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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선언> 발제문 :: 0813(토)
오라클 / 2016-08-13 / 조회 1,186 

본문

▪ 머리말 :: 코뮨주의 선언

 

1. 코뮨주의 :: 존재론 / 인식론 / 실천론

 

코뮨주의가 우리의 존재론이고 인식론이다. > 우리는 코뮨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코뮨적 방식으로 인식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코뮨적이다. ‘나는 사유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많은 것들이 ‘나’라는 이름 아래서 사유하고,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많은 것들이 ‘나’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분할 불가능하다 in-dividual’는 의미에서 개체는 없으며, ‘모든 개체는 항상-이미 집합체’라는 의미에서 ‘개체는 중생(衆生무리중-생명, multi-dividual)이다.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은 무의미하며, 단지 코뮨이 있을 뿐이다. 

 

존재론적 코뮨 :: 생성, 변혁 > 코뮨주의란 세상의 존재를 코뮨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만물이 코뮨이며, 세상이 만물의 코뮨임을 긍정한다. 긍정은 얼어붙은 관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관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코뮨주의는 생성의 변화원인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실천노력이다. 코뮨주의는 모든 개체들의 현실에 대한 긍정이지만, 현실 자체에 대한 변혁의 지향이다. 자유주의자-개인주의자는 탈이념을 내세우며 자기이념을 자명한 현실처럼 떠들어대지만, 자신의 신체-자신의 소유-자신의 이익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꿈꾼다. 자유주의-개인주의는 현실을 외면하는 현실 없는 이념이다. 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인식론적 코뮨 :: 적합한 인식 & 적합한 코뮨 > 모든 것을 코뮨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 어떤 대상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대상에 적합한 코뮨을 구축했을 때만 획득된다. ‘앎의 과정’은 대상이라고 불렀던 다른 신체와 ‘앎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이다. 근대의 인식론은 앎의 과정 이전에 주체와 대상을 설정해놓지만, 코뮨적 인식론에서 주체나 대상은 전제라기보다는 결과이다. 우리가 다른 신체에 적합한 인식을 획득하는가는 우리가 그 신체와 얼마나 적합한 코뮨을 구성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코뮨을 산출하는 실천적이고 구성적인 노력 속에서만 우리의 앎을 생산한다. 

 

구성적 코뮨 :: 실천적 코뮨 > “코뮨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코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와 동일한 것이다. 코뮨주의의 의미sense를 삶의 방향sense에서 찾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코뮨의 존재가 아니라, 코뮨의 구성이며, ‘존재론적 코뮨’이 아니라, ‘구성적 코뮨’이다. 코뮨주의 선언은 욕망의 선언-삶의 방향의 선언이다. ‘공산주의’체제 역시 코뮨주의를 위한 하나의 시도였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코뮨주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체제가 되고 말았다. 

 

2. 코뮨주의 ::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생산

 

코뮨주의는 공통된 것the common의 생산이다 > 코뮨주의는 복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공통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이고, 나와 다른 개체들의 사고와 행동의 리듬을 맞춰가며 하나의 공동행동을 구성하는 능력이다. ‘공통된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이야기이며, 근거를 공유한 차이-일자를 전제한 다양성이 아니라 차이 자체-다양성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공통된 것’은 차이나는 것들 사이에만 존재하고, 차이나는 것들만 생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코뮨은 다양한 차이들을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것이며, 동일체가 아니라 다양체이다. 

 

코뮨은 타자와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관계이다 > 소통을 꿈꾸면서도 차이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차이를 해소하는 것만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동일성 안에서이며, 동일성 안에 있는 존재들은 둘일 때조차 한 사람처럼 독백한다. 차이만이 소통할 수 있다. 소통의 발명은 우리를 동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재발명하는 일이다. 낮선 존재(타자)와의 마주침이 내 안의 낮선 존재(타자)를 불러낸다. 내 안의 타자가 다시 내가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타자와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관계로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함께하며, 함께하기에 서로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3. 코뮨 :: 타자들의 공동체 

 

 *코뮨의 정의 속에 타자가 있고, 타자는 우리와 함께-우리 곁에-우리 안에 있다. 코뮨은 타자들의 공동체이다. 

