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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혐오 발언: 1장 발제 (1011)
삼월 / 2018-10-11 /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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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과 수행성의 문제

 

J. L. 오스틴은 《말로 무언가를 행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말과 수행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먼저 오스틴은 언어의 발언내행위(말로 인해 수행되는 행위)와 발언효과행위(말의 결과로 수행되는 행위)를 구별한다. 《말로 무언가를 행하는 법》이라는 책의 제목은 네 가지를 암시한다. 1) 발언효과행위적 방식의 행함과 영역이 있음, 2) 도구적인 ‘말’의 영역이 있음, 3) 행위에 선행하는 의도가 있음, 4) 말은 말이 행하는 것과 구분됨. 버틀러는 오스틴의 이 책을 말이 ‘행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발언효과행위적 말의 수행성보다, 발언내행위적 형태의 말에 대한 강조로. 이때 행함은 도구적이 아니라 이행적이 된다.

 

말이 무언가를 행한다면, 말은 의미작용인 동시에 무언가의 실행이어야 한다. 수행문의 이런 ‘유사 행위’적 성질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질서의 성취처럼 보인다. 버틀러는 여기서 ‘행위자와 행위 간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설명과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들을 비판한다. ‘행위 이전에 행위자(의 의도)는 없다’는 니체의 말은, 도덕이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체에게 지우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이 과정은 주체를 상처 주는 행위의 의도적 기원자로 고립시킨다. 주체는 상처라운 고통스러운 결과의 기원으로 날조되고, 상처를 주는 행위는 지속적 행위 중 현재형의 ‘행함’이 아닌 ‘개별적 행위’로 환원된다. 그러나 니체에게 행하기 뒤에 ‘존재’는 없으며, ‘행위자’는 행위에 부가된 허구일 뿐이라고 설명된다.

 

버틀러는 니체의 책 《도덕의 계보학》의 원문에서 ‘행위자doer'라고 번역된 단어가 ’행위자‘의 개념을 범법자로 확립시키는 데에 주목한다. 주체의 행위 기원은 허구적으로 확보되고, 도덕적 인과관계가 주체와 주체의 행위 사이에 설치된다. 주체와 주체의 행위는 시간적으로 광범위한 ‘행함으로부터’ 분리되며, 행함은 도덕적 필요에 앞서는 듯 보인다. 니체에게 주체는 책임과 관련한 도덕적 담론의 필요 내에서 존재하며, 비난의 필요가 행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처벌이 없다면 ‘행위’도 없다. 여기서 버틀러는 니체에게 도덕적 비난의 주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행위자에 선행하는 의도가 없다고 하면, 도덕적 비난 역시 의도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주체를 탄생시키는 처벌, 즉 법이 존재하는 것인가. 니체는 ‘행위자는 행위에 부가된 것’이라는 설명으로 이 문제를 피해간다. 또 행위자에 행위가 부가되었기 때문에 행위의 기원과 결과(상처의 원인)는 여전히 행위자에 귀속되어 버린다.

 

상처 주는 권력의 기원

 

한편 상처와 주체를 연결시키고, 사회적 상처 협상을 위한 장소로 사법영역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은 주체와 주체의 행위를 고유의 출발지점으로 간주한다. 버틀러는 여기서 상처를 생산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 지연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버틀러는 말과 상처의 관계를 인과관계나 의도의 실현이 아닌, 역사성과 폭력 내에서 구체화되는 일종의 담론적 이행성으로 보고자 한다. 이제 문제는 이행성과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력 간의 문제가 된다. 

 

법적 해석의 폭력을 ‘법관들이 근대 국민-국가의 도구로 사용하는 폭력’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다. 여기서 말을 통한 폭력이 국가의 행위가 될 수 있다면, 당연히 시민의 행위도 될 수 있다. 시민들 역시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리는 한편, 누군가의 자유를 부인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행위자는 국가(정부) 뿐이라고 가정된다. 최근에는 시민들에 의한 소수자 집단 구성원에 대한 폭력이 늘어났기 때문에, 법의 해석적 폭력의 주체가 시민들로 변경되었다. 시민들은 국가처럼 행위하며, 국가 권력은 시민주체에 의해 행사되는 권력으로 재형태화된다. 이때 혐오발언 기소 지지자들이 국가권력을 시민주체의 행위능력과 효과로 재배치하기도 한다. 국가를 법적 강제의 중립적 도구로 본다면, 국가권력과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중단될 수 있다. 국가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 시민에 의한 피해로 옮겨가면서, 권력이 담론 속에서 담론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상처를 주는 말이 국가 행위가 아닐 경우 언어폭력에 대한 분석도 변화한다. 혐오 발언의 문제를 통해 법원은 해석이라는 폭력을 수행하면서 법원의 공정함과 효율성을 전제하고 있다.

