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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 1102(금) 발제
선우 / 2018-11-01 / 조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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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

 

1.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스피노자

스피노자가 신체를 모델로 간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체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갖는 인식을 뛰어넘는다는 것, 사유 또한 우리가 그것에 갖는 의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체에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정신에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것들이 못지않게 존재한다. 신체라는 모델은 사유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유와의 대비 속에서 의식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의 발견이며, 그리고 신체의 미지(未知)에 못지않게 근원적인 사유의 무의식의 발견이다. 우리는 우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정신이 무엇을 할 수(알 수) 있는지 모른다. 알 수 있는 의식은 극히 일부분이다. 이 또한 환상에 의거한다. 의식은 결과들을 받아들일 뿐,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

의식은 결과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킴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메운다(목적인이라는 환상). 나아가 자신을 제1원인으로 간주하고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내세운다(자유명령이라는 환상). 자신을 제1원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의식은,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는 신, 목적인과 자유 명령에 의해 행위하며, 영예와 처벌에 따르는 세계를 마련해 놓은 신을 내세운다(신학적 환상). 의식은 자신을 구성하는 삼중의 환상과 분리 불가능하다. 의식은 두 눈 뜨고 꾸는 꿈일 뿐이다.

의식은 보다 적은 능력의 총체로부터 보다 큰 능력의 총체로의 이행 혹은 그 역으로의 이행에 대한 감정이다. 의식은 순수하게 이행적이다. 의식은 절대적 전체의 특성도, 특별한 어떤 전체의 특성도 아니다. 의식은 정보의 가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절단된 정보만을 갖는다. 의식은 우리가 그것의 기능일 수 있는 존재에 관련해서 생겨난다. 그것은 우리를 그 전체에 통합시키는 수단이다. (37)

 

-의식과 욕망 그리고 감정의 관계

 

2. 모든 가치들, 특히 선악에 대한 가치절하(좋음과 나쁨에 대한 옹호): 비도덕론자 스피노자

신은 아담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그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이 있다. ‘선악을 넘어’는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음은 한 신체가 우리 신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구성할 때, 그리고 그 신체 능력의 전체 혹은 부분을 통해 우리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를 지시한다. 나쁨은 그 반대, 즉 다른 신체와 결합했을 때 우리 신체 능력의 저하, 혹은 해체를 일컫는다.

좋음과 나쁨은 그 첫 번째 의미, 즉 객관적이지만 관계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의 본성에 맞는가 혹은 맞지 않는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로서 좋음과 나쁨은 또한 두 번째 의미, 즉 인간 존재의 두 유형, 두 양태를 특징짓는 주관적이고 양태적인 의미를 갖는다.(39)

 

할 수 있는 한에서 만남들을 조직하고, 자신의 본성과 맞는 것과 통일을 이루며, 결합 가능한 관계들을 자신의 관계와 결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훌륭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훌륭함은 역학, 능력, 그리고 능력들의 결합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39)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인 윤리학은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도덕은 신의 심판이고, 심판의 체계이다. 가치들(선-악)에 대립하여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음과 나쁨)가 들어선다.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도덕법칙은 당위이다라는 말에 대해 의식을 가져보자. 이 의식은 복종 이외의 어떤 결과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복종은 필수불가결할 것이며, 따라서 명령은 충분한 토대를 갖게 될 것이다. 법칙은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어떠한 것도 인식하게 하지 못한다. 이해해야 할 것을 명령과 혼동하고 인식을 복종과 혼동하며 존재를 당위와 혼동하는 오랜 인류의 역사가 존재한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

 

3.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기쁨에 대한 옹호): 무신론자 스피노자

변용이론은 슬픈 정념들의 위상을 설명해준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와 적합하지 않은 외부 신체를 만날 때 모든 것은, 마치 그 신체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에 대립하여 그것을 삭제하고 고정시키듯이 진행된다. 이때 우리의 행위능력(능동)은 감소하거나 방해받는다고 말해지며, 이에 상응하는 정념들은 ‘슬픔’에 속한다고 일컬어진다. 반대로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신체를 만날 때, 그 신체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에 첨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변용시키는 정념은 ‘기쁨’에 속하며, 우리의 행위 능력은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이 기쁨은 외부 원인을 갖기 때문에 여전히 정념이다. 즉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행위 능력과 분리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는 우리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슬픔, 기쁨이라는 정념, 수동 능력(외부에 그 원인이 있다.) vs 행위 능력(개인의 본질로부터 유래한다.)

정념은 우리 능력의 가장 낮은 정도를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 능력으로부터 최대한으로 분리되어 있고, 최대한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미신에 대한 환상과 폭군에 대한 신비화에 빠져 있는 순간을 가리킨다.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

 

<윤리학>이 제기하는 3중의 실천적 문제

1)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2) 우리의 자연적 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신체, 우리의 정신,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해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 하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3) 우리의 의식은 환상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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