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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1 :: 10~13장 발제
오라클 / 2016-08-03 / 조회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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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1 :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10. 옷을 별로 입지 않은 슈트라우스 / 슈트라우스의 가면

 

슈트라우스의 행복 :: 레싱이나 볼테르와 비교되는 것 > 고백자 슈트라우스는 편협하고 말라빠진 영혼과 학자의 무미건조한 욕구를 갖춘 진짜 속물이다. 그의 최고의 행복은 레싱이나 볼테르와 비교되는 것이다. 그는 레싱의 용감한 변증법적 격정과 겨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소박한 자유사상가적 노인으로서 볼테르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적합한지를 두고 동요한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면, 때로는 레싱의 표정을 때로는 볼테르의 표정을 짓는다. 

 

문체의 단순성 & 소재 > ① (문체의 단순성) 슈트라우스는 볼테르의 서술에 대한 찬사를 통해, 문체의 단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문체의 단순성은 천재의 징표였으며, 천재만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천진스럽게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② (소재) 그러나 천재적 저자는 표현의 단순함과 명확성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소재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라도 그 소재와 놀이를 한다. 누구도 미지의 수천개의 심연으로 단절된 길을 서투른 발걸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천재는 소로를 민첩하고 단호하게 혹은 우아하게 뛰어넘으며 달려가고, 여기저기를 겁먹은 듯이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발길을 비웃는다. 슈트라우스가 스쳐지나가는 문제들은 진지하고 두려운 것이며, 몇천년에 걸쳐 현자들에 의해 다루어져왔다는 것을 슈트라우스 본인이 알고 있다. ③ (옷을 별로 입지 않음 = 진리의 증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는 자기 책은 옷을 별로 입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옷 잘입은 어떤 저자보다 자기를 더 엄숙하게 바라보도록 강요한다. 

 

슈트라우스의 가면 > ① (슈트라우스의 천재가면) 아, 그러나 속물은 모든 퇴거명령과 모든 추방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시 돌아온다! 아, 얼굴은 볼테르와 레싱에 강제로 맞춰져 있지만, 가면은 자주 떨어져나간다. 슈트라우스가 천재의 도약을 뒤따라 도약하고 천재의 시선으로 응시하고자 시도할 때, 그의 움직임은 경직되고 그의 시선은 흥미없게 된다. ② (슈트라우스에 대한 진단) 그는 우리가 사는 추운 지역에서 옷을 별로 입지 않고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감기에 걸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에게 다음의 진단이 내려져야 한다. 빈틈없이 옷을 차려입은 용감하고 엄격한 슈트라우스는 독일에서 강력하게 진리에 종사하고 자신의 한계 안에서 지배할 줄 아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지금 여론에서 다비드 슈트라우스로 유명해진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과거의 진지함이 우리에게 진지함과 공감을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지금 천재가면을 가지고 벌이는 연극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웃음거리가 된다. ④ (슈트라우스에 반대하는 사람들) 먼저 슈트라우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예술가적 형성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슈트라우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진스럽다’고 말하는 기쁨이 본래의 슈트라우스적 수호신을 파괴하는 한 그것은 천진스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슈트라우스의 본색 > 슈트라우스는 소박한 천재와 고전적 작가를 연기하는 배우다. 단순한 양식이 저술가적 성실성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술가 슈트라우스가 좀더 정직할 수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더 잘 쓸 수 있고 조금 덜 유명해질 것이다. 그가 배우이고자 한다면, 좋은 배우로서 소박한 천재와 고전적 작가를 보고 좀더 잘 모방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기품 없는 문장가이며, 나쁜 배우이다. 

 

11. 슈트라우스의 독일어 :: 생산적인 것의 결여

 

독일에서의 ‘말로 하는 언어표현’의 황폐함 > ① (말로 하는 언어표현의 황폐함) 독일에서는 보통 저술가가 되는 것도 매우 어렵고, 좋은 저술가가 되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슈트라우스 같은 매우 나쁜 저술가도 크게 비난받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말로 하는 언어표현에 대한 예술가적 평가와 취급과 육성이 결여되어 있다. 말로 하는 언어표현은 살롱담화, 설교, 의회연설처럼 모든 공공적 발언에서 아직 국민적 양식에 도달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말하는 모든 것이 소박한 언어 실험단계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술가는 통일적 규범을 갖고 있지 않다. ② (쇼펜하우어의 비판 :: 고전적 작가 & ‘고전적 작가’)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가 강조했던 ‘현재’ 독일어의 무한한 황폐를 산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1900년에는 독일의 고전적 작가들을 더 이상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의 생식불능의 룸펜은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히 새롭고 의외의 ‘고전적 작가’ 무리에 익숙해져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일인자 중 한사람이 다비드 슈트라우스다.

