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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세미나] 9월 9일 후기 +2
선우 / 2016-09-17 / 조회 2,413 

본문

시니피앙의 그물망(시니피앙적인 공시태, 무의식, 지각의 흔적, 주체가 구성되는 자리)

무의식은 ‘의식’이 없다는 것일까요? 사유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프로이트에게 있어 무의식은 거부된 것, 실현되지 않은 것, 그리하여 억압된 ‘사고’입니다. 의식 너머의 장에도 역시 ‘사유’가 있습니다. 이 의식 너머 무의식이 펼쳐지는 자리에 두어야 할 것 역시 데카르트의 주체와 동일한 ‘주체’입니다. 심리학적인 ‘자아’가 아니지요. 무의식의 주체는 지각과 의식의 간극에서 구성됩니다. 따라서 지각과 의식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지각의 흔적들이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그것들이 먼저 지각 속에서 지워져야 하며, 또 반대로 기억이 지각의 흔적 속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기억이 지워져야 한다.”(76)

 

우리는 보통 우리가 지각한 것을 곧바로 의식(기억)으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지각의 흔적은 기억과 분리될 필요가 있고, 오히려 무의식과 연결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무의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 이라는 통시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표가 동시대 속에서 다른 기표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시니피앙적인 공시태입니다. 지각 흔적들의 공시적 그물망이지요.

 

반복

반복은 사유하는 자로서의 주체가 실재와 만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82) 반복은 기호들의 회귀가 아닙니다. 반복은 재생이 아닙니다. 반복은 일종의 행위화된 기억에 의해 주조된 변조도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을 지금 행위로 재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표상차원에서 불가능했던 실재가 행동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면의 표출이 아니라, 실재의 반복으로서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표상, 이미지, 기억이 아니고 ‘충동’입니다.

 

투케와 오토마톤

이 부분은 정수샘 강의안을 다시 읽었습니다.^^

라캉은 우연을 오토마톤과 투케로 구분하는데요. 오토마톤은 어떤 내용을 입력하면 자동적으로 특정한 출력이 이루어지는 구조, 자동판매기 같은 구조입니다. 기호들의 회귀, 재귀, 되풀이로 쾌락원칙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우연입니다. 상징계의 우연으로서, 인간의 의지나 욕망이 개입하지지 않고 오직 기계적인 필연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이 오토마톤의 우연입니다. 이렇게 ‘필연’과 짝하는 우연이 오토마톤이라면, 투케는 ‘운명’과 짝하는 우연입니다.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는 신이 투케죠.

라캉은 우연을 ‘만남’으로도 정의하고 있는데요, 오토마톤이 상징계와의 만남이라면 투케는 실재와의 만남입니다. 바로 여기, 실재와의 만남이 항상 실패하고 어긋나기에 ‘반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재랑 만나고 싶은 ‘충동’이 계속해서 반복을 불러오는 것이지요.

 

첫 번째 강의안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입니다.

“운명적 우연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기다리고 감당할 주체의 의지와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감당할 주체의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

내 인생, 내 운명은 나의 충동, 욕망의 산물이라는 것!

이 사실을 이제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이세요?”

죽은 아이가 불타고 있는 꿈이 계속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선 프로이트는 이 꿈 역시 소원 성취의 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들이 죽어 관에 누워 있다. 아버지는 아들이 여전히 살아있었으면 한다. 시신을 지키게 한 노인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꿈 속에 아들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걸고 팔도 잡아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있는 것 같은 이 꿈 속 현실이 좋다. 그래서 잠을 한 순간이라도 더 연장한다.

라캉은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버지의 잠을 깨운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지요. “그것은 꿈 ‘속에 있는’ 또다른 현실이 아닐까요? 아이가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팔을 잡고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이세요?’ 이러한 메시지 안에는 아버지로 하여금 옆방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실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소리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현실이 들어 있지 않을까요? 이 말 속에는 아이의 죽음의 원인이 된 어긋난 현실이 나타나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우연한 사고 속에서 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결국 보다 운명적이라 할 무언가가 아버지가 잠이 깨서 올 때까지도 시신을 지켜볼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잠들어 있던 현실, 바로 그 현실을 ‘수단으로’ 해서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요?”(94-95)

아버지는 결국 잠에서 깨어 실제로 아들이 불타고 있는 현실을 마주했으며, 그 이전에 이미 꿈 속 아이의 비탄의 목소리가 아버지로 하여금 자신의 죄의식, 자신의 진실, 욕망, 충동, 실재를 만나게 했다는 것이 라캉의 해석으로 보입니다.

 

눈과 응시의 분열

이 부분은 라캉의 논의의 출발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봄’의 충동을 구성하는 요소가 단순히 내가 무언가를 보는 나의 시선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타자의 응시’가 ‘봄’의 쾌락을 구성하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라캉은 말합니다. 물론 이 타자는 또다른 나라든지, 상상적 대상, 아버지, 인격적 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다음 세미나에서 차차...^^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운명적 우연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기다리고 감당할 주체의 의지와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감당할 주체의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

 저도 이 대목이 가장 인상 깊더라고요. ㅎㅎㅎ

선우님의 댓글

선우 댓글의 댓글

언젠가 유택님이 사십대 인생에 대해 얘기한거 떠오르네요.
우리 사십대에 다시한번 파이팅을 보냅니다.^^
그나저나 이번주 진도 읽었는데 나도 안드로메다 가는 기분이예요 ㅋㅋㅋ
강의안으로 우회작전을 펴야할 듯 ㅎㅎ
금욜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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