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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3 :: 6~7장 발제
오라클 / 2016-10-05 / 조회 1,177 

본문

6. 문화의 목적, 현재의 문화권력들, 새로운 문화의 근본사상

 

[1] 인류의 목적, 문화의 목적 :: 위대한 인간의 탄생, 천재의 산출

 

인류의 목적은 위대한 인간의 탄생에 있다 > 우리는 동물계와 식물계의 가르침을 사회에 적용하고 싶어한다. ① (자연계의 목표 - 최고표본) 더 비범하고 더 강력하고 더 복잡하고 더 생산적인 최고표본이 중요하다. 하나의 종이 경계에 도달하여 높은 종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 그 종의 발전목표는, 최고표본이며 대다수 표본이나 나중에 나타난 종은 아니다. ② (인류의 목적 – 위대한 인간) 마찬가지로 인류는 끊임없이 노력해 위대한 인간을 낳아야 한다. 이것이 인류의 임무다. 인류는 위대한 구원자가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③ (인류의 목적 – 만인의 행복) 이에 반대하여 인류의 목적은 위대한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만인의 행복이나 공동체의 발전에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인간이 모든 사람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한 인간(*위대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와 의미가 문제되는 곳에서 수로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과 같다! (ex.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 개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다수의 가치없는 표본들의 이익이 아니라, 희귀하고 소중한 표본의 이익을 위해 살 때에만 최고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졌을 때 젊은 사람들은, 자신은 자연의 실패작이지만, 예술가 자연의 위대한 의도의 증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화의 첫 번째 축성 > ① (문화의 첫 번째 축성 :: 내적 상태, 위대한 인간에 대해 집착하는 것)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의도로 문화의 영역에 나선다. 문화는 개개인의 자기인식의 자식이며 자기불만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보다 더 높고 더 인간적인 것에 도달하도록 도와다오. 그렇게 하여 인식에서나 사랑에서, 관조에서나 능력에서 위대한 사람이 다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을 가르치기는 불가능한 탓에 이러한 대담한 자기인식을 갖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영혼은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시각(자신을 분석하고 멸시하는 시선뿐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더 높은 자아를 탐색하려는 욕망)을 얻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대한 인간에게 집착하는 사람만이 문화의 첫 숙성을 영접한다. ② (문화의 축성을 영접한 기호) 문화의 축성을 영접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호로 나타난다. 먼저, 불쾌감이 없는 자기수치, 편협함과 위축에 대한 증오, 천재에 대한 동정. 다음, 생성하고 투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예감, 곤경에 처한 자연을 곳곳에서 마주하리라는 확신(자연은 인간에게 달려들고 자연은 작품이 실패했음을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멋진 단초·경향·형식들이 자연에게 이루어질 것이며 인간들은 작품의 파편처럼 전체가 되기를 동경할 것이라는 확신. 이런 내적 상태들이 문화의 첫 축성이다. 

 

문화의 두 번째 축성 > ① (문화의 두 번째 축성 :: 외적 사건의 평가, 위대한 인간의 산출이라는 문화의 목적을 인식하는 것) 문화의 두 번째 축성은 외적 사건의 평가와 관련된다. 문화는 개개인에게서 내적 체험뿐 아니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외부세계의 평가를 요구한다. 또한 문화를 위한 투쟁은 천재의 산출이라는 문화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영향-습관-법과 제도에 대한 적대심을 요구한다. 문화의 목적에 대한 지식은 비정상적으로 빈약한 반면, 문화를 위한 노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② (자연의 무의식성 :: 인간의 탄생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충동) 자연의 무의식적 목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목표를 잘못 정해도, 자연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사람들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③ (문화의 목적성 :: 인간의 탄생을 위한 의식된 의지) 그러나 문화의 목적은 진정한 인간의 탄생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문화의 낭비와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탄생은 동물 학대와 차이나지 않는다. (*문화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면 문화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탄생을 불가능하다) ‘어두운 충동’ 대신 ‘의식된 의지’가 들어설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충동을 최고목적인 천재의 출현이 달성될 수 있는 길로 가게 할 수 있다. 