 

수행성이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 권력은 어떻게 사유되며 누가 그 권력을 가지고 있을까? 주체는 어떤 말의 명명 속에서 모욕적으로 구성된다. 그 상처 주는 권력은 말하는 주체의 권력이 아니라, ‘어떤 시간을 통해 축적된 권력’이다. 그 권력은 개별주체가 발언하는 순간 은폐된다. 주체는 용어를 인용하는 것뿐이며, 인용되는 것은 ‘화자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그런 발언이 전달하는 상처의 원인은 발언이나 발언자일까? 아니면 그 발언 안에 인과관계나 의도로는 환원할 수 없는 어떤 타동성이 있는 것일까? 버틀러는 이 발언의 반복성이나 인용성을 볼 때, 다시 니체를 끌어와 설명하려 한다. 수행문을 인용하는 주체는 수행문 자체의 사후적이고 허구적인 기원으로 일시적으로 생산된다.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주체는 호명을 통해 동원되며, 일시적인 지위를 가질 뿐이다. 그러나 주체-효과는 사후적 도치에 의해 인용의 결과가 되며, 호명의 결과는 주체와 주체의 발언의 ‘기원’으로 위장된다.

 

만일 혐오 발언을 기소한다면, 언제 어디서 기소가 시작되어 끝나게 될까? 이런 노력은 회부될 수도 없는 ‘역사를 기소하고자 하는 노력’과 같으며, 결국은 책임질 수 있는 주체를 만들어 역사에 대한 부담을 떠맡기기 위해서만 설치될 수 있다. 이는 주체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기소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재판에 회부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최종적으로 기소가 가능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은 확실히 상처를 줄 수 있으며, 우리는 각종 혐오 발언에 저항해야 한다. 상처를 줄 수 있는 스스로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이해가 이 저항과 관계가 있을까? 만약 어떤 수행문이 성공한다면, 성공의 이유는 그 언어행위가 과거의 행위를 반향시키며 선행하는 일련의 권위적 관습의 반복이나 인용을 통해 권위의 힘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언어행위는 그 자체로 의례화된 관습이다. 수행문은 동원된 관습에 의지하고 그것을 은폐하는 정도까지 작동한다. 어떤 용어나 진술도 권력의 역사성을 축적하거나 위장하지 않고는 수행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말이 상처를 줄 때도 권력의 축적과 위장이 상처를 작동시킨다.

 

혐오에 대한 처벌과 자유 제한의 문제

 

한 백인 소년이 흑인 가족 집 앞에서 십자가를 불태운 후 혐오 처벌에 대한 조례로 고발된 사건. 그러나 법원의 해석과 처벌 역시 상처 주는 말인 혐오 발언과 다르지 않다. 표현에 대한 독해는 담론 영역에 대한 권력을 고찰한다. 법원은 자유를 제한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게 된다. 혐오 처벌을 지지하더라도, 법원의 판결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혐오를 한 개인의 의도로 해석해 버린다. 사건의 환유 연쇄와 편집증적 상상력은, 표현의 자유가 그것을 불태우는 자들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영화를 보고 나온 흑인 청년들이 백인 남자를 폭행한 사건.(영화 속에서 법은 시민 보호에 실패하며, 불법성이 흑인 인권을 위한 유일한 방편이 됨) 법원의 말은 상처를 주는 말의 권력을 결정할 권위를 부여받음으로서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한다. ‘판결’은 특별한 폭력을 강조하며, 법의 말이 되자마자 위장되고 중시된다. 법적인 모든 언어는 상처 줄 수 있는 잠재적 권력과 관련이 있다. 법원의 표현에 대한 이런 모순적인 사용들은 외설에 대한 확장을 지지해왔다. 법원이 포르노나 성차별에 대한 금지를 명시한 법들에서 법원은 그 내용이 아닌 표현이 수반하는 효과들에 근거해 표현들을 금지한다.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를 확대하려는 의지가 외설이 일종의 ‘도발적 표현’이 된다고 주장하는 의지와 시각적 재현물이 상처를 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예증된다고 본다. 동성애에 대한 묘사 등을 사회적 문제가 아닌 심미적 문제로 환원시켜,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조된 성적 보수주의는 인종차별적인 폭력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나란히 작동한다. 한편 법원이 혐오범죄를 처벌하지 않으려 할 때 내세우는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은, 법원 스스로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혐오 발언에서 포르노그래피까지

 

매키넌은 국가권력이 포르노그래피 산업 편에 있다고 본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를 일종의 혐오 발언으로 보고, 혐오 발언 규제를 지지하는 논증이 포르노그래피 규제 지지 논증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여성 혐오의 사회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포르노그래피의 시각적 영역이 신의 수행문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매키넌은 시각적인 것을 언어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시각적 묘사를 효과적인 수행문으로 치환한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명령된 행위는 성적 종속의 행위이며, 그 행위를 함으로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현실은 성적으로 종속된 지위로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 환상의 작동이 사회적 현실의 구성에 어느 정도까지 결정적인가에 대해 매키넌과 견해를 달리 한다. 포르노그래피의 모욕이 곧바로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에 놓여있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 포르노그래피를, 말하는 주체로 비유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이런 시각은 단지 무언가에 책임을 지우기 위해 기소 가능한 위치에 놓으며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과 같다. 포르노그래피는 이 모욕적 텍스트의 폐지로는 사라지지 않을 어떤 고집스럽고 잘못된 상상적인 관계의 텍스트를 재인용하고 과장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수행성은 주권적 통제 하에 있지 않다. 우리는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그대로 수행하려 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텍스트에 대한 다른 독해도 가능하다. 텍스트가 한 번 행위한다면, 다시 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다르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수행성과 정치에 대한 대안적 독해로서 제기된 재의미부여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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