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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젠더 허물기> 10장 발제: 사회 변화의 문제 (0913)
준민 / 2018-09-12 / 조회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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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사회 변화의 문제

-준민 

페미니즘과 사회 변화의 관계는 무엇일까? 더 나아가 어떤 이론이 사회 변화 과정에 관련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연 어떠한 철학 이론이 나의 현실 혹은 사회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버틀러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이루는 데 이론만으로는 충분치 않지만 이론 자체에 변형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입을 위해선 이론이 아닌 무엇인가가 필요하지만 그 속에는 이론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페미니즘 연구에는 다양한 초점이 있고, 그중 어떤 것이 가장 본질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페미니즘의 갈래는 다양한 방향으로 섬세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페미니즘 철학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에는 삶에 관한 질문이 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여성에게 좋은 삶은 무엇인가? 혹은 인식되지 않은 자들에게 삶이란 개념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페미니즘 철학의 목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목적은 사회 변화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러나 저 물음들에 답하는 것은 버틀러 자신에게도 쉽지 않다. 그러한 이유는 ‘이중적 진리’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규범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규범이 우리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사실 말이다. 폭력을 반대하는 것도 규범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우리를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로 나누는 것도 규범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훌륭한 계몽주의 사상가의 말처럼, 하나의 규범을 반대하면 그 반대는 다른 이름으로 규범화되는가? 그렇다면 내가 ‘진짜’ 남자이길 반대한다면, 그 즉시 나는 또 다른 어떤 것으로 규범화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젠더 트러블>과 생존의 문제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안에 만연한 이성애주의라고 생각되는 것을 폭로했고, 젠더 규범의 혼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세계에 대해 상상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솔직히 말해 그들에게 인본주의적 이상에 따라 존엄성이 부여되길, 젠더 트러블이 페미니즘과 사회 이론이 젠더를 사유하는 방식에 문제를 일으키기를 바랐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쓸 당시 이성애주의를 성차 이론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프랑스 페미니즘이 그런 성차 이론을 강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언어가 성차를 통해 존재화된다고 주장하기 위해 언어와 문화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갑자기 근본적인 것이 되었고, 인문학은 그들 없이는 전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근본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가부장적 이론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가부장적 모델과 페미니즘적 모델 둘다 성차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젠더 트러블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됐다. 그 때 부치-펨의 범주도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행하는 표면적인 모방은 어떤 기원을 지칭함으로써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기원 역시 모방만큼이나 수행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부는 자신이 수행성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위치나 상징적 필연성의 위치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차에서 퀴어 이론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버틀러의 이론에는 성차와 젠더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 규범이 가지는 젠더에 대한 관점에 따라 미리 전제된 내용을 갖는다. 그렇게 생긴 것이 언어와 문화 속에 등장하는 조건이 되는 범주로서의 성차이다. 라캉주의자들은 성차에는 오로지 형식적 특징만 있으며, 사회적 역할이나 규범에 관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이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즘 논쟁도 있다. 그 주장은 이런 것이다. 성차의 틀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부장적 지배에서 계속되는 문화적, 정치적 현실을 전면화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캐럴 앤 타일러는 여성이 비관습적 젠더 규범에 들어가는 것은 남성과는 다를 것이고, 젠더 트러블이 이에 관해 충분히 해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런 의견들은 서로 필연적 긴장 상태에 있다. 이런 이론들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장을 구성한다. 

문제는 성차가 반드시 이성애적인가 알고자 할 때 제기된다. 부모의 조합이 어떠하든 그것을 초월하여 이성애적 상징계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다면, 오이디푸스화가 이성애적 욕망을 생산하고 작용한 게 성차라고 주장한다면, 이 논쟁은 끝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이해되는 젠더의 사회학적 개념이 성차로 딱맞게 환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차가 상징질서라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사회적’을 ‘상징적’으로 치환하는 순간 페미니즘은 사회 변화와 멀어지고, 라캉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 길고 긴 시간이 걸리는 상징 변화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다시 <젠더 트러블>로 돌아와보자. 이 책의 마지막은 드랙에 관한 논의로 끝난다. 왜 드랙일까? 거긴 버틀러의 자전적인 이유도 있다. 그는 낮엔 헤겔을 읽고 밤에는 바 다이크로 살았다. 그는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친척도 몇몇 있었는데 그들이 여성성을 훨씬 더 잘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버틀러는 그렇게 속성의 변이 가능성이라는 걸 보았다. 젠더 규범은 살아낼 수 없는 폭력이 된다. 규범은 직업과 집과 욕먕과 삶의 미래를 잃는 대가로만 거부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은 그러한 세계이다. 드랙은 규범으로서 존재론적 전제가 작동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 전제가 재표명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려준다. 푸코가 밝히 듯 무엇이 진실로 간주되는지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이다. 해당 시기의 과학 담론을 따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은 지식의 요소로 존재할 수 없다. 푸코의 관점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지식과 권력이 어떻게 수용 가능한 젠더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형성하는 지를 파헤치고, 이런 규범이 한계 지점을 만나는 방식을 추적하고, 젠더 이원적 체계가 반박과 도전을 받는 순간들, 그 범주의 일관성이 문제시되는 자리를 찾는 것이다. 

