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페미니즘] 0915 <백래시> 세미나 발제
준민 / 2018-09-15 / 조회 1,021 

본문

11장 반격의 수뇌부, 네오콘에서 네오펨까지

Neo-conservatism 의 줄임말인 네오콘은 신보수주의를 일컫는다. 팔루디에 따르면 미국의 이 정치세력은 반격에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접어들자 진보적인 정치세력들도 반격에 동조하게 된다. 반격에 동조하지 않은 정치세력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1990년대 초엔 레이건주의 성향의 조지 길더가 물러나고 좌파 지식인 크리스토퍼 레시가 자녀가 있는 부부의 이혼을 법적으로 금지시키자며 등장했다. 또한 반격 전문가 중에는 자신을 네오 페미니스트라고 분류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현재 수정주의적인 책을 발간하는 1970년대 페미니스트 작가들이었다. 반격의 전문가들은 반지성주의적이었다. 정확한 연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했다. 때문에 여성의 문제는 미시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가 아니라 누구든 연설을 풀어놓을 수 있는 병폐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이러한 반격에 이론가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핵심은 반격의 이론가들을 심리학 사례 연구 대상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이 사상가들이 페미니즘에 대판 태도를 형성하는 데 무엇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찾는 것이다.

조지 길더 : “미국 제일의 반페미니스트”

조지 길더는 젊었을 때 진보적인 성향의 공화당 상원 의원의 대변인이었다. 당시 그는 어떻게 전쟁에 비판적이면서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는지 배웠다. 길더는 그 후 달리기를 하다가 최루 가스를 맞아 반전 운동에 연루되기도 했었다. 그는 국가적인 격동의 현장을 다루는 사회 평론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버드스퀘어로 집을 옮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닉슨 대통령의 보육 법안 거부권 행사를 칭찬하는 글을 썼다가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당했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은 길더를 쫓아내기 위해 로비를 했으며 그를 이용해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다. 길더 자신도 그 하나의 글 때문에 미디어의 ‘최전선’에서 관심을 받게 됐다. 그 때 그는 자신이 미국 제일의 반페미니스트로 명성을 떨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엔 페미니스트인게 미사여구처럼 당연했고, 자신이 남성 우월주의자가 되어 페미니즘에 지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 후 길더는 <성적인 자살> <벌거벗은 노마드> <눈에 보이는 남자> <남자와 결혼>라는 책을 냈다. 모든 책에서 그는 직장에서 남성들을 몰아내는 여성들과 그들을 격퇴할 배짱이 없는 남성들을 다룬다. 

앨런 블룸 : 페미니스트 지배에서 도망친 난민

앨런 블룸이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지적한 해로움의 원인은 모두 페미니즘에 있었다. 여성들은 요구와 욕망에 가득 찬 반면 남성들은 활기와 정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유롭기 위해 여성을 남성의 명령에게서 해방시켰는데 그가 보기에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블룸은 그의 저서가 당시 상황을 최소평가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너무나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대학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철권 통치를 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관점은 ‘정설’이 되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플라톤을 가르치면서 남자 일색인 사회사상위원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포탄 충격에 시달리는 난민에 빗대었다. 교수직과 출판권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넘어갔다는 생각은 블룸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학 교정의 많은 남성 교수들이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4년제 기관에서 종신을 보장받는 교수들 중 여성은 10퍼센트 뿐이었다. 당시 인문학 교수들의 기회가 줄어들었다면 그 이유는 페미니즘 연구보다는 대학들이 돈이 되는 의대와 경영대에 재정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페미니즘의 최대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의심을 드러낸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영혼을 해체하라고 주장하면서 보편적인 거세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에겐 현대사회의 대학에서 ‘노처녀 사서’처럼 되어버린 남학생과 남성 학자들만 보인다. 

마이클 레빈과 마가리타 레빈 : 남자아이는 요리를 하지 않고 여자아이는 12이상의 수로 나눗셈을 하지 않는다

철학 교수인 마이클 레빈은 <페미니즘과 자유>에서 페미니즘을 “전체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민주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그는 그 책을 쓴 이유가 자신이 본대로 페미니즘을 드러내라는 양심의 소리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양심으로만 책을 썼기 때문에 별로 맞는 말은 없는 듯하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직장에서 성공한 여성은 결혼과 모성을 희생시킨다. 성 역할은 선천적이다. 남성이 수학을 더 잘한다. 그의 아내 마가리타 레빈은 예시바 대학의 수학 철학 교수이다. 레빈의 가족은 그의 주장과는 사뭇 달랐다. 레빈은 그에게 보채는 아이들 때문에 자주 인터뷰가 중단됐으며, 그의 아들은 요리를 하고 싶어했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더 똑똑하고 심지어 수학도 더 잘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보다 더한 반페미니스트다. 그는 과학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공격 때문에 뚜껑이 열렸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이 과학 전공 학과에 입학을 허가받게 되면 여학생 특별 대우나 “비남성적인” 글을 싣기 위한 요구가 있을거라고 반발했다. 팔루디는 마가리타가 반페미니스트가 된 이유가 페미니스트 칼럼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학과에 여성이 많아지면 마가리타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위인” 중 한명이 되기 어렵다. 팔루디는 마가리타가 비학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차별화시키고 싶은 것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워런 패럴: 해방된 남자의 변심

