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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혐오발언: 1장 후기 - 혐오발언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 대하여
삼월 / 2018-10-22 / 조회 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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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언어의 수행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지난 책들에서 버틀러는 수행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해 여러 번 중요하게 언급했었다. 젠더의 수행과 마찬가지로 버틀러는 언어의 수행성도 믿지 않는다.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와 관련해 중요하게 인용되었던 니체의 문구가 다시 인용된다. ‘행위 이전에 행위자는 없다’ 주체가 먼저 있어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어떤 행위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기 위해 행위자라는 허구의 주체가 사후적으로 소환될 뿐이다. 혐오발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발언의 수행자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말을 인용할 뿐이다. 인용되는 것은 ‘화자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 혐오가 있다. 그러나 혐오발언이 수행되는 순간 배경으로서의 역사는 사라지고, 혐오발언의 주체는 혐오의 기원으로 고립된다. 혐오발언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 대한 성찰은 어려워진다.

 

법은 처벌의 수행이라는 폭력을 통해 행사되는 권력이다. 일부 학자들은 시민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폭력이 법의 폭력성을 닮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시민들의 폭력행위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폭력행위를 닮아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국가를 법적 강제의 중립적 도구로만 본다면, 국가권력과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불가능해진다. 국가가 폭력의 주체가 아닐 때도 국가는 중립적 역할을 강조하며, 유일하게 혐오발언을 규정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 자격을 통해 국가는 무엇이 혐오발언인지를 규정하면서, 혐오의 의미를 생산한다. 법원의 해석(판결)이라는 폭력은 법원의 공정함과 효율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그 판결마저도 사후적이며, 혐오발언의 청자가 받은 상처가 판결에 중심에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버틀러가 혐오발언의 주체를 단죄하지 말자거나, 그런 단죄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혐오발언은 언제나 인용을 통해 이루어지며, 발언 수행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인용되는 내용은 공동체의 혐오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발언이 이루어지는 순간 청자는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혐오발언은 처벌되고 지양되어야 하지만, 청자의 상처가 비롯되는 기원이 어디인지는 세심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언어는 관습의 반복이나 인용을 통해 권위를 축적한다. 수행문은 관습에 의존하는 동시에 자신의 기원을 은폐한다. 그런 언어의 수행이 우리 모두의 언어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당연히 우리의 수행은 완벽하지 않으며, 언어행위를 통한 수행 역시 마찬가지다. 버틀러는 늘 이 지점을 파고든다. 개별적인 혐오발언을 처벌하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는 혐오의 순환과 상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버틀러의 결론은 다시 재의미화와 재전유로 향한다.

 

포르노그래피를 혐오표현으로 보고 규제하자는 맥키넌의 주장이 혐오의 기원을 찾아 근원을 제거하는 효율적인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버틀러가 맥키넌의 주장을 반박하는 맥락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규제가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지향에 대한 규제, 즉 성적 보수주의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적 보수주의는 폭력에 대한 국가의 검열과 같은 논리로 함께 작동한다. 두 번째 맥락은 포르노그래피의 수행성에 대한 불신이다. 맥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포르노그래피를 맥키넌의 주장처럼 혐오발언의 주체로 볼 수도 있다. 버틀러는 이 포르노그래피라는 발언주체에 대해 사회적 관습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며 사후에 허구적으로 주체로 구성되었을 뿐이라 반박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 모두가 포르노그래피를 숭배하며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우리의 수행성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포르노그래피를 포함한 모든 텍스트의 수행성은 주권적 통제 하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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