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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중의 세계사> 8/24 발제문 (대공황과 나치즘)
삼월 / 2016-08-23 / 조회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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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공황

 

황금의 20년대는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막을 내렸다. 미국 주가가 거의 1/3 폭락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뿌리 깊은 결함을 드러냈다. 1930년과 31년을 지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미국의 지방은행 5천개가 파산하고, 미국의 생산량은 46%나 감소했다. 미국과 독일 노동자의 1/3, 그리고 영국 노동자의 1/5이 일자리를 잃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역할이 사라졌으며, 농산물 가격폭락으로 농민들도 은행의 빚 독촉에 시달렸다. 미국과 서유럽의 공황은 세계 공황으로 이어졌다. 이 지역들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던 제3세계 국가들은 갑자기 시장이 사라지면서 쑥대밭이 되었다.

지배계급에게도 불황의 충격이 번졌다. 기업가들이 줄줄이 파산하자 기업가들은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기 나라 통화 가치를 낮춰 상품을 싸게 팔려고 했고, 관세와 수입쿼터제를 도입해 수입을 억제하려 했다. 국제 무역량은 1928년의 1/3로 줄었다. 흔히 오해하듯 무역 규제가 불황을 낳은 게 아니라 불황으로 규제가 나타난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욱 파괴되었고 차라리 자급형 영세농이 타격을 가장 덜 받았다. 1930년대는 모든 도시에서 희망과 절망, 혁명과 반혁명이 대결하던 시기였고, 그 10년 후에는 반혁명이 승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은 제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을 넘어섰다.

 

 

러시아 : 물구나무선 혁명

 

서구와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는 공황의 수혜자 중 하나였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혁명적 사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공산주의는 소수의 노동자와 실업자들, 수많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가 대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대다수는 공산당에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 1930년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소련식 혁명을 의미했지만, 러시아에는 이미 1917년 혁명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1924년 레닌 사망 전에도 관료화로 인해 노동자 국가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혁명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양보조치, 즉 신경제정책(NEP)을 시행했다. 인민 대다수의 생활은 완만하게 향상됐으나,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산업은 국가의 수중에서도 시장의 압력에 종속되었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레닌 사망 당시 소련 정부에 사회주의적 경향이 남아있었다면 그것은 사회적 토대가 아니라 최고결정권자들에게 여전히 남은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레닌이 유언으로 스탈린의 축출을 지시했을 때, 몇몇 지도부에 의해 이 유언은 무시되었다. 1920년대에는 당 지도부 내에 반대파 운동이 연이어 있었다. 1923 ~ 24년에는 관료화에 비판적인 볼셰비키 46인이 공개서한을 필두로 광범한 반대파 운동을 벌였고, 이들은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국가의 건강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으로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을 높이기 위한 공업의 확충, 노동자 민주주의 확대, 당과 국가 내부의 관료화 경향 종식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내에서 관료적 보수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혁명이 다른 국가들로 확산되지 않으면 사멸될 것이라는 레닌과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관료적 특권을 위해 투쟁한 지배집단의 대표주자였다. 이제 스탈린과 그 동료들은 노동계급을 경찰력으로 탄압하고, 반대파를 당에서 축출하여 유형 보내고, 트로츠키를 추방했다. 1930년대 러시아는 수용소와 강제노동이 존재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모했다. 스탈린이 추구하는 방식의 산업화 전략을 지속하려면 농민이 계속해서 도시에 양곡을 공급해주어야 했고,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 시도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둘 다 가능하지 않은 전제였다. 1928년 중반에 농민들이 양곡판매를 거부했고, 영국이 외교관계 단절과 무역금지 조치를 취해왔다.

지배집단은 양분되었고, 스탈린은 강제 공업화를 위해 양곡을 강제로 징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양곡을 수출하여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를 사들이는 정책도 시작되었다. 공업 성장을 위해 소비재의 생산을 줄였는데 이 때문에 농민들은 양곡을 징발당해도 소비재를 얻지 못했다. 이제 농민들에게서 양곡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곡물이 아닌 토지 자체를 징발해야 했다. 토지 집산화로 농업총생산은 감소했고, 농민들은 강제로 이주 당했다. 노동조합은 국가에 완전히 종속됐고, 예술이나 논쟁은 억압되었다. 레닌 시절의 간부들을 처형당했고, 망명한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명령에 의해 암살되었다.

