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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강독] 설결과 왕예의 이야기... +1
기픈옹달 / 2016-08-02 / 조회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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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결과 왕예의 대화를 읽었습니다. 한마디 말이 귓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吾惡乎知之!'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까?

 

다음 시간에는 구작자와 장오자의 대화에서 꿈 이야기까지 다룹니다. 

아래에 다음주 강독 부분을 옮겨둡니다.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為孟浪之言,而我以為妙道之行也。吾子以為奚若?」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女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予嘗為女妄言之,女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為其脗合,置其滑涽,以隸相尊。眾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蘊。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床,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是其言也,其名為弔詭。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그리고 세미나 시간에 말씀드린 그레이엄의 영역 원본 주소도 알려드려요. 저는 킨들판 ebook을 구입했습니다. ^^

https://www.amazon.com/Inner-Chapters-Hackett-Classics-ebook/dp/B00R5DEJW0/ref=sr_1_1?s=digital-text&;ie=UTF8&qid=1470145330&sr=1-1&keywords=angus+graham#nav-subnav 

 

더불어 지포린Ziporyn 것도... 

https://www.amazon.com/Zhuangzi-Essential-Selections-Traditional-Commentaries-ebook/dp/B003ZDNYWA/ref=pd_sim_351_1?ie=UTF8&;dpID=51GrCrWBTcL&dpSrc=sims&preST=_OU01__BG0%2C0%2C0%2C0_FMpng_AC_UL160_SR93%2C160_&psc=1&refRID=AM2N3DEMZ3RK3KF6E3MZ#nav-subnav 

 

세미나 시간에 <장자를 읽다>에 관해 이야기드렸었는데 관련 부분을 아래에 옮깁니다. 짧은 인용문이지만 읽어보시면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수 있을 거여요.

 

(덧: <장자를 읽다>는 책방온지곤지에서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구입 문의는 저에게...;;)

 

39쪽 ~

 

탈옥 전문가

 

전통적으로 장자와 노자를 나란히 두고 ‘노장’老莊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장자와 노자는 사상의 근본, 관심의 지향, 표현 방식에서 사실 크게 다릅니다. ‘노장’이라는 명칭과 순서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노자가 장자보다 앞선다고, 먼저 노자의 사상이 있고 나서야 장자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장자의 사상이 노자 사상의 부연이나 발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자와 장자의 유사점에만 관심을 둘 뿐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하고 엄청난 차이는 무시하곤 합니다.

 

‘연속된 세계관’과 ‘불연속 세계관’에 대한 앞서의 간단한 토론을 통해 우리는 장자와 노자의 차이를 발견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장자가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하게 ‘연속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주류가 아닌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지요. 이에 반해 노자는 여전히 주나라 문화의 ‘물연속 세계관’ 입장에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할지, 어떻게 역발상 논리로 이 인간 세상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아낼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자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도’라는 말로 완전하고 신비한 원리 원칙을 통칭하며, 마찬가지로 ‘자연’自然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이 자연을 광활한 공간으로 삼아 인간 세계라는 비좁은 멈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유히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데 중점을 두는 반면,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해 인간관계를 처리하고 이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 

 

장자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광대한 ‘자연’을 이야기하고자 하지만, 노자는 언어로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도’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장자는 우리가 겨우 개미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개미굴을 떠나겠다는 바람과 의지를 얻어, 개미굴 밖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노자는 개미굴 밖 커다란 세계의 이치를 정리해서 우리가 이 개미굴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이 개미굴 안에서 더 강해지고 더 나아지도록 바꾸고자 하지요. 장자가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면, 노자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적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셈입니다. 

 

 

55쪽 ~

… <초나>나 <장자>가 계승한 남쪽 지역의 문화가 역사적으로 거의 언제나 변방에 속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저작들이 지닌 수많은 특징은 주류인 주나라 문화의 인본주의나 인간 세상의 문제에만 몰입하는 가치관과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달랐습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통일 이후 <초사>와 <장자>에 대한 이해와 독법은 이런 인본주의 전통의 입장에 서 있었으므로, 남쪽 지역의 신과 귀신, 기이한 상상이 지닌 의미를 왜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사상의 형식에서 비롯된 차이라 하겠습니다.

 

진秦 나라에서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장자>는 중시되지 않았으며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습니다. 몇백 년 동안 도가의 중심은 ‘황로’黃老였지 ‘노장’이 아니었고 한나라 시기에는 ‘노장’을 말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습니다. 위진 시기에 이르러서야 노자와 장자를 함께 거론하는 ‘노장’의 학설이 ‘황로’를 대체하면서 유행하는 용어가 되었지요.

 

역사학자 첸무는 <장자찬전>에서 ‘<장자>는 기울어 가는 시대의 책이다. 그러므로 <장자>를 연구하고 글을 쓴 이 또한 기울어 가는 시대에 살지 않은 적이 없다. 위진 시기의 완적, 상수, 곽상, 명나라 말기의 초횡, 방이지, 왕부지 부자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장자>는 언제나 ‘기울어 가는 시대’에 유행하였을까요? 그 가운데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꼽아 보겠습니다. ‘기울어 가는 시대’라는 주류 사회의 중심 가치가 붕괴되고 해체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이런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장자>와 같이 사회의 범주를 초월하는 이야기를 진정으로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주류 사회의 중심 가치로 <장자>를 곡해하지 않게 되고, 비로소 <장자>가 이룩한 의미 있는 공헌을 온전히 해석하고 체현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창한 시대’에 이루어진 <장자>에 대한 해석은 ‘기울어 가는 시대’의 해석만큼 들어맞지도 훌륭하지도 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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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픈옹달

예전에 제물론을 정리하며 써둔 글을 함께 붙입니다.
http://zziraci.com/8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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