역사적 코뮨주의 > 역사적 코뮨주의가 실패한 것도 타자의 문제였는데, 타자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코뮨주의가 타자들의 억압체제로 고발되었다. ‘감옥같은 공동체’. 개체성과 공유성을 잡아먹는 ‘흉악한 괴물’이었다.

 

전체주의, 개인주의 >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멀리 있지 않다. 전체에는 외부가 없고 원자에는 내부가 없으며, 전체주의자에게 타자성은 내적 문제이고 개인주의자에게 타자성은 외적 문제이다. 전체주의적 공동체는 모든 차이를 전체적 통일성 아래 포섭한다. 차이란 동일성 아래서의 차이이며, 타자성은 국소적일 것이며 전면적 타자란 없다. 개인주의적 고유성은 원자적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타자성이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말할 때, 그 ‘만인’의 존재방식, 행동방식은 똑같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에 반대한다. 우리의 안과 바깥은 모두 타자들-차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4. 코뮨주의 :: 휴머니즘에 반대, 인간과 사물이 친구인 관계

 

휴머니즘 :: 인간을 동일자로 보는 관점 > 인간과 자연-인간과 사물-인간과 기계라는 말에서 ‘과’라는 접속사에는 인간의 오만함이 묻어있다. 이 접속사는 접속을 거부하는 접속사인데, 인간은 자연이 아니고-인간은 사물이 아니고-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인간이 아닌 모든 것과 구별하여 인간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만든다.

 

휴머니즘 :: 코뮨주의자들의 한계 > 많은 코뮨주의자들은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인간들의 코뮨주의를 꿈꾸었을 뿐 자연-사물-기계들과 코뮨주의적 관계를 사고하는데 실패했다. 사물들의 세계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볼 뿐이며 그들에게 ‘사물화’란 소외였지만, 정작 소외된 것은 사물이었다. 

 

코뮨주의 ::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변환 > 코뮨주의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인간 아닌 것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함도 부당함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그런 자명성을 낳는 관계를 변혁해야 한다. 코뮨주의란 인간이 사물들과 ‘목적’으로 분리되어 사물들을 ‘수단’으로 부리는 세계가 아니라, ‘사물이 인간의 동료’인 세계일 것이다. 

 

5. 코뮨주의 :: 우정의 정치학 

 

우정의 정치학 & 적대의 정치학 > 우정의 정치학은 친구를 창조하고 적을 친구로 만드는 정치학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우정이라는 말로 계급 적대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타자를 적으로 만드는 체제이다. 코뮨주의적 계급투쟁은 두 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 적대적 투쟁이 아니라, 적대를 양산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투쟁이다. 계급과 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과 비계급의 투쟁, 한 계급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비계급을 위한 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대한 ‘반대계급’이 아니라, 계급사회를 철폐시키려는 ‘비계급’으로 이해한다.

 

부르주아의 자리를 없애는 투쟁 > 부르주아의 차지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자리를 없애는 투쟁이 중요하다. 초월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초월적 권력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투쟁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르주아를 닮은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닮은 또다른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코뮨주의 내부의 적대의 정치학 > 적대의 정치학은 코뮨주의 운동에 깊숙이 침투했다. 계급 간 차이만큼이나 계급 내 차이를 견딜 수 없어했고, 적을 선명히 함으로써 자기를 선명히 하려는 시도는 자기를 오염시키는 내부의 타자들을 색출하는 동일자의 논리를 양산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의 최대위험은 자신이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6. 코뮨주의 :: 사유화privatization에 반대 

 

사유화=사적 소유 > 사유화는 공통된 것의 파괴이며, 분리-배제-추방이 사유화 속에서 작동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코뮨주의를 ‘사적 소유의 철폐’로 요약했고, 우리는 공산주의 선언을 ‘공통된 것의 생산’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존 로크는 소유를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으로 선언했지만, 이제는 신체의 장기를 거래하는 시대이다.

