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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후기] 세미나를 마치며 +11
선우 / 2016-03-25 / 조회 10,982 

본문

마침내 마쳤습니다.

오늘 마지막 세미나는 특히 핫(!)한 이야기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처음 들뢰즈가 욕망을 결핍의 관점으로가 아니라 생산의 관점으로 보겠다고 했을 때도, 실은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모든 것을 “기계”라고 명명하는 것도 새롭고, 그 기계의 개념을 그동안 생각했던 일반적인 개념에서 들뢰즈의 개념으로 바꾸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원시사회, 야만전제사회, 문명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자리 잡고, 무슨 작용을 하는지 차츰차츰 더 분명히 밝혀나가는 들뢰즈를 따라가며, 겨울을 지나왔습니다.

 

들뢰즈는 왜 이렇게 오이디푸스의 세계, 정신분석의 세계가 싫었을까요? 그것은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이지, “삶”의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충만하게 살게 하지 않고, 죽음을 욕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연결되어 생산하려 하는 우리 욕망에 결핍을 들이밀고 죄를 물어, 우리를 집 안에 가족 안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결핍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그를 죽게 만듭니다. 다른 이의 욕망을 생산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그를 아무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무구한 존재로 보는 것은, 그에게 “삶”을 선물로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시선 속에서 그는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정말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테니까요. 충만한 삶을 사는 들뢰즈의 욕망 기계는 기쁨에 찬 기계, 자유로운 기계입니다.

 

지금 제게 들뢰즈는 삶의 노래를 부른, 충만한 삶을 예찬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기쁨과 자유에 찬 삶을 노래한 철학자로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이렇게 평합니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좀먹은 세계 속에서, 스피노자는 죽음, 인간들의 살인 욕구,

선악의 규범들, 정의와 부정의의 규범들을 의문에 부칠 만큼 삶과 삶의 능력을

확신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모든 유령들을 거부할 만큼의 삶에 대한 확신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삶에 대한 확신, 기쁨과 자유의 삶에 대한 사유.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스피노자를 읽지 않아 잘 모르지만요^^) 이제 저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로 넘어갑니다. 들뢰즈가 보는 스피노자도 안고 가니, 왠지 연결되는 기분입니다.

 

지난 4개월 동안 함께 공부한 사비님 희음님 오라클님 케테르님 라라님 엄지님 빼냐님 토라진님 나성주님

나나님 박카스님,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다시 다른 세미나에서 우리, 연결되겠지요?

이끌어주신 덤님, 고맙습니다. 많이 고맙습니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아, 선우님! 마지막 후기까지~~! 세미나회원의 모범과 전형을 보여주시는군요.
감동의 눈물ㅠㅠ... 진심으로!! 다시한번 선우와 같이 공부하게 되면 좋겠어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댓글의 댓글

저 자꾸 괴롭히면 도망갈거예요 ㅎㅎㅎ
낼 봐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이제는 안 괴롭힐 거예욤!! 그것도 열정이 필요한데,...ㅠㅠ
어쨌거나 선우는 한결같이 힘을 주는 사람이예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댓글의 댓글

와~~ 오라클님 항복하셨다. 에헤라디야~~
에티카와 함께 또 좋은 시간 보내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냬가 항복해서 선우가 기쁘다면야, 뭐가 중요하겠어!
기꺼이 그렇게 해야지 ㅋㅋㅋ 행복한 에티카!ㅎㅎ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다들 수고하셨어요. 위 후기도 참 좋네요

이번 공부의 텍스트가 만만치 않고, 내용도 방대하고, 번역 뉘앙스도 모호하고,
특히 들뢰즈 가타리의 사상이 파격적이고 새로운 개념이 많아 적잖이 어려운 공부인데
최고의 전문성을 지니신 덤님 덕분에 잘 익히고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분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여 아쉽지만, 여러분을 가슴에 꼭 담아둘게요

