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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진리와 방법> 9/28 세미나 발제문
삼월 / 2016-10-01 / 조회 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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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서론

 

이 책은 해석학에 대한 책이다. 이해라는 현상과 이해한 것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문제가 정신과학적 방법론의 고유한 문제는 아니다. 해석학의 문제는 근대학문의 방법 개념으로 설정된 경계를 넘어선다.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를 넘어 인간의 세계경험 전체에 속한다. 해석학에서 이해의 방법, 인식의 구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식과 진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텍스트의 전승에서 획득되는 통찰과 인식되는 진리는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이해의 현상은 학문 내에서도 독립적인 타당성을 가지며, 자신을 일종의 학문의 방법으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에 저항한다. 이 책의 연구는 그 저항과 관련이 있다.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을 찾아내어 그 고유한 정당성에 관해 물으려는 것이다. 정신과학은 과학 외적인 경험 방식들, 즉 철학의 경험, 예술의 경험 그리고 역사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경험방식들은 과학의 방법적 수단으로 검증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 준다.

우리 시대의 철학은 이 점을 아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학문 외적인 인식방식의 진리 요구가 어느 정도까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물음에서, 정당성은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온다. 이러한 확신은 철학연구에서 철학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철학 사상의 진리요구는 시대성을 넘어서는 철학적 사유의 기본경험에 속한다. 현대의 철학적 사유는 자신의 통찰이 고대 철학자에 비해 열등함을 시인하면서 고전적 전승의 해석과 정리에 전념하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통해 다른 길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예술작품에서 경험한다는 사실은 모든 이성적 논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이제 예술의 경험은 과학적 의식의 한계를 시인하라는 경고가 된다. 연구는 여기서 미적 의식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 비판을 통해 과학의 진리 개념으로 인하여 협소해질 수 있는 미학이론에 대항해서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경험을 옹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우리의 해석학적 경험 전체에 상응하는 인식 및 진리의 개념을 전개하려고 한다. 정신과학의 모든 형태에서 역사적 전승은 연구의 대상인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진리를 말한다. 역사적 전승은 언제나 진리를 매개하며, 중요한 것은 이 진리에 관여하는 것이다.

해석학에 관한 연구는 예술과 역사적 전승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해석학적 현상을 명료하게 하려고 한다. 해석학적 현상에서는 진리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의 경험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사유방식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라, 정신과학이 과연 무엇이며, 정신과학을 우리의 세계경험 전체와 결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역사적 변천의 경험으로부터 나타나는 왜곡과 망각에 대해서도 통찰하려고 한다. 우리의 역사적 의식은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역사적 전승과 함께 자연적 생활 질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통일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경험하고, 역사적 전승을 경험하고, 우리의 실존 및 세계의 자연적 조건을 경험하는가 하는 문제가 진정한 해석학적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정신과학의 진리에 대한 성찰도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되며, 가능한 역사적 자기명료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해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이해와 해석이 원리적이지 않으며, 지속적 형성이라는 점도 의식해야 한다. 현대의 철학은 고전의 단절 없는 연속이 아니다. 오늘날 철학은 자신과 고전적 원형들 사이의 역사적 거리를 잘 의식하고 있다. 전통적 개념들과의 관계도 변했고, 최근 학문들에서는 전통적 개념들의 구속력이 많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해석학적 경험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철학적 사유가 전개되는 개념의 세계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항상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이 사로잡혀있음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사유의 철저성에 속한다. 개인이 세계와의 소통과정에서 습득한 언어 및 사유관습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 우리가 속한 역사적 전통의 광장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일종의 새로운 비판적 의식이다.

    

 

1부 예술경험에서 발굴하는 진리 문제

Ⅰ 미적 차원의 초월

1.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 전통이 지니는 의미

1) 방법의 문제

 

19세기 정신과학의 논리적 자기성찰은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삼는다. ‘정신과학들’이라는 단어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연역 논리학과 귀납 논리학의 체계』를 독일어로 번역한 번역자가 처음 사용했다. 밀의 논리학은 정신과학의 고유한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흄이 말한 인간과학에서도 개별적 현상 및 과정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는 균일성과 규칙성, 법칙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맥락과 연결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귀납적 방식이 늘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례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귀납적 방법은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특정한 결과의 원인에 대한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순히 규칙성만 확인될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이상이 나타난다.

