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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김소월 시 후기 0812(금) +4
소소 / 2016-08-17 / 조회 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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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늦어서 죄송해요! 

연휴에 업무가 갑자기 겹쳐서..ㅜㅜ

뭐라 할말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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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을 읽으며...

그의 시를 채 몇개도 외우지 못하면서 나는 왜 이토록 그가 익숙한 걸까. 소월길을 백번도 넘게 다녔고, 남산 도서관에 세워진 그의 시비는 너무 오랫동안 봐 왔기에 늘 거기에 당연히 있었던 사물이였다. ’영변의 약산’은 원래 진달래꽃을 수식하는 무조건 반사 같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너무 익숙해서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은 늘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마치 엄마처럼.. 낯선 사람을 만나면 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특이점들이 찾아 지지만 엄마는 엄마라는 보통명사에 가려져 ‘그녀’가 드러나지 않는다.

고유함에도 불구하고 보통이 되어버린 소월의 이름을 지우고 만난 그는 그의 시보다 불운한 삶을 살았고, 시의 여운보다 짧은 생을 살다 갔다.

 

김소월의 삶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나 2세때 일본인들의 폭행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으며 숙모 계희영에게서 전래동화나 민요를 들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입학,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한 편 같은 시기 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된다. 하지만 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고 결국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시집을 가게됨으로서 끊어지게 된다. 오순은 19세의 나이로 결혼하게 되는데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그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들 시는 훗날 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시 창작을 잠시 중단하면서까지 신문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으나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1. 먼 後日

간결한 문체로 써 내려 간 ‘먼 後日’은 한 편의 시에 과거에서 부터 현재, 미래가 응축되어 1연에서 4연까지 점점 고조 되어 가는 시인의 심상이 표현 되어 있다. 모든 연에서 반복되는 ‘니젓노라’ 라는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미래에도 잊을 거라는 다짐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의 ‘니젓노라’는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오히려 잊을 수 없다는 메아리로 맺힌다. 시인은 어쩌면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잊지 않았노라’고, 꾸짖으셔도 맘으로 ‘무척 그리다가 잊을 수 없었다고, 오늘도 어제도 먼 훗날 그때에도 ‘잊지 않겠노라’ 라고 스스로 고해하고 있는 듯 하다.

 

 

 

2. 山有花

꽃의 피고 지는 모습 속에서 ‘생성과 소멸’하는 존재 원리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산에 ‘갈 봄 녀름업시’ 피었다 지는 꽃에서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근원적인 고독을 느끼며 태어났다 죽는 존재임을 보았으리라. ‘저만치 혼자서’ 피여 있는 꽃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외롭지만, 갈 봄 여름 없이 기꺼이 활짝 피고 진다. ‘꼿치죠와’ 산에 사는 작은 새는 스스로 산으로 날아 갔다. 성가신 속세의 삶으로 부터 스스로 소외 시키며 꽃이 좋아 오늘도 산에서 운다. 아, 소월은 자연의 현상에게 조차 소외 되어 그렇게 관조(觀照)하다 동화(同和)되어 그의 꽃처럼 피고 지듯 서둘러 떠났나.

 

 

 

3. 개여울

당신을 바라보는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당신이 되어 봅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든’ 약속이 당신을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 있게 하나요? 잔물같은 내 기다림도 그러합니다. 님은 흘러 가고 없지만 ‘가도 아주가지는 안노라시든’ 님의 약속이 여전히 내 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까닭은  ‘구지닞지말라는’ 님의 부탁 때문일 거에요.  ‘파릇한 풀포기가 도다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때에’ 따뜻한 마음으로 가도 아주가지 않는다는 님을 날마다 하염없이 생각합니다.         

 

 

   

4. 진달래꽃

소월을 대표하는 표제시로 기꺼이 님을 보내는 여인의 정한(情恨)이 담겨 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는 님에게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라는 표현은 체념에 가깝다. 이는 님이 떠나 버려 체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님을 ‘가실때에는’ 하며 스스로 이별을 능동적으로 맞이 하고 있다. 돌이 유난히 많고 까맣다는 영변에 약산, 그 속에 대비 되어 더욱 빨갛게 핀 진달래 꽃을 상상해 보라. 암담한 이별 앞에 더욱 절절하고 아름답게 님을 보내고자 하는 시인의 사랑 역시 이처럼 붉었으리라. 그토록 애절하게 사랑하는 님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일 것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니우리다’ 라는 시인의 다짐은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한이 서려 있기 까지 하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듯 만남과 헤어짐 또한 사랑의 본질임을 시인은 깨달았기에 ‘진달내꼿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하며 떠날 님을 축복하겠다는 성숙한 사랑의 태도를 지닌다. 우리는 종종 사랑 앞에서 소유욕이 앞서곤 한다. 근원적인 불완전함으로 끊임없이 결핍을 충족하고자 소유하려는 욕구는 어쩌면 인간에게 지극히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소유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결핍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우치기란 쉽지 않다. 아프지만 축복하면서 보냄으로 채워지는 더 큰 사랑, 소월의 진달래꽃이 더 숭고하고 애절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5. 金잔디

일찍이 죽은자의 무덤가에서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봄을 노래하는 시인이 있었던가. 마치 노래하듯 간결하고 소박한 가락이 느껴지는 ‘잔디’는 죽음을 의미하는 님의 무덤과 생명을 의미하는 봄의 대비가 극명해 보인다. 이런 극명해 보이는 대비로 님의 부재가 더욱 절망적으로 그려진다는 해석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시인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숙명적으로 받아 들이는 초연한 태도로 보인다.    

 

 

 

6. 팔벼게 노래

 

팔벼게 노래는 그의 첫 시집 ‘진달래꽃(1925)’에 수록된 시이며 실제 진주출신의 채란이라는 들병이에게 들은 노래를 채록한 시라고 한다. 시의 형식에서도 소월의 기존 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형식을 띠는데, 이또한 채란의 노래를 그대로 적은 것이여서 소월의 의도로 보인다. 기생 채란의 노래가 소월에게는 어떤 의미였기에 자신의 시집에 옮겼을까. 소월은 동경상대를 다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겪고 도망치다시피 돌아와 영변 어느 색주가의 떠돌이 기생 채란을 만나게 되고, 채란은 개가를 하려던 어머니에 의해 열 세살 되던 해 행상에게 넘겨졌다고 한다. 소월과 채란 모두 돌아갈 고향이나 집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길 위에서 떠돌 수 밖에 없는 신세였을 것이다. 채란의 노래에서 인생 덧없음이 느껴진다. 고단한 인생을 하룻밤 팔벼게에 의지하여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팔벼게는 채란에게 단꿈과도 같은 위로다. 잠깐 머물러 있는 님과 집, 확정 되지 않는 삶, 노마드적 사고… 채란의 가락 속에서 소월은 텅비었기에 가득 차 있는 가슴을 느껴을지 모른다. 








참고

 

-『김열규 평론선집』(김열규, 오윤호 (엮음) CommunicationBooks, 2015)

 

-『김소월전집』(김용직,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https://namu.wiki 나무위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소소 님, 바쁘신 와중에도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소 님의 목소리를 더 많이, 더 깊이 들을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소소님의 댓글

소소

저야말로 소월을 만나 좋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는 생각이 더 깊게 그를 이해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
나중에라도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고 싶어지네요. ^^

흴옹님의 댓글

흴옹

소소님께서 열심히 준비해주신 덕에  김소월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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