 

사적 소유 :: 결합이 아니라 처분과 분리 > 어떤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결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분하고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적 소유권의 핵심은 ‘결합’이 아니라 ‘처분과 분리’에 있다. 자유롭게 처분가능한 것, 매매가능한 것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이 가난해진 것은 그들이 뭔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의 신체와 정신이 처분가능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그것들을 즉각 팔아야 했다. 

 

사적 소유 :: 재산의 소유 > 사적 소유체제란, 내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체제 이전에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체제이다. 울타리를 치는 자가 있는 곳에 도둑이 있고, 도둑이 있는 곳에 울타리를 치는 자가 있다. 소유체제 안에서 우리는 “이 두 쌍둥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사적 소유 :: 고유성의 소유 > 공통의 영역에서 타자를 몰아내고 울타리를 두른다는 것은, 재산뿐 아니라 고유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유property라는 말은 재산만이 아니라, 고유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재산 소유만이 아니라, 고유성의 소유도 존재한다. 내 안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것, 내 안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것, 외부 타자와의 공통작용을 거부하는 것 또한 근대 사적 소유체제의 특징이다. 고유성과 정체성의 영역에도 추방-배제-도둑질이 존재한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남의 소유가 될 수 있다. 나의 ‘자아’는 나를 지배하는 자, 나를 독점하는 자의 것이다. 

 

신자유주의 :: 공적인 것의 사유화 > 울타리 치는 자, 그것을 넘는 자 모두에 반대하며, 울타리 자체에 반대한다. 공적인 것의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시대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 각종 에너지, 생명자원에 사적 울타리가 둘러지고, 대중의 정서소통마저 사유화되는 시대를 반대한다. 

 

사적 소유의 극복 ≠ 역사적 공산주의의 국유(국가소유) > 맑스 “근대의 사적 소유는 근대국가와 조응한다.” 근대의 사적 소유는 국가의 배타적 권력을 통해 발생한다. 공통된 것의 국유화는 사유화를 용이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ex) 역사적 공산주의의 패망_국영기업의 집단매각, 개발독재 국가_공기업의 사적 불하, 신자유주의_공기업의 민영화.

 

공통된 것, 공공성 ≠ 국가적인 것 > 공통된 것-공공성은 국가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의 개입은 언제나 과잉이며, 부족한 것은 비국가적 공공성-코뮨주의적 공통된 삶의 실험이다. 지식, 정보, 사물 인간들이 사적 소유 안에 국가 소유 안에 갇혀있다.

 

7. 코뮨주의 :: 타자들-대중의 형상 

 

타자 :: 대중의 형상을 한 타자들 > 우리에게 타자는 없고, 타자들이 있을 뿐이다. 나와 타자라는 양자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는 무수히 많은 대중의 형상을 취한다. 타자에 대해 말하는 나는 이미 무수히 많은 대중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미 무수히 많은 것들이 조직화된 구성체이다. 보통 때 구성체는 지층화된 질서에 따르지만 어떤 독재자도 제거할 수 없는 신체의 작은 요동들은 항상 존재하고 사소한 계기에 의해 지층을 휘젓는 거대한 요동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변신을 부추기는 무수히 많은 대중이 있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아닌 타자들이 있다. 

 

코뮨주의 :: 대중운동에 대한 사유 > 코뮨주의는 이 타자들-대중들의 운동에 대한 사유이다.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무리들, 우리 안에도 우리 바깥에도 있는 무리들, 생성의 순간마다 닥치는 이방인들! 그들은 정체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 정체성을 벗어나는 자들이고,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성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 코뮨주의는 작동을 원하지 분석을 원하지 않으며, 대중에 대한 분석조차 대중 속에서 작동하기를 원한다. 코뮨주의자란, 활성화된 대중이면서 대중을 활성화하는 자이며, 불길을 지도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불을 지르는 자다. 

