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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926년 가을과 겨울
기픈옹달 / 2018-11-08 / 조회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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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개인 브런치에도 올려두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170

 

 

 

등불 아래에서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묵은 원고를 모아서 엮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잡감의 독자들에게 읽게 할 요량으로 인쇄에 부칠 준비까지 하게 됐다. <화개집속편: 소인>

 

글 끄트머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1926년 10월 14일, 샤먼에서 루쉰 쓰다’ 1926년 그는 베이징을 떠나 샤먼으로 몸을 옮겼다. 베이징의 상황이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여사대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3월, 일본과 타협한 돤치루이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가 열렸다. 3월 18일, 이날 돤치루위 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약 300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 가운데는 루쉰의 학생인, 여사대 학생회 간부 류허전도 있었다. 루쉰은 지명수배자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루쉰은 그 해 8월 베이징을 떠난다. 그 옆에는 쉬광핑이 있었다. 상하이까지 동행한 이들은 2년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루쉰은 샤먼으로 쉬광핑은 광저우로 각각 갈라졌다. 

 

베이징을 떠나 샤먼으로, 홀홀단신으로 떨어져 나와 루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눈앞에 보이는 건 구름과 물 뿐이고 들리는 것도 거의 다 바람과 파도 소리밖에 없어서 사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도 사람인 바, 고독과 적적함에 조금은 조바심을 낸 것은 아닐까. 한 해가 마무리되기 전, 10월 가을에 한 해의 잡감을 모아 책으로 엮는다. 아직 두 달이나 더 남았는데, 그는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쓸데없는 소리를 할 일이 올해는 더 이상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이듬해 1월 광저우로 향한다. 아마 10월, 샤먼에 이른 지 고작 2달도 되지 않았으나 그는 샤먼을 떠날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여러 상념과 생각을 뒤로하고. 그는 27년 1월 2일, 샤먼을 떠나기 전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바로 샤먼의 남푸퉈사의 무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무덤’은 26년 말, 27년 초 루쉰을 사로잡은 말 가운데 하나였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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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제기’는 26년 10월 30일에 쓰였다. 그는 불과 두 주 사이에 또 한 권의 책을 엮은 것이다. 그것도 약 20년 전의 글을 모아서. 그는 <무덤> ‘제기’에서 계속 불편한 존재로 남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더욱이 내 글을 증오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반응이 없는 것보다야 그래도 행복한 일이다. 세상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오로지 스스로 마음 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눈 구조 편한 대로 놓아둘 수 없는 일이어서, 그들에게 약간은 가증스러운 것을 보여 주어 그들에게 때때로 조금은 불편을 느끼게 하고, 원래 자신의 세계도 아주 원만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다. <무덤: 제기>

 

그는 그렇게 자신의 무덤을 짓는다. 그의 무덤은 적들에게는 성가신 것이며, 스스로에게는 소박한 기념물이기도 하다. 이 무덤과 함께 지난 시간을 매듭짓고 새로운 길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닐까? <들풀>은 25년과 26년의 글을, <아침 꽃 저녁에 줍다>는 26년에 쓴 글이다. 두 책의 서문은 모두 27년 광저우에서 쓰였다. <들풀>은 4월 26일, <아침 꽃 저녁에 줍다>는 5월 1일. 그의 행적을 더 좇아보니 흥미롭다. <새로 쓴 옛이야기> 가운데 <달나라로 도망친 이야기>는 26년 12월에 쓰였다. 한편 <검을 벼린 이야기>도 그해 10월에 쓴 것으로 남아있다.(일기에 따르면 27년 4월 3일에 완성했다고 한다.) 루쉰 개인에게 26년 가을과 겨울은 적잖이 매서운 시간이었을 테다.

 

다시 <화개집속편>으로 돌아오자. 그는 그의 잡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주의 심오한 의미나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내가 겪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묵혔다가 이것이 아무리 깊이가 없고 극단적이더라도 가끔 붓을 들어 써 내려갔을 뿐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슬프고 기쁠 때의 울음과 노래 같은 것이다. 당시에도 이 글을 빌려 분을 풀고 감정을 토로한 것에 불과한데 지금 와서 누군가와 이른바 공리와 정의를 다툴 생각은 하나도 없다. 물론 당신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데 굳이 내가 다르게 하겠다고 한 적은 있었다. 일부러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이마를 조아리지 않겠다고 한 적은 있었다. 고상하고 장엄한 가면을 일부러 쓱 벗겨 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를 제외한다면 대단한 행동이랄 것은 없다. 명실상부하게 ‘잡감’일 따름이다. <화개집속편 : 소인>

 

루쉰이 말하는 잡감이란 대단치 않은 글이다. 대단치 않다는 것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식 없는 울음과 노래이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그토록 간단한 일이 어째서 어려운 것일까? 이는 우선 속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자들은 가면을 쓰고 우는 얼굴인지 웃는 얼굴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속아왔기 때문이다. 울어야 할 때인지 웃어야 할 때인지 도통 알지 못하고 늘 그저 ‘편안한 세계’를 살도록 길들여진 까닭이다. 루쉰의 글을 읽으며 솔직함과 소박함이 어째서 그렇게 어려운지를 생각한다.

 

따라서 옳고 그름이란 중요하지 않다. 그의 글은 매우 사적인 기록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분을 풀고 감정을 토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정인군자들에게 커다란 성가심이 되었다. 도무지 공리와 정의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공리 따위로, 정의 따위로 입을 틀어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뻗대는 몸, 다른 글의 표현을 빌리면 쩡짜(掙扎)라고 하는 태도가 있다. 무뢰배 정신이라고 할까. 상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권위와 명령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가면에 속지 않는다. 저항하는 몸, 싸우는 정신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잡감은 잡다하고 부산스러우나 예리하고 날카롭다. 1926년, 루쉰은 새로운 변곡점을 예감하면서도 여전히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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