 

슈트라우스 ::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생산적인 것)의 결여 > ①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의 결여) 슈트라우스가 고전적 작가와 모범적 저술가의 명성을 얻는다는 것에서, 교양속물이 지닌 사이비 문화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예술가적으로 엄격한 문화양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발언의 동질성에 도달하는 자다. 일반인의 마음을 끄는 것은 부정적 특성인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생산적인 것)의 결여다. 그런데 진실로 생산적인 모든 것은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② (독일인, 신문제작자 :: 언어적 오류) 독일인은 신문과 잡지들에 무게가 쏠려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독일어는 똑같은 표현법과 똑같은 낱말들의 끊임없는 빗방울이 되어 독일인의 귀에 새겨진다. 독일인의 언어청각은 이 일상 독일어에 길들게 되며 그것이 없으면 고통을 느낀다. 신문제작자들은 이 신문언어에 익숙해져 모든 취향을 상실했으며, 언어적 오류가 고안될 때마다 즉시 그것에 입을 맞추는 전원합창이 울려퍼지며, 뻔뻔스러운 부패로써 언어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독일 국민에게’ 고한 베르톨트 아우어바흐의 격문에서 표현된 비독일적 날조, 에두아르트 드브리안의 멘델스존을 기념하는 축사에서 사용되었던 오물 독일어 등. ③ (속물에게 불쾌한 것 :: 생산적인 것) 그러므로 언어적 오류는 우리의 속물에게는 불쾌한 것이 아니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 일상 독일어의 황야에서 매력적인 청량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의 속물에게 불쾌한 것은 진실로 생산적인 것이다. ④ (현대적 저술가 & 쇼펜하우어) 현대적인 모범적 저술가에게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신조어가 검사대상이 아니라 공적이고 자극제로 평가된다. 쇼펜하우어처럼 ‘현재의 글쓰기 방식이라는 괴물’을 파헤쳐가듯이 일상적 표현방식을 피해가는 특색있는 문장가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무미건조한 것-이용할 대로 이용한 것-무기력한 것-비속한 것이 규칙으로 받아들여지고, 나쁜 것-부패한 것이 매력적인 예외로 받아들여진다면, 힘센 것-비상한 것-아름다운 것은 평판이 나빠진다. 

 

슈트라우스와 수사학적 요구 > ① (첫 번째 요구 :: ‘새로운 비유’에 대한 속물의 요구와 타협) 우리는 첫 번째 수사학적 요구로서, 은유와 비유가 새로워야 한다는 요구를 발견한다. 따라서 슈트라우스는 철도, 전신, 증기기관, 증권거래소에서 비유를 끄집어내는 일로 고심하며, 이 은유는 현대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현대적 슈트라우스가 새로운 비유가 등장해야 한다는 속물의 요구와 타협했던 것이다. ② (두번째 요구 :: ‘빠른 문장과 느린 문장’의 중간에 위치) 두 번째 수사학적 요구로서, 교훈적 내용은 긴 문장으로 광범위한 추상적 개념으로 장황하게 개진되어야 하고, 반면 설득하는 내용은 단문과 껑충껑충 뛰는 표현의 대조를 좋아한다는 요구도 널리 퍼져있다. 슈트라우스의 문체는 사내아이 같은 빠른 행진과 관을 메고가는 인부들의 느린 걸음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다.

 

슈트라우스 :: 생산적 측면의 결여 > ① (저술가 슈트라우스) 고백자 슈트라우스에게 칭찬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술가 슈트라우스를 칭찬하기 위해 그의 책을 샅샅이 탐색했지만, 나는 무척 실망했다. 그의 책에는 언어오류, 혼란스러운 비유, 불명료한 생략, 상스러운 언행, 부자연스러운 문체가 가득했다. ② (생산적 측면의 결여) 그의 책의 바싹마른 황야와 먼지구덩이 속에는, 현재 고전적 산문작가의 긍정적 특성으로 여겨지는 생산적인 측면의 결여를 드러낸다. 슈트라우스의 극단적인 무미건조-굶주린 무미건조는, 현재 교양있는 대중에게 건강의 표시인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들(교양있는 대중)의 건강은 강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굶음에 의해서 획득된다.”<웅변술에 관한 대화> 저자. 그들(교양있는 대중)은 본능적으로 단결하여 이 강함을 증오한다. 사물의 본성과 이름을 뒤바꾸고, 약함이 보이는 곳에서 건강을 이야기하고, 실질적인 건강이 있는 곳에서 병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렇게 다비드 슈트라우스도 ‘고전적 작가’로 통용되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독일어 > 슈트라우스의 독일어는 혼란스럽고 비논리적이며,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독일어는 단순성과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다. 옛사람들은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 반면, 현대인들은 노력하지 않았다. 고대언어와 독일어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슈트라우스에 대한 신앙에 몰두해 있는 자에게 인도의 지혜의 말이 실현될 것이다. “암소의 뿔을 핥는 것은 무익하고 생명을 단축시킨다. 치아만 닳고 아무런 즙을 얻지 못한다.”