그는 1970년대 초만해도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을 때마다 우울증에 빠지는 것을 봤다. 워런의 어머니는 일을 할 땐 남편에게 한 푼 한 푼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49살 밖에 안되는 나이에 추락사했고, 워런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순식간에 여성운동을 납득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명 남성 페미니스트 저서가 될 <해방된 남자>를 집필했다. 그는 저서와 프로그램을 통해 남성성의 과시와 폭력의 관계를 폭로하려 했고, 페미니즘이 남성 또한 해방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열정은 미디어가 페미니즘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자 식어버렸다. 70년대 짧았던 해방 드라마에서 80년대가 되자 그는 피억압자인 남성을 위해 일어날 때라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남자들은 왜 그럴까>에서 그의 주장을 뒤집는다. 여성이 노예 같은 남성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패럴의 우주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는 잘나가는 여성들이다. 아내와의 이혼이 이유였을까? 그의 아내는 하버드를 나와 IBM에서 임원이 됐고, 그와 이혼한 뒤 다른 IBM 임원과 재혼했다. 패럴은 그의 파경이 아내의 높은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블라이: ‘요구르트나 먹던 사람들’을 ‘야성적인 남성’으로 변신시키다

그는 1960년대 평화운동가였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문학적 저항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베트남 문화를 짓밟는 미국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문학에도 쓴 소리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운동도 지지부진해지고 그는 더이상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 것을 남성성 실추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진짜 남자’ 이미지가 없다고 말하면서 존 웨인과 상극인 우디 앨런이 정말 나쁜 예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남성들을 독려하기 위한 시를 쓰고, 남성 전용 워크숍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블라이는 다시 군중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에게 가장 남성적인 동물인 숫양처럼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참가자 중 한명은 팔루디에 엉덩이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블라이는 남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폭력까지 포함시켰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자신에 말해 거부하는 여자들의 아구창을 날려버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권력을 남성인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는 방법을 탐구했던 것이다.

실비아 앤 휴렛: 네오페미니스트의 시시한 작업

실비아는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이 특별노동보호법을 없앨 것이고, 일반 여성들을 돕는 데는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블루칼라 여성들이 힘들게 얻어낸 보호법의 특혜를 날려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남녀평등헌법수정안에 반대하는 유권자가 상당히 많을거라 단언한다. 그러나 그는 노동계급 여성들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으며, 익명의 노동자 한명만을 인용했다. 그의 주장과 반대로 한 공장 노동자는 공장 내 자신이 아는 모든 여성 노동자가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을 지지한다고 증언한다. 휴렛은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뒤통수를 쳤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페미니즘이 모성이 아닌 평등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휴렛이 이런 논지를 내놓자마자 미디어는 그를 추앙했다. 하지만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은 ‘보호법의 혜택’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미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서유럽의 ‘사회적 페미니스트들’과 대비시키면서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에게 적대적”이고 “모성에 적대적”인 입장 때문에 오늘날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고, 그 반대로 서유럽의 페미니스트들은 육아와 출산휴가 수당을 쟁취한 일등 공신이었다. 

베티 프리던: 마케팅 도구로서의 수정주의

프리던은 1981년 출간된 <두 번째 단계>에서 여성운동을 휴렛과 똑같은 방식으로 비판했다. 가령 페미니즘이 모성의 요청을 무시했다는 게 하나의 예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이 더 우아한 스타일로 가야하는데 너무 적대적인 전술에 집중했다고 비판한다. 페미니스트 저메인 그리어는 중매결혼과 순결을 옹호하고, 결정론적 입장을 취하는 <섹스와 운명>을 내놓았다. 그리어는 <아빠, 우린 당신을 몰랐어요>를 내면서 어머니를 “주방의 미친 개”라고 부르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아빠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악마화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쓴 수전 브라운밀러는 여성운동이 남성과 여성 간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이를 간과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미디어들은 좋아 날뛰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의 관에 또다른 못을 박았다고 표현했다. 베티 프리던이라는 이름은 여성해방운동과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여성운동이 “이름 없는 새로운 문제”를 양산한다고 비난했다. 그에 따르면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세계에 들어가는 데 집착하다 보니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간과했다. 그는 성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피해자 상태에 젖어 우리가 가진 생식 능력의 원천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여성운동이 별문제도 아닌 낙태권 같은 것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린다고 말하고, 여성의 권리가 미국 여성들에게 가장 긴박한 사안은 아니라고 말했다. 프리던은 왜 자신의 공을 차버렸을까? 주디스 스테이시는 우익이 득세하는 80년대가 노화하는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했을 거라고 진단한다. 팔루디는 프리던에 경우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말한다. 바로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프리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만한 명령과 자기중심적인 각색을 애호하고, “내가 여러분들을 역사로 이끌었다.”와 같은 표현도 썼다. 이런 그에게 미디어의 외면과 더불어 “급진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권력 구조에서 부당하게 밀려났다는 생각은 그를 한 순간에 바꿔버렸다. 

