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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프루스트 발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2~206)
희음 / 2018-09-12 / 조회 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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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스완네 집 쪽으로(92~206) 1부 콩브레

 

20180912 희음

 

콩브레에 관한 기억들이 이어진다.

“(···) 콩브레는 오로지 마을을 요약하고 대표하며 먼 곳을 향해, 마을에 대해, 마을을 위해 말하는 하나의 성당에 지나지 않았고, 또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성당은 들판 한가운데에서 바람에 맞서, 마치 양 치는 소녀가 양들을 감싸듯이, 주위에 모여 있는 집들의 양털 같은 회색 지붕들을 크고 어두운 망토로 껴안고 있었다.”(92)

“레오니 아주머니는 남편 옥타브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에는 콩브레를 떠나려 하지 않으시더니, 다음에는 자기 집을, 곧이어 자기 방을, 그리고 자기 침대를 떠나려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슬픔과 무기력, 병과 고정관념 그리고 신앙심이 뒤섞인 모호한 상태로 자리에 누운 채, 좀처럼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으셨다.”(94)
=> 마치 작가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 같다. 스완처럼 작가 자신, 혹은 마르셀이 주로 동일시하는 인물이 있기도 하지만, 그 밖의 인물들의 한 단면이 작가에 대한 간접적인 투사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칩거의 안락함에다 겨울 보내기의 시적 정취를 곁들이기 위해, 밖에서 비나 눈이 내리기를, 심지어는 대홍수 같은 재난이 일어나기를 바랄 정도였다.”(95)
=> 탐미적 욕망에 관한 심리가 이리 쉬운 단어와 문장에 담길 수 있다니.

 

레오니 아주머니의 일상적인 관심, 타인의 일상(사즈라 부인네 개 포함)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꾸준히 내보이는 관심은 대체로 시중을 드는 프랑수아즈에 의해 충족된다.
  
마르셀의 성당에 대한 사랑, 그 아름다움(혹은 추함‘마저도 아름다움의 범주가 되게 하는’)에 대한 찬미 부분.

“또 다른 채색 유리에는 분홍빛 눈으로 뒤덮인 산기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산이 유리창 전체를 서리로 뒤덮어 그 흐릿한 싸락눈으로 부풀어 오른 모습은 마치 눈송이들이, 그것도 여명에 비친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아마도 제단 뒤 장식 벽을 붉은 색으로 물들인 그 여명이었을 것이다. 그 빛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돌에 영구히 부착되었다기보다는, 이제 막 사라지려고 하는 밖의 빛이 일시적으로 비친 것 같았다.)”(112)

“거칠고 잔인한 11세기를 두꺼운 벽 속에 감추었으므로, 거기 드러나는 것은 투박한 석재 덩어리로 막히고 메인 육중한 아치형 종탑 계단이 현관 옆에 파헤쳐 놓은 깊게 파인 홈뿐이었고 그곳 역시 우아한 고딕 양식 주랑이 종탑 계단을 가려서, 그 모습이 마치 버릇없고 투덜대는 형편없는 옷차림을 한 남동생을 누이들이 낯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추려고 애교를 떨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 같았다.”(115)
=> 4차원, 즉 시간의 차원을 느끼게 하는 성당 내부에 관한 묘사

그리고 경이의 생틸레르 종탑.

“종탑 창문은 두 개씩 위아래로 나란히 나 있었는데, 오로지 사람 얼굴에만 아름다움과 품위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정확하고도 독창적인 비율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고, 거기서부터 까마귀 떼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까마귀 떼는 마치 이제까지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멋대로 뛰놀게 내버려두었던 오래된 돌들이 무한한 동요의 요인을 방출하며 후려치고 내몰아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듯이 빙빙 돌면서 울어 댔다.”(118)

“그러고는 종탑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 위해 모은 두 손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경사진 돌들의 그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을 두 눈으로 좇으셨는데, 첨탑의 기세와 완전히 하나가 된 할머니의 시선은 첨탑과 더불어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120)
=>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종탑의 경이로움이 접속하여 만들어낸 풍경은 한층 더 깊은 아름다움으로 격상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저녁에 산책에서 돌아올 무렵, 잠시 후 어머니에게 저녁 인사를 해야 하고 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면, 종탑은 반대로 저물어 가는 빛 속에 너무도 부드러워져서는 마치 창백한 하늘에 놓인 갈색 벨벳 방석처럼 움푹 들어간 모습이었고, 하늘은 그 무게에 짓눌려 자리를 내주려고 가볍게 파이면서 가장자리를 부풀리는 듯했다.”(121)
=> 위 문장이 아름다움끼리의 접속이라면, 이 부분은 슬픔의 전이, 슬픔이 아름다움의 몸을 입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대부분의 방문객을 달가워하지 않는 레오니 아주머니를 기쁘게 하는 기술을 가진 왈랄리의 방문에 관한 서술.

“요컨대 아주머니는 사람들이 그녀의 식이요법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그녀의 고통을 동정하고, 그녀의 미래에 대해 안심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129)
=> 우리는 모두 타자에 대해 이런 분열적인 이중 감정과 다중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은가.

 

프랑수아즈의 훌륭한 요리들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 그녀가 재능을 모두 쏟아부은 작품이면서도 어쩌다 우연히 만든 것처럼 덧없이 가볍게 제공되었다. “난 그만 먹을래요. 더 이상 못 먹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맛보기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은 화가로부터 그림 한 폭을 선물로 받고 (···) 무게와 재료만을 따지는 천박한 사람의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접시에 소스를 단 한 방울이라도 남기기라도 한다면,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작곡가의 코앞에서 일어서는 것과 똑같은 무례를 범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132)

 

분홍빛 드레스 여인(스완 씨 부인)에 관련된, 아돌프 할아버지 집에서의 경험 서술.