드랙 수행자들은 대체로 강력한 의례적 유대가 있는 공동체 속에서 산다. 이 사회적 유대는 젠더 소수자가 스스로 인정받으면서 지속적인 공동체의 유대도 만들 수 있다는 환상같은 문화적 삶을 만들낸다. 환상같은 문화적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 때 환상은 가능한 양태를 확립하며 다른 곳이 된다. 환상이 구현될 때 그 다른 곳이 획득된다. 그러나 환상은 그저 마음 내부에 있어선 안된다. 관계성을 통해 구체적 표현을 양식화 해야 한다. 몸은 공간속에서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속에서 변화한다. 몸은 규범을 차지하고, 넘어서고, 수정한다. 규범에 순응하고 저항하는 것은 빈번히 삶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생존 자체가 긴급한 안건이 된 사람들에게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매우 중요해진다.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다>는 유색인종 젠더 소수자들간의 환상적인 유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실제적인 비인간은 타자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개념은 타자에 반대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들은 현실에서 인간의 경계선을 만든다. 이들은 인식 가능성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버틀러는 억압이라는 것 자체가 인식 가능한 주체들이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 주체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이들은 억압 당하는 타자로 존재한다. 그러나 비실제적인 것은 다르다. 그들은 아직 인간으로서 접근권을 얻지 못한 인식 불가능한 인간들이다. 그러니 새로운 젠더 형태의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규범에서 정치학으로

버틀러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가져온다. 하버마스는 규범을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만한 기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정치적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은 배제될 수 밖에 없을까? 하버마스는 언어를 매개로 이상화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 작용은 타당성 주장을 넘어 진리를 주장하는 것 이상까지 포괄한다. 여기서 규범 또는 언어는 행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며 이상적 영역에 속하게 한다. 정말로 젠더 인식 가능성은 그런 행위가 되어야 한다. 끝판엔 이상적 영역에 속할 그 행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규범이 억압적으로 통합하지 않고 젠더 인식 가능성을 사회적 통합으로 이끌어줄지 알 방법이 없다. 우리가 믿는 어떠한 규범도 배타적이거나 폭력적일 수 있다. 규범이 사회 통합적이라면, 그 규범이 어떻게 사회 질서를 부술 수 있는가? 규범은 가설적 의미에서만 사회적이다. 규범을 전제하지 않고선 공통된 지향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요점이라면, 이 경우에 공통성이라는 건 무엇인가? 그 공통성은 자신에 도전하는 것을 배제함으로서 제도화된다. 규범이 윤리학과 연결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보존한다고 말할 때, 이 때 말하는 인간의 범주는 서구의 합리주의 형식적인 것이다.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면, 우리가 아직 인간을 모르는 것인가?

인간이라는 개념은 국제 인권 담론과 정치성 기획에 핵심적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서구적으로 혹은 미국적으로 이미 정의되어 있는데 국제적인 권리와 의무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는 비제국주의적인 국제 인권 개념이 무엇이며, 그것이 문화적 장소를 가로지르는 방식과 수단에서 배움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학으로 재의미화하기

재의미화는 정치학으로 작용하는가?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보편적인지 설명하는 기본의 관습은 충분하지 않다. 민주적 변화는 근본 범주가 더 포괄적으로, 무수한 방향에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수정이 좋을리는 없다. 두 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기 전, 남아공 흑인들 몇 사람은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히틀러가 세계적으로 생명에 대한 권리를 수정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혁신이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 위의 두 개의 예에서 봤듯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규범은 재의미화에서 비롯될 수 없다. 그 규범은 급진적 이론과 실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폭력이 덜한 미래는 무엇일지, 문화적 특수성과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보편성은 무엇일지가 토론되어야 한다. 이 때 어떤 형태의 공동체가 배제의 폭력을 강화했거나, 저항했는지 판단해야한다. ‘생명의 권리’는 낙태 합법화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이 때 페미니스트들이 반생명주의자로 불리자 그들은 ‘누구의 생명권인가?’를 되물었다. 생명이 무엇인지,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점들은 기존의 생명권이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폭로했다.

 

안잘두아, 스피박과 함께 주체 너머로

안잘두아는 자신의 책을 원주민의 방언 및 스페인어와 영어로 쓴다. 그래서 독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언어를 읽게 만든다. 그는 사회 변화를 위해서 일원화된 주체를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그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인 혼합물로 인해 고심한다. 이 모든 가닥들은 단일하게 모아지지 않고, 동시다발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실현한다. 그는 문화 번역을 통해 일원적이지 않은 다원적인 주체가 형성된다고 본다. 다문화적 이해를 만들 가능성은 오로지 지속적 번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피박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스피박은 분열된 주체 개념을 말한다. 작품 속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이 그들을 식민화하는 노력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어떤 것도 하나의 단일한 주체로 있을 수 없다. 스피박은 부족민 여성인 마하스웨타 데비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데비의 글쓰기가 ‘부족적’인 것을 재현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족적인 것을 경유해 위기에 놓인 세계성에 대한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지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스피박을 통해 1세계에 번역된 데비, 이 횡단이 매끄럽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저자성 자체가 균열된 것이다. 스피박이 보기에 하위주체 여성은 서구 주체의 범주와 근대성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다. 하위주체의 글쓰기는 역사의 바깥에서 혹은 근대성의 바깥에서 사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성’이라는 것은 문화 소거의 한 형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구적 가치를 보존한다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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