캐럴 길리건: 다른 목소리인가 아니면 빅토리아시대의 메아리인가?

1980년대에는 여성적인 특성을 찬양하는 저서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런 장르의 저자들은 대체로 여성들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반격에 참여하는 듯했다. 사실 이런 주장의 토대들은 페미니즘 연구에서 발아했다. 1970년대 말 여성의 특수한 ‘차이’를 강조하는 ‘관계적’ 페미니즘 학파가 그것이다. 1980년대가 되자 여성의 특수한 미덕에 대한 논물이 넘쳐 났다. 원래 페미니즘 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예찬하는 게 아니라 그 근원을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그런 과제는 대체로 폐기되었다. 때때로 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손쓸 수 없는 것처럼 제시했다. 어떤 학자는 남성들이 생물학적으로 뼈가 가늘지 않아서 가사노동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성차는 권력 관계를 탐색하는 기회를 줬지만 이를 정당화하는 다른 유혹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가정학’을 찬사하고 여성에게는 도덕적 우월성이 있기에 그에 따른 특수한 권리를 요구했지만 역시 입법가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심하게는 성차별 소송의 변호사들과 반페미니스트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했다. 캐럴 길리건의 82년 책 <다른 목소리로>는 여성의 ‘차이’에 대한 가장 친숙한 상징이 됐다. 길리건은 책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대비시킨 것은 두 성에 대한 일반화된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가지 사고 양식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해석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유전적이진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길리건은 스스로 오해의 여지를 많이 남겼고, 그래서 페미니즘의 적들이 그녀의 주장을 입맛에 맞게 이용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2장 그건 모두 당신 마음속에 있어요

멜빈 킨더와 코널 카원은 <똑똑한 여자/멍청한 선택>과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남자가 떠나가는 여자>를 쓴 작가들이다. 두 책 모두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책의 주장은 이것이다. 여성이 독립하면서 남자는 성에 차지 않게 “똑똑”해졌고, 그래서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결혼을 미루는 너무 “멍청”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이되자 이들은 또 여성들이 너무 결혼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 탓을 간단히 여성운동에게 돌린다. 팔루디는 이 탓을 카원과 킨더 같은 자기 계발서 작가들에게 돌린다. 80년대에 여성들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자기 계발서와 상담소였기 때문에, 이런 대중 심리학 치유서들은 여성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주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전문가들은 치유 도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남자를 손에 넣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과 요구만을 늘어놓았다.

1단계: 페미니즘 순화 요법

1980년대 한 유명 자기 계발서는 사이비 페미니즘의 극치에 달하는데, 책에는 남자의 모든 요구에 맞춰주면 남자를 차지하고 결혼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런 치료서들은 페미니즘의 표현을 들먹거린다. 70년대 계발서들은 그래도 개인적 성장과 권리를 요구하라고 발표했다. 반면 80년대 계발서들은 사회의 요구에 그저 자신들 맞추라고 요구한다. 이들의 주된 타겟은 싱글 여성이었다. 88년에 상담사 수전 페이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싱글 여성들이 적대적인 사회 환경과 싸우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부조리를 극복하는 수단은 그저 싱글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80년대 치료사들은 남성이 변화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남성들에게는 문제가 없고, 여성들이 느낀 실망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청한다. 이는 자칭 반페미니스트들의 방법론보다 더 악랄한데, 미디어들은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는 ‘페미니스트’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프라이스 부부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차용하면서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친다. 직업의 열망을 축소해 연애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손에 넣고”, 순결을 지킴으로써 미래의 남편 앞에서 “권력을 손에 넣으라!”고 말이다.