법칙성을 척도로 삼을 때 정신과학의 본질이 올바르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대한 문제이다. 자연과학의 귀납적 방법으로는 사회적·역사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학문의 단계로 올려놓을 수 없다. 또 역사적 인식은 구체적 현상을 일반적 규칙의 사례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개별사례가 실제 적용에서 예측 가능한 법칙성을 증명해주지 않으며, 역사적 인식은 현상 자체를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법칙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사례들의 이해이다.

그렇다면 이 이해의 인식은 어떤 인식인가? 1862년 헤르만 헬름홀츠는 한 연설에서 정신과학의 우월한 인문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논리적 서술은 자연과학의 방법 이상에서 출발했다. 헬름홀츠는 귀납법을 논리적 귀납법과 예술적·본능적 귀납법으로 구분하였다. 사실 구분은 논리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이다. 귀납적 추론의 두 방법 중 정신과학의 추론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정신과학적 귀납법의 사용은 감지력이라는 특수한 심리학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자연과학자들의 의식적 추론작업은 오성에 의존한다.

헬름홀츠는 자연과학의 방법이 역사적 유래나 인식론적 제약에서 자유롭다고 믿었고, 이 믿음을 정신과학에도 적용했다. 이제 역사적 연구의 문제가 시급해졌다. 1843년 드로이젠은 역사 개념이 정신과학의 발전 계기가 될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드로이젠은 정신과학이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자립적 학문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딜타이는 밀의 논리학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정신의 개념 속에 깃든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유산에 매달렸다. 딜타이는 자연과학적 사유에 대한 역사학파의 우월성을 직시하며, 밀의 논리적 요구와 논쟁하려 했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방법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역사에 대한 거리 확보가 딜타이에게는 학문적 인식의 일환이며, 이 거리 확보를 통해서만 역사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딜타이가 추구했던 목적은 정신과학적 방법의 독립성과, 이 독립성에 대한 규명이었다. 그러나 딜타이는 ‘자연은 우리가 자연에 순응함으로써만 정복된다’는 베이컨의 명제를 인용하며, 헬름홀츠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가 근대학문에서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자연과학에서만 모범으로 작용할 뿐이다.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이란 없다. 정신과학의 작업방식 논의는 여기서 다시 헬름홀츠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헬름홀츠가 정신과학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 기억과 권위를 강조하고, 의식적 추론을 대신한다는 심리적 감지력에 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감지력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정신과학의 학문성은 방법론보다는 감지력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정신과학이 근대의 학문개념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철학 자체의 문제로 대두되어 철학의 문제로 남게 된다. 헬름홀츠는 역사적 인식에서 귀납적 방법이 자연연구와 왜 다른 조건에 놓이는지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정신과학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자연과학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독일 고전주의는 문학 및 미학적 비평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바로크나 계몽주의를 극복했다. 동시에 인간성과 ‘인간 형성’이라는 이상을 부각시켜 19세기에 정신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이 당시 중요한 용어로 부상한 교양Bildung의 개념은 19세기 정신과학이 지닌 본질적 요소를 드러내준다.

 

2) 인문주의의 주요개념들

① 교양

언어에 얽매어 끌려 다니지 않고 역사적으로 자기를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낱말과 개념의 역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예술’ ‘역사’ ‘창조적인 것’ ‘세계관’ ‘체험’ ‘천재’ ‘외부 세계’ ‘내면성’ ‘표현’ ‘양식’ ‘상징’ 같은 개념들은 자명하지만, 그 자체 내에 풍부한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는 교양이라는 낱말의 역사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관련을 맺다가 마지막에는 헤르더가 규정한대로 ‘인간성에로의 고차적 형성’이라는 의미로 남게 되었다. 19세기의 교양에 대한 신앙은 이 낱말의 심층적 차원을 보존했고,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양 개념이 비롯되었다.

