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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붓으로 쓰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 화개집 속편 일부 발제(1114)
삼월 / 2018-11-14 / 조회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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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집 속편》

<꽃이 없는 장미> ~ <반눙을 위해 『하전』의 서문을 쓰고 난 뒤에 쓰다>

 

1. 꽃이 없는 장미

 

어릴 때 연극을 하나 본 적이 있는데 제목은 잊었다. 한 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있는데 혼을 빼 가는 무상 귀신이 와서 혼인식 중에 끼어들어 함께 절을 올리고 방에 들어가고 침대에 들어갔는데…… 정말 대단한 살풍경이었다. 내가 한 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기를 바란다. <꽃이 없는 장미>

 

1923년 루쉰은 동생과 크게 다투고 이사를 했다. 원래는 결혼한 동생 부부와 조카들, 루쉰과 아내, 어머니까지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다툼 후에는 집을 옮겨 어머니, 아내와 셋이 살았다. 루쉰은 어머니의 뜻대로 치룬 결혼을 부부관계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아내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다. 1925년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을 계기로 쉬광핑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루쉰은 쉬광핑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고, 집을 나왔다. 3년이 조금 못 되는 사이에 루쉰은 동생과 의절하고, 가족을 버렸다. 루쉰이 쉬광핑과 함께 살게 되자, 동생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축첩을 했다며 강하게 루쉰을 비난했다.

 

스스로를 구시대의 인물이라 자처하던 루쉰은 원래 봉건시대의 계약으로 묶인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허울이나마 유지하려 했었다. 무상에게 혼을 빼앗긴 것과 같은 결혼생활이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 쉬광핑을 만난 루쉰은 자신을 ‘꽃이 없는 장미’라고 느낀다. 니체의 말대로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타인에게도 도덕을 강요한다. 도덕이란 혼자만 지키기엔 억울한 법이니까. 꽃 없이 시퍼런 넝쿨과 뾰족한 가시만 남은 장미는 당연히 타인을 옥죄고, 찌르는 데만 쓰일 뿐이다. 혼을 빼앗긴 결혼생활 속 아내는 루쉰에게 봉건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으리라. 자신이 돌보고 계몽해야 하지만 쉽사리 변하지 않는 답답한 존재로. 쉬광핑을 만나 루쉰은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용감하며, 자신을 압도하고 뒤흔들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1926년의 루쉰은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의 여파로 여전히 괴로웠다. 당시 악연을 맺은 이들과 집요하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 인연을 맺었던 학생회 임원들이 3·18 사건으로 죽어 비통해하기도 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때였으나, 루쉰은 몇 차례나 자신의 삶을 ‘꽃이 없는 장미’에 빗댄 글을 쓴다. 쓰고 나서 이런 글을 쓸 때가 아니라고 반성하기도 한다. 이제 루쉰은 명백하게 노인들의 훈계를 거부하고, 젊은 여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 공리를 거부하고, 기꺼이 추문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1926년의 루쉰은 공정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삶이 바뀌니 싸움의 상대도 조금씩 달라졌다. 공정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지가 보였다. 동생과 의절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서, 루쉰이 얻게 된 건 단지 새 가족만은 아니었다.

 

2. 시신의 무게와 새로운 장미

 

최대한의 악의로 중국인을 추측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정말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하나는 당국자가 이렇게 흉악하고 잔인할 수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이렇게까지 비열할 수 있다는 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여성이 어려움에 처해서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여성이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을 목도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소수이긴 했지만 노련하고 능숙하며 흔들림 없는 백절불굴의 기개에 대해서 나는 여러 번 감탄한 바 있었다. 이번에 비 오듯이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서로 돕고 구하고 죽음까지 무릅쓴 일은 중국여성의 용감하고 의연한 면모가 수천 년 동안 음모와 계략에 의해 억압되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 아, 나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것으로 류허전 군을 기념한다!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어린 학생들은 처음 루쉰의 눈에 가혹한 시어머니에게 고통 받는 가련한 민며느리들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 민며느리들이 결국 싸워서 이기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1926년 3월에는 그 짧은 목숨들이 정부의 학살로 사라지는 것마저 보게 된다. 루쉰은 비통해한다. 한때 루쉰과 신문화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죽은 학생들을 모욕하거나, 헛된 말들을 퍼뜨린다. 루쉰은 정부의 흉포함과 소문을 양산하는 지식인집단에 분노한다. 그들에게서는 이제 ‘시신의 무게’를 아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까지 루쉰은 여성들에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중국사회의 억압받는 자들이었고, 중국사회를 해친 주범이 아니어서 루쉰의 미움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의 싸움과 죽음은 루쉰을 강하게 타격했다. 학생들의 죽음 앞에서 루쉰은 ‘시신의 무게’를 느낀다. 붓의 무력함 역시 느낀다. 구습을 비판하는 자가 자신 역시 구습에 얽매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그대로 얽매어 있을 테니 너희는 벗어나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도 문제다.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비난받던 루쉰은, 그들이 아직도 ‘마누라와 자식’에 묶여있다고 조롱한다. 마누라와 자식의 의사는 전혀 묻지도 않고 말이다. 물론 아직 장미를 피울 수는 없다. ‘새로운 장미’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꽃은 없다’ 공리주의자들의 훈계와 비겁한 자들의 소문에 맞서, 죽음의 공허함을 이겨내고 새롭게 싸워야 했다. 붓으로 쓰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실전에 돌입할 때가 되었다.

 

이번에 죽은 자가 후대에 남긴 공은 여러 놈의 가면을 찢어 놓았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들의 음험한 마음을 드러내 준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 싸우는 이에게 다른 방법을 써서 전투할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공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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