스탈린 추종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계승자라고 주장했으나 그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피의 강이 놓여있었다. 스탈린은 자본가의 논리를 이용해 농민들을 수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비러시아계 주민들을 탄압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분쇄했다. 서구 자본주의에서 수백 년이 걸린 일을 스탈린은 불과 20년 안에 해내려했다. 스탈린 지배 하에서 자본은 국가의 개입과 도움으로 규모를 불렸고, 국가가 경제 전체를 조정해 생산을 축적에 종속시켰다.

이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 스탈린주의가 러시아에서 사적 자본주의를 분쇄했고, 동유럽과 중국도 이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전시 경제 방식과 흡사했다. 중공업 건설과 무기 생산을 위해 대중의 소비를 계획적으로 억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1930년대에 다른 나라들의 경기가 위축되는 동안에도 공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민중의 막대한 희생이 따랐다. 곧이어 세계 경기에 영향을 받았고, 심한 식량 수탈로 3백만이 넘는 농민이 굶어죽었다.

 

 

세계 혁명의 포기

 

스탈린주의는 고립에 대한 대응책이었지만, 고립을 영속화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선택한 각국의 동맹자들-영국의 TUC와 중국의 장제스-은 사회주의 혁명과 거리가 멀었다. 영국과 중국에서의 실수를 은폐하려고 스탈린은 자신들을 비판하려는 전 세계 공산당 내부 세력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 때문에 1929년 이후 스페인과 쿠바, 프랑스, 미국 등에서 노동자들이 급진적 투쟁과 혁명적 봉기를 일으켰을 때 각국의 공산당들은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지 못했다. 전 세계 공산당원의 수가 급감하였는데, 독일은 심각한 위기 덕에 오히려 공산당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와 사회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독일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는데, 실업자 당원이 절반을 넘어 작업장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 당원은 드물었다.

 

 

히틀러 : 권력으로 가는 길

 

1929년 당시 노동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나 독일 모두 공황에 대한 대처방법을 알지 못했다. 영국은 식민지 때문에 독일이나 미국보다 위기가 덜했는데, 이 때문에 공황 탈출을 낙관하며 1933년과 34년에 변종파시즘이 득세하기도 했다. 독일은 영국보다 실업률이 50% 높았고, 중간계급도 궁핍을 겪었으며, 공황 때문에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 지지율이 치솟았다. 나치는 당 조직 핵심부에 준군사 집단인 SA, 즉 돌격대가 있었고, 이들이 유대인 금융자본과 노동계급운동 모두를 공격했다. 다른 사회조직을 공격하는 이런 무장력이 나치즘과 파시즘을 기존 부르주아 정당과 구별하는 특징이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조직원들을 결속시킨 것은 강렬한 민족주의였지만 히틀러와 나치의 특징은 반유대주의였다. 경제위기로 나치의 지지율은 점점 높아졌다. 나치당의 핵심지지 세력은 중간계급이었는데, 이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신들과 노동자대중을 구별하기를 원했다. 정부와 금융가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노동자대중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에게 동시에 존재했으며, 좌파정치인들에 대한 실망도 나치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사회민주당은 나치를 합법 영역 안에 들어오도록 하여 분쇄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대중의 지지는 이들에게서 나치로 돌아섰다. 사회민주당은 정책이나 무장력 등 모든 면에서 나치보다 무력했다. 한편 지배계급은 나치를 이용해 좌파와 노동조합에 맞서기로 했다. 대기업가들에게 나치와 히틀러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로 보였다. 결국 독일 중간계급의 대중운동을 확실하게 조직하고 대기업의 후원까지 받게 된 히틀러가 1933년 1월 31일 합법적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사회민주당은 그 합법성에 맞서지 못했다.

스탈린은 나치가 다른 부르주아 정권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여겼으나, 나치의 노동계급에 대한 탄압은 부르주아 정당보다 더욱 철저했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은 곧 국가기구에 통합되었고, 돌격대와 경찰이 한통속이 되어 노동계급 운동을 탄압했다. 2월 27일 공산당 활동이 금지되었고, 기관지 발행이 정지되고, 1만 명이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사회민주당은 나치와 타협을 하려고 했으나, 곧 이들 역시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정권을 장악하고 난 히틀러는 자신을 지지해준 모든 조직들을 공격하며 해산을 요구했다. 저항의 기미가 보이면 정치경찰(게슈타포)이 집단수용소로 끌고 갔고, 전체주의 정책에 대한 모든 이의는 공포가 잠재웠다. 나치의 통치는 대기업가들과 군 장교단의 직접적 동의를 기반으로 유지됐다. 히틀러가 이들을 위해 자신의 친위대를 동원해 돌격대를 암살함으로써 이들은 혈맹관계로 발전했다. 그 대가로 히틀러는 총통 자리를 얻었고 모든 정치권력이 그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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