 

[2] 문화를 장려하지만 문화의 목적(천재의 산출)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들 (문화를 장려하는 사람들의 이기심)

 *자연의 어두운 충동 대신 문화의 의식된 의지가 필요한 것은, 악용되고 고용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를 장려하는 권력들은 꿍꿍이속이 있다. 

 

첫째 영리추구자(자본가)의 이기심 > (획득하는자, 소득자, 소득인, 영리추구자, 이윤추구자) ① (자본가의 이기심) 영리추구자는 문화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문화를 도와주지만, 문화의 목적과 척도를 지정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지정하는 문화의 목적과 척도는 가능한 많은, 인식과 교양-욕구-생산-이득과 행복이다. 그들은 교양을 욕구 충족 속에서 시대와 일치할 수 있는 통찰로 규정하는데, 이 통찰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지배할 수 있다. 화폐의 유통처럼 유통하는 인간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며, 유통하는 인간을 많이 소유할수록 민족은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현대적 교육기관의 목표는, 유통적 인간이 되도록 장려하고, 각자의 인식과 지식으로부터 많은 양의 행복과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② (요구하는 교양 : 소유와 부와 연결되는) 여기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개인이 교양에 힘입어 스스로의 값어치를 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성과 소유, 부와 문화’ 사이에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며 윤리적인 끈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③ (기피하는 교양 : 진지한 교양) 여기서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고 돈과 소득을 넘어서는 목표를 정하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교양은 미움의 대상이 된다. 그런 진지한 교양을 ‘세련된 이기주의’나 ‘비윤리적인 교양-쾌락주의’라고 비방한다. ④ (속성교양, 영리교양) 여기서는 빨리 돈을 버는 존재가 되기 위한 속성교양, 많은 돈을 버는 존재가 되기 위한 철저한 교양이 값이 나간다. 일반적인 영리와 사상과의 교류에 도움이 되는 문화가 사람들에게 허용되고 요구된다. “인간은 지상의 행복에 대한 청구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교양은 필연적이다.”

 

둘째, 국가의 이기심 > ① (국가의 이기심) 영리추구자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문화가 가능한 널리 퍼지고 일반화되기를 열망하고, 이를 위해 유효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속박을 풀 뿐 아니라 제때 굴레를 씌울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시민들의 교양이 확산되면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도움이 된다. ② (정신력의 해방) ‘문화국가’가 언급되는 곳마다 국가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 세대의 정신력이 기존의 제도에 봉사할 수 있는 정도만큼만 정신력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이는 댐과 교각으로 시냇물 일부를 끌어들여 조그만 힘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과 같은데, 시냇물 전체의 힘은 물레방아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한 정신력의 해방은 동시에 정신력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③ (기독교의 영우) 기독교는 문화에 대한 충동(새로운 성자의 산출에 대한 충동)이 가장 순수하게 계시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국가적 폭력의 방아를 돌리기 위해 수백번이나 이용되었기 때문에 골수까지 병들과 위선과 거짓에 빠지고 타락했다. 

 

