 ‘이것은 숭고하다.’의 경우 상상력은 형식적 반성과는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한다. 숭고의 느낌은 무형 혹은 기형(광대함 또는 강력함)에 직면할 때 체험된다. 상상력은 자기의 고유한 한계에 직면하는 체험을 한다. 상상력은 이 최대의 불충분함을 체험하고는 “이 한계를 확장하려 하나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위축된다.” 상상력을 무력하게 하는 이 광대함은 감성적 자연으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감성적 자연의 광대함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이성이다. 이렇게 상상력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이르도록 박차를 가하고 자신의 모든 능력이 하나의 이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시인하도록 하는 것이 이성임을 알게 된다. 숭고를 통해 상상력과 이성은 직접적인 주관적 관계를 이룬다. 이성의 요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이 관계는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이다. 상상력은 자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고 숭고의 느낌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처럼 생각되지만 그 고통은 즐거움을 가능케 한다. 불일치의 심층에는 일치가 있다. 상상력은 한계에 직면할 때 자기 고유의 한계를 넘어버린다. “상상력은 감성적인 것 밖에서는 의지할 어떤 것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성적 경계를 제거함으로써 상상력은 무한을 감지한다. 감성적 경계를 제거하여 상상력을 감성적인 것에서 떼어놓는 분리는 무한의 현시요, 이런 이유로 소극적 현시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정신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는 진정으로 불일치 속에서 발생한다. 이성의 이념들은 사변적으로가 아니고 실천적으로 규정된다. 숭고의 감각은 숭고가 어떤 보다 높은 합목적성을 준비하고 또 도덕법칙의 출현을 준비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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