‘Bildung(교양)’이라는 낱말 안에서 ‘잘 형성된 모습’과 ‘자연적 형성’이라는 낡은 개념은 새롭게 대체되었다. 교양은 이제 자신의 자연적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는 인간의 독특한 방식을 말하게 되었으며, 육성의 개념과 밀접해졌다. 헤르더의 교양 개념은 칸트와 헤겔 사이에서 완성된다. 칸트가 말하는 ‘육성’은 행동하는 주체의 자유에 기호한 행위이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들 중 타고난 재능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의무도 포함된다. 헤겔은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자기형성과 교양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에 훔불트는 섬세한 감각으로 육성과 교양의 의미를 구별한다.

여기서 교양이란 육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교양이라는 낱말의 격상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신의 형상을 자신 안에서 구축해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킨다. Bildung은 다시 Formation과 구분된다. 교양은 과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성 과정의 결과를 말한다. 교양의 결과는 지속적 형성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밖에 있는 목표로 상정되지 않는다. 습득된 교양 안에서는 어떠한 것도 사라져버리지 않으며, 교양이 수용하는 모든 것은 교양과 하나가 된다. 교양은 진정한 역사적 개념이며, 이 보존의 역사적 성격이 정신과학의 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해서 ‘교양’ 개념은 그 역사를 통해 철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개념들’의 주변으로 다가가게 된다. 헤겔은 철학의 “존재조건이 교양에 있다”고 간파했다. 정신과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특징은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것과의 단절로 형성되며, 이 단절은 인간 본질의 정신적·이성적 측면에서 요구된다. 인간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교양의 보편성에 근거한다. 헤겔은 보편성으로의 고양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 시대 교양의 의미를 통일적으로 파악했다. 보편성으로의 고양은 이론적 교양과 실천적 태도, 나아가 인간의 이성적인 것 전체의 본질 규정을 포함한다. 자신을 보편적인 정신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인간 교양의 보편적 본질이다.

결국 보편성으로의 고양이라는 교양이 인간의 과제이다. 교양은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의 희생을 요구한다. 희생을 위한 대상의 억제가 대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이라면, 헤겔은 의식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동하는 의식으로서의 인간은 자신 안에서 자기의 의미를 발견한다. 노동하는 의식의 자기감정은 실천적 교양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리고 보편성의 요구를 포함한다.

헤겔의 실천적 교양에 대한 서술에서 우리는 역사적 정신의 기본규정 - 자신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 자기 자신을 다른 존재에서 인식하는 것 - 을 알게 된다. 이론적 교양의 본질이 사물의 보편적 관점들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보면 모든 교양의 습득은 이론적 관심들의 계발을 능가한다. 이질적인 것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정신의 기본운동이다. 정신의 존재는 타자 존재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적 존재로부터 정신적 존재로 고양된 개인은 언제나 이미 형성된 세계 속에서 교양과정에 있으며, 자신의 자연적 상태를 지양하려고 한다. 결국 교양의 본질은 소외를 전제하는,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헤겔에게 교양은 모든 대상적 본질의 해소로 완성된다.

헬름홀츠가 감지력이라고 불렀던 것은, 역사적 정신과학이 그 안에서 활동하는 본령이라는 교양을 전제하며, 그 안에서 허용된다. 기억과 감지력은 인식에 도달하는 부수적 심리능력이 아니다. 또 기억은 인간의 보편적 소질이나 능력도 아니다. 니체가 강조한 것처럼, 망각은 우리 정신에 있어 삶의 한 조건이다. 헬름홀츠의 ‘감지력’ 개념에도 기억과 망각의 문제가 적용된다. 우리는 감지력을 상황에 대한 특정한 감수성과 감각능력, 그리고 상황 안에서의 태도로 이해한다. 이런 지식은 보편적 형태로 얻을 수 없고, 감지력은 본질상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감지력은 거리를 유지하게 해 주는 감정이며, 인식방식이고 존재방식이다. 헬름홀츠가 감지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양을 포함하며, 미적 교양 및 역사적 교양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교양은 방법적 절차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된 존재의 문제이다. 교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한 보편적 감각이 있으며, 이 점에서 교양은 자기 자신을 넘어 보편성으로의 고양을 지향한다. 이 보편성은 개념이나 오성의 보편성이 아니다. 교양인의 의식 그 자체는 모든 방향에서 활동하는 보편적 감각이다. 보편적 공통감각이 교양의 광대한 역사적 연관을 암시적으로 표현해주는 적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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