 

코뮨주의의 형상 :: 대중 > 코뮨주의자의 신체 속에 착취당하는 자, 소수자, 광인이 대중으로서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는다. 혁명가로서 코뮨주의자의 특이성은 소수자들, 착취당하는 자들, 광인들, 가난한 자들과 공통작용을 통해 생산된다. 단 한사람일 때조차 혁명가는 혁명가들이고, 코뮨주의자는 코뮨주의자들이다. 즉 코뮨주의자의 형상은 항상 대중이다. 

 

8. 코뮨주의 :: 자본주의 화폐경제에 반대 

 

화폐 :: 코뮨주의의 전도 > 화폐는 코뮨주의의 완전한 전도이다. “화폐는 자신이 코뮨이 아닌 곳에서 코뮨들을 해체한다.” 자본주의사회는 화폐코뮨이다. 화폐는 환상적 코뮨이지만 환상을 공유하는 한에서 현실적 코뮨이며, 화폐는 공통된 것의 환상 혹은 환상적 공통성이다. 화폐는 모든 이질적인 것을 매개하고, 모든 욕망을 빨아들인다. 이것은 화폐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며, 화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일 수 있다.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노력이 멈춘 곳에서 사람들은 화폐를 갖고자 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한 곳에서 사람들은 화폐에 관심을 갖는다. 

 

화폐 :: 특이성의 상실 > 화폐는 공통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곳에서 화폐만을 보는 자본주의적 환상 속에서만 공통된다. 화폐는 이질적인 것을 매개하지만, 이질적인 것이 특이성을 상실하는 한에서만 매개한다. 화폐를 사용할수록 후각을 잃어버린다. ‘똥 중의 똥’인 화폐에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자본 ::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 > 공통된 것이 결핍된 곳에서 결핍을 공통된 것으로 느끼게 된다. 결핍을 생산하지 않았다면, 결핍을 유통시키지 않았다면, 결핍을 소비하게 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가 이처럼 충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부유한 자본가마저 결핍감에 시달리는 곳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다!

 

자본주의체제 :: 오이디푸스 가족 > 정신분석학자들이 발견한 가족질서, 아빠-엄마-나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자본주의체제에 잘 들어맞는다. 자본capital이라는 대문자capital가 순환할 때, 사람들은 대문자-자본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의 노예가 되라, 모든 것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 자본가-아버지는 첫 번째 노예가 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복종한 삶의 형태에 자식들을 복종시키는데, 그가 권력자인 것은 그가 또한 복종자이기 때문이다. 

 

코뮨주의자 :: 독신자 > 코뮨주의자들은 자본의 가족주의에 벗어나 있는 독신자들이다. 자본주의 가족배치를 이탈했다는 점에서, 권력과 부의 관능에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욕이 남성과 여성-이성애와 동성애-인간과 사물의 구분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신자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며, 누구와도 사랑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횡단성애자이며, 어떤 존재와도 자유로운 연합을 구성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코뮨주의 :: 일상의 구체적 실험 > 일상의 구체적 실험을 통해 코뮨주의는 주장되어야 하는데, 에너지, 음식, 정보, 지식, 정서 등을 다른 코뮨과 소통하고 대안적 삶을 실험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어?”라고 묻는 사람들, 총체적 플랜을 제시하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 삶을 바꾸는 것이라고 답한다.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하고 확산시키는 것,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9. 코뮨주의 :: 엄숙주의에 반대 

 

코뮨적 실험 > 모든 실험들, 모든 혁명들, 모든 선언들에서 엄숙주의를 몰아내자. 더는 실험할 필요가 없는 단 한번의 ‘진정한 실험’, 그 이상의 실험을 원하지 않는 실험, 우리가 꿈꾸는 것은 그런 실험이 아니다. 코뮨주의자는 실험과 시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코뮨적 여정 >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험된다. 코뮨적 여정은 머무를 곳을 찾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 속에서 머물러야 하고, 목적이 이행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행이 목적을 결정한다. 코뮨주의란 이렇게 시도하는 매번의 실험이다. 엄숙한 자들은 우리의 끊임없는 여정을 실패의 증거로 삼을 것이지만, 우리들의 실패들은 우리의 성공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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