 

12. 슈트라우스의 문체 / 독일 속물문화

 

슈트라우스의 문체 :: 룸펜은어 > ① (룸펜은어) 쇼펜하우어라면 슈트라우스의 문체를 ‘지금 시대의 룸펜은어에 대한 예문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처럼 글을 쓰고, 일부는 그보다 훨씬 형편없이 쓰고 있기 때문에, 애꾸눈 슈트라우스는 장님들 사이에서 왕이 된다. ② (슈트라우스 문체의 죄) 그는 청년시절에 헤겔적으로 말을 더듬었고, 그의 귀는 둔감해져서 예술적으로 부드럽고 강력한 음향의 법칙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문장가로서 최고재산을 모두 상실했고, 일생동안 신문의 문체라는 불모의 위험한 유사(流砂) 위에 앉아 있도록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몇시간 동안 유명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명사였다는 사실을 차후 몇시간 동안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밤과 함께 망각이 찾아오고, 우리가 그의 문체상의 죄를 블랙리스트에 기록하는 순간 그의 명성은 쇠잔하기 시작한다. ③ (언어에 대한 태도 :: 니체) 언어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아서 자손에게 남기는 상속재산이며, 신성하고 귀중하고 훼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대하듯 언어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들의 귀가 둔해졌다면, 질문하고 사전을 찾아보고 좋은 문법서를 사용하라. 그러나 대낮에 감히 죄를 범하지 말라!

 

슈트라우스 문체의 죄를 기록한 블랙리스트 :: 니체의 비판 > ‘불명료한 사유와 언어감각의 결여’(p269), ‘언어에 가해진 수치스러운 폭행, ······날림으로 일하는 불량배’(p271), ‘장님을 위한 그림책’(p274), ‘기저귀를 찬 아이의 독일어’(p276), ‘무모한 언어의 예술가’(p277),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한 무지’(p277), // “이보다 더 서투르게 표현할 수는 없다”(p269), “그 표현을 무취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한다.”(p272), “슈트라우스의 문체는 도처에 나쁜 독서를 입증하고 있다”(p273), “잉크는 얼굴을 붉힐 것임에 틀림없다.”(p274), “아무도 그렇게 글을 써서는 안된다. 만약 그가 유명한 산문작가라면, 더더욱 그렇게 써서는 안된다. ······ 이 문장구조는 틀렸다. 삼류작가의 성숙한 귀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p275), “그가 써놓은 것은 룸펜의 은어다.”(p276),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비도 나에게 떠오르지 않는다. ······ 상스러운 낙인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 당신의 청각은 나쁘거나 이상하다.”(p277) “옷을 별로 입지 않는 선생이여, 우리는 당신을 잘 이해한다! 서 있지도 않고 누워있지도 않은 자는 아마 떠다니든가, 나불거리거나 훨훨 날아다닌다. ······ 얼마나 상습적으로 말라비틀어진 문체인가! ······ 3격을 4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는 하나의 오류이고, 모범적 산문작가에게는 범죄가 된다. ······ 동어반복의 어처구니없는 불합리가 실제로 잉크병에서 종이 위로 숨어들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인쇄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p278), “상투어들은 어떤 놀이터도 만들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그곳에서 뛰어돌어다닐 뿐이다.”(p279), “사람들은 비속하거나 불합리한 것을 재기발랄하게 새롭게 만들어내는 데서 ‘고전적 산문작가’를 인식한다.”(p280)

 

독일 속물문화 :: 니체의 비판 > ① (독일 속물문화 비판) 우리는 슈트라우스에 대한 조망에 제한되기는 하지만, ‘고전적 산문작가’를 지각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본 것은 점토로 만든 다리였고, 건강한 살빛처럼 보인 것은 그림물감으로 회칠한 것이었다. 독일 속물문화의 우상그림들을 전복시키는 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속물문화 자체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진짜와 가짜, 독창적인 것과 모방한 것, 신과 우상을 구별하는 법을 잊어버렸으며, 그리고 현실적이고 정당한 것에 대한 건강하고 남자다운 본능이 이 문화에서 상실되어버렸다.” 속물문화는 몰락을 자초했고, 이미 그 문화의 지배권의 표시는 줄어들고 있다. ② (진리를 말하는 것이 반시대적!) 이로써 나는 나의 고백을 마쳤다. 그러나 한 개인(니체)이 전 세계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대들을 슈트라우스의 펜으로 장식하고자 한다면, 그 개인(니체)의 판단은 ‘객관적 증명력이 전혀없는 많은 주관적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여전히 반시대적이라고 여겨지는 동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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