화가 지오토의 <우의상 14도> 시리즈에 대한 묘사.

“마찬가지로 죽어 가는 병자의 생각도 보다 실제적이고, 고통스럽고 컴컴하고 내장 깊숙이에 있는 것, 즉 죽음이 그에게 실제로 제시하고 죽음이 그로 하여금 느끼도록 강요하는, 우리가 흔히 죽음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그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호흡 곤란, 마시고 싶은 욕구와도 더 흡사한, 그런 죽음의 이면을 향한 것은 아닐까?”(150)
=> 거창한 이름이나 관념 뒤에 거칠고도 우악스럽게 살아 숨 쉬는 우리 마음과 몸의 실재들, 현실들. 

    

소설 속 인물,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고 회상적인 인물 혹은 사건의 실재성에 관해 역설하는 부분. 한편으론 현실의 인물/사건의 비실재성에 관한 말이기도. 이것은 모두 ‘시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인물의 기쁨이나 불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모두 이런 기쁨이나 이런 불운에 대한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 소설가는 한 시간 동안 모든 가능한 행복과 불행을 우리 마음속에서 폭발시키는데, 실제 삶에서라면 그중 몇 개를 아는 데도 몇 년이 걸리며, 또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들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지각을 방해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도 있다. (···) 여행에 대한 내 꿈도, 사랑에 대한 꿈도 (···) 바로 내 삶의 온갖 힘들이, 단 하나 나의 굴절되지 않은 동일한 분출로 솟아오르는 몇몇 순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 그리고 생틸레르 성당 종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 그 종소리를 전부 합하여 마지막 소리를 들을 때까지 이미 흘러가 버린 오후의 몇 시간이 조각조각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 또,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마다, 이전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이라고 느껴져, 막 울려온 시각이 또 다른 시각 옆 하늘에 새겨지면서 그 두 금빛 기호 사이에 끼어든 작고 푸른 궁형 안에 육십 분이라는 시간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154~158)

 

마르셀이 사랑하는 작가 베르고트를 처음 소개한 친구, 블로크의 방문에 얽힌 일화.

“그날 저녁 식사 후에 그는, 여자란 모두 사랑타령밖에 하지 않으며, 사랑에 저항하던 여자들도 결국은 다 넘어가기 마련이라고 가르쳐 주고 나서는 - 이 얘기는 훗날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처음에는 내 삶을 행복하게, 나중에는 불행하게 만들었다. - (···)”(169)
=> 대쉬 안의 부연설명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마르셀은 어떤 행복과 불행을 앞두고 있을까, 혹은 지나왔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픈 대목에서의 어떤 서두름이나 거의 쉰 듯한 억양 같은 것이 있었다.”(171)
=> 베르고트의 소설 묘사. 목소리가 들려오는 소설을 넘어 억양과, 호흡이 들려오는 소설이라...

 

스완 씨와 나눈, 연극과 배우에 관한 대화 이후, 스완 씨에 대해, 그의 늘상 괄호 쳐진 듯한 행위와 심리에 대해 마르셀은 묻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에 대해 마침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고, 자기 판단을 인용 부호 안에 넣지 않고 표현하고, 웃기는 짓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까다로운 예의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 태도를, 그는 도대체 어떤 다른 삶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일까?”(177)
=> 이 삶, 이 한 번뿐인 삶에 대한 작가의 비통이 스완에게 투사된 듯하다. 이렇게 지나가 버리고 말 미래를 앞당겨 슬퍼하는 듯한, 지나갈 어느 순간을 미리 안타까워하는 듯한...

 

늘 잡을 수 없는 거리에 머물러 있거나 다가갈 때마다 딱 그만큼 멀어지는 대상에 대한 사랑에 관한 역설.

“사회적인 계급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던 나에게, 스완 씨 부인과 스완 양과의 교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의견이 오래전부터 그녀들과 우리 가족 사이에 커다란 거리감을 만들었고, 이 점이 오히려 그녀들에게 커다란 매력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나는 스완 양의 가치가 어떤지를 깨닫는 동시에, 그녀 눈에 내가 얼마나 거칠고 무식해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내가 그녀 친구가 되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욕망과 절망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179)

 

주임신부의 방문과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특히 종탑의 전망대에 오르는 이야기)가 레오니 아주머니를 피곤하게 하고, 결국 대기하고 있던 욀랄리를 사례비만 주고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한 욀랄리에 대한 프랑수아즈의 경멸은 이렇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후한 인심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프랑수아즈가 “나와 같은 사람들, 나보다 더 낫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는데, 그들이 그녀를 ‘프랑수아즈 부인’이라고 부르거나, 그들 자신을 ‘그녀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지 않는 한, 프랑수아즈는 그들을 몹시 경멸했다. (···) ‘사악한 자의 행복은 급류처럼 흘러가나니.’(라신 <아탈리>의 대사)”(194)

 

프랑수아즈가 루생빌르팽 시장에 가야 해서, 점심식사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지는 토요일을, 그들만의 놀이로 여기는 풍경이 펼쳐진다. 토요일의 특별한 외출이 ‘성모성월’ 행사가 있는 5월에 이뤄지기도 했는데, 마르셀 가족은 주로 뱅퇴유 씨 집으로 갔다. 그곳이 몽주뱅(쾌락의 언덕-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취향의 기원이 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권유(강요?)에 의한 산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한 화자의 경험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에 필적하는 힘이 되어준 듯하다.

“그리고 역 앞 큰길은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몸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 그 소리가 서로 응답이라도 하기만 하면, 보리수나무가 있고 달빛이 비치던 역 앞 큰길이 생각나기 때문이다.”(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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