토니 그랜트: 여성성에 굴복하라

미디어 최고의 심리학자 토니 그랜트는 미디어와 저서를 통해 모든 여성들을 자기 식대로 식민화한다. 그는 싱글로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만 책을 낼 때만큼은 반격의 정서를 반영한다. 그러고선 책이 잘 팔리는 게 ‘완벽한 타이밍’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프로이트를 통해 생물학은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하는 여성들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융을 공부하고 평등이 여성들을 아마존으로 몰아넣는다고 생각했다. 그랜트의 분석은 신여성은 자기 주장이 강하기 대문에 비정상이고,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사랑과 행복을 부정하게 만드는 거대한 거짓말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또 성평등은 여성들에게 문란함을 퍼뜨렸고, 성공한 여성들은 게걸스럽고 소모적인 괴물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하나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약점을 없애기 위해 순식간에 결혼에 도달했고, 자기가 쓴 책처럼 살기 위해 은퇴도 선언했다. 그러나 1년 반만에 “난 일이 없으면 섭섭해요.”라고 하면서 다시 활동을 재기했다.

2단계: 과하게 여성스러운 여성을 위한 요법

로빈 노우드의 <너무 사랑하는 여자들>은 여성의 관계 중독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도시들이 모임을 지원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도움받는 것은 맞지만 그리 실용적이지는 못했다. 소극적인 수용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포기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평온을 많이 제시했다. 80년대의 많은 심리 치료사들은 남편과 연인의 신체적, 언어적 학대에 신음하는 수백만 여성들의 증언을 마주했다. 그러나 노우드는 이를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 취급했다. ‘관계 중독’과 ‘남자 중독’과 같은 표현은 문제의 내면화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왜 폭력적인 남자들이 많은지가 아니라 왜 여성들이 폭력적인 남자들을 선택하는 지를 의문시했다. 이런 진단은 사회 변화 가능성을 축소시킬 수 밖에 없다. 노우드가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은 자조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석하는 것 뿐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지휘하는 법 대신 신비한 힘에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높은 곳에서 오는 힘에 복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80년대 말에 등장한 ‘상호 의존성’의 모델은 거의 여성이었다. 상호 의존성의 원래 모델이 알콜중독자의 아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치료 모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는 직업 시장의 척박함마저 개별 여성의 사적인 정신이상으로 몰고가는 데까지 확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자신들의 치료방법이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상호 의존성 운동은 여성운동의 심리학 버전이고, 노우드는 이런 모임들을 70년대 초 의식 고양 모임에 빗대기도 했다. 70년대 의식 고양 운동은 참가자들에게 행동하고, 발언하고, 성장하라고 촉구했다. 어두운 방에서 소극적이며 열정도 없애는 ‘너무 사랑하는 여자’ 모임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너무 사랑하는 여자’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도 각자 변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강해지고 싶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왔지만, 갈 때는 내 안에 작은 소녀를 발견했다는 둥 엉뚱한 결과만을 가지고 갔다. 이는 확실히 유년기로 후퇴하는 과정이다. 

여성스러운 마조히즘, 1980년대 스타일

마조히즘은 고통에서 성적 쾌락을 얻는 이들을 말하는데 이는 얼마가지 않아 여성의 정신을 규정하는 표현이 됐다.여성들이 학대당하는 건 그들이 학대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70년대만 해도 선천적인 마조히즘은 이론보다는 농담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85년에 일부 정신분석 전문의들은 마조히즘은 DSM에 포함시킬 때가 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DSM은 정신의학에서 권위 있는 저작이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정신의학회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테레사 베르나르데스는 미국정신의학회가 여성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진단을 세 가지나 추가하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마조히즘적 성격장애, 두 번째는 월경 전 불쾌 장애, 세 번째는 성도착적 강간 장애였다. 이 중 마조히즘적 성격장애의 아홉 가지 특징은 이상할 정도로 포괄적이었다. 팔루디는 이것이 여성의 사회화 과정을 사적인 영역에서의 정신적인 기능 이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악은 이런 진단이 구타당하는 여성들을 마조히스트 취급할 때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학대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거나 혹사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관계를 유지함. 이것은 현재에도 경제권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당하고 있는 부조리이다. 베르나르데스가 우려를 제기하자 전통적인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가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패널들은 여성 심리 치료사들에게 불같은 분노를 내뿜었다. 여성들이 지배하는 심리학 직종이 저비용 단기 치료법을 가지고 정신의학의 돈벌이를 축내고 있다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었다. 레노어 워커는 공청회에서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마조히즘 포함을 반대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반격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맞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응을 할 경우 구타자의 화만 더 돋울 뿐이라는 사실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또한 학대자와 계속 같이 지내는 것도 고통을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집을 나갈 경우 더 심한 폭력을 마주해야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여성들에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조히즘과 월경 전 증후군은 모두 DSM에 포함되었다. 강간 장애는 일시 보류되었다. 저항이 심하자 이들은 두 진단을 모두 부록에 싣기로 했다. 이 새로운 여성 질환은 그렇게 공식 문헌에 이름을 올렸다.

 

 

댓글목록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