그럼 다음에 뵙기를 바랍니다. ^^

선우님의 댓글

선우 댓글의 댓글

가슴에 꼭 담아두신다는 표현을 하시다니요. . .  그때 그 여학생들처럼
손수건 한 장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ㅎㅎ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공부는 함께 하면 좋다는 것, 케테르님과 공부하면서도 느꼈습니다.
잘 지내세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여학생? 순수건? 상당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인데요 ~~~
제가 과거에 여학생들로부터 손수건을 받은 때처럼 눈물 흘리는 상황이 없는데요?
하긴 지금도 통곡하며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므르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나요?스피노자와 들뢰즈는 늘 기뻐하라, 기쁨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데 ~~

그 낭낭한 목소리의 발제와 요약과 질문이 천둥과 노래처럼 아직 들리는군요 ~~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안티 오이디푸스 세미나를 마치면서 이 책 서론에서 푸코가 제기한 질문을 되짚어봅니다.

“사고에, 담론에, 행동에 어떻게 욕망을 도입할까?
욕망은 어떻게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힘들을 펼칠 수 있으며 또 펼쳐야 할까?
그리고 욕망은 어떻게 기성 질서의 전복 과정에서 더 강렬해질 수 있으며 또 강화되어야 할까?
성애술, 이론술, 정치술(ars erotica, ars theoretica, ars politica).”


무엇보다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새로운 성애술, 이론술, 정치술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핵심이 무엇일까? 생각보았습니다.
간단히 요약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성애론은 횡단 성애, 이론술은 분열분석, 정치술은 욕망의 정치학 혹은 욕망의 혁명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욕망기계라는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고,
분자적인 운동 방식에 의해 이루어지고, 분열자로서의 주체의 삶과 실천과 밀접하겠지요.


푸코는 다음과 같이 반파시즘적 삶을 향한 실천적 제안을 했지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읽어보니까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보다 선명해는군요,

1. 모든 일원적이고 총체화하는 편집증에서 정치적 행동을 해방하라.
2. 구획과 피라미드식 위계화 말고 증식, 중첩 분리를 통한 행동, 생각, 욕망들을 발전시키라.
3. 부정의 낡은 범주들(법, 한계, 거세, 결핍, 결함)로부터 충직함을 철회하라.
이는 서구 사상이 아주 오랫동안 권력의 형식 및 현실로의 접근법으로 신성시 했던 것들이다.
차라리 실정(實定)적이고 다양한 것을, 획일성보다는 차이를, 통일성보다는 흐름을, 체계보다는 유동적 배치체를 취하라.
생산적인 것은 정주(定住)가 아니라 유목이라는 것을 믿으라.
4. 자신이 맞서 싸우는 대상이 역겹더라도,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혁명적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욕망과 현실의 연결이다.
5. 정치적 실천의 근거를 진리에 두기 위해 사고를 이용하지 말라.
또, 사고의 선(線)을 단순한 사변이라고 깎아 내리기 위해 정치적 행동을 이용하지 말라.
정치적 실천을 이용해 사고를 강화하고, 분석을 이용해 정치적 행동의 개입을 위한 형식들과 영역들을 다양화하라.
6. ‘개인의 권리들’을 복원시키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말라.
개인은 권력의 생산물이다. … 집단은 위계화된 개인들을 통합하는 유기적 결합이 아니라, 탈-개인화의 항상적인 발생자여야 한다.
7. 권력에 홀딱 반하지 말라.

* 후기 아닌 마무리 소감을 대신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사고에, 담론에, 행동에 어떻게 욕망을 도입할까?
성애술, 이론술, 정치술(ars erotica, ars theoretica, ars politica)
성애론은 횡단성애, 이론술은 분열분석, 정치술은 욕망의 정치학!

멋진데요, 오늘 이 텍스트를 하나 건져올립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그런가요? 내가 제대로 봤나요?
세미나에 초대해주셔서 고맙고 열심히 일하고 섬기는 모습이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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