셋째, 교양 속물(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이기심 > (추하거나 지루한 내용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감추려는 사람들 = 자신을 위장하고 형식으로 감출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 = 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 교양속물) ① (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추하거나 지루한 내용을 의식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감추려는 사람들은 문화를 장려한다. 그들은 말과 동작, 장식·과시나 예절 같은 외면적인 것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용에 관해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현대인은 끝도 없이 서로서로 지루해하고, 예술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흥미롭게 만들 필요성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가들을 시켜 자극적인 음식을 만들어 식탁에 올리게 하고, 자신들 위에 동서양의 온갖 양념을 다 뿌린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취향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② (프랑스의 우아함에 대한 순응으로 ······> 아름다운 형식이 필요) 흥미를 끌기를 원하는 현대인들 중에 가장 유명한 요리사는 프랑스인이고, 가장 나쁜 요리사는 독일인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독일 사람들에게 우아한 세상 반쪽으로의 여행이었다. 예술작품, 주택, 독일어, 극장, 독일학자 등 모든 것이 프랑스의 우아함에 순응하고 있다. 독일음악, 비극, 철학 등 우아함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았던 모든 것은 비독일적인 것으로 홀대받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이 문화라는 것을, 댄스교사와 실내장식가의 발명재간이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재주로 이해한다면, 독일문화를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③ (독일인의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 허위 우아함이 필요) 독일에 만연한 ‘아름다운 형식’에 대한 애착을 좀더 깊이 조금함과 질주로부터 추론해낼 수 있다. 그들은 3가지 M(Moment, Meinung,, Mode) 순간, 의견, 유행의 피로한 노예로서 안절부절 못하며 미쳐 날뛴다. 그래서 부족함 위엄과 예의범절, 품위없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서 허위 우아함이 필요하게 된다. 아름다운 형식을 향한 유행적 탐욕은 현대인의 추한 내용과 서로 연관되는데, 탐욕은 무언가를 감추어야 하고 추한 내용은 감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교양있다는 것은, 자신의 비참함-형편없음-지칠 줄 모르는 수집욕-이기적이고 몰염치한 향유욕을 남들이 눈치 못채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독일인이 부유해지면 문화를 가질 것이다”는 믿음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나를 불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는 독일문화(부와 우아함과 예의바른 위장의 문화)는 내가 믿는 독일문화의 적대적인 대립상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모든 병과 약점이 치유될 수 없고 덧칠하여 감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화가 난다. 

 

넷째, 학문의 이기심과 학자의 본질 > ① (학문의 이기심) 학문과 지혜의 관계는 미덕과 성화의 관계와 같다. 학문은 차갑고 건조하며, 사랑도 없고, 불만과 동경 같은 감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문화를 학문의 장려로 이해하는 한, 학문은 고뇌하는 위대한 인간(천재) 옆을 냉혹하게 스쳐 지나간다. 학문은 도처에서 인식의 문제만을 볼 뿐이며, 고통(고뇌)이란 부적당하고 불가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② (학자의 본질 :: 차가운 해골인간) 모든 경험을 변증법적인 질문-대답 놀이와 순수한 두뇌문제로 바꾸는데 익숙해지면, 인간은 순식간에 메말라버리고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게 된다. 젊은이들이 그런 해골인간에게 놀라지도 않고 학문에 몸을 바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하인들(학자)에 대한 추동력’에서 나온다. 도대체 어떻게 차갑고 순수하고 결과 없는 인식에 대한 충동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③ (학자의 본질 :: 강한 인식 욕구) 학자들은 강한 호기심, 인식의 모험을 향한 욕구, 새롭고 희귀한 것의 자극적 힘을 취한다. 거기다 변증법적 추적본능과 사상의 교활한 여우통로를 찾으려는 사냥꾼의 의욕이 더해지면, 결코 진리가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 자체가 추구된다. 게다가 모순에 대한 충동이 참가되면, 인격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대항하면서 자신을 느낀다. 진리를 위한 투쟁은 구실일 뿐, 투쟁은 쾌락이 되고 개인적 승리는 목적이 된다. ④ (학자의 본질 :: 지배적인 것에 대한 복종심) 그런데 많은 학자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진리’를 찾으려는 충동도 섞여있다. 그들은 지배적 인물이나 계급, 지배적 의견, 교회나 정부에 대한 복종심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는데, 그 ‘진리’를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자신이 쓸모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⑤ (학자들의 특성) 학자들에게서는 다음의 특성이 나타난다. / 1. 우직함과 단순한 것에 대한 감각 / 2. 가까운 것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능력, 먼 것과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근시안 / 3. 애착과 혐오라는 점에서 냉정하고 평범함 / 4. 감정의 빈곤과 메마름 / 5. 낮은 자기평가, 겸손함 / 6. 스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 / 7. 근면 / 8. 지루함으로부터의 도피 / 9. 밥벌이의 동기 / 10. 동료학자에 대한 존경심, 자신에 대한 경멸의 두려움 / 11. 허영심 / 12. 게임본능 / 13. 정의를 향한 충동 ⑥ (학자 :: 진리의 하인)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섞어 흔들게 되면, 진리의 하인이 탄생할 것이다. 순수하고 결과도 없고 충동도 없는 인식이라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벗어난 초인적인 사업에 왜소한 인간적 충동들이 화학결합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학자는 천상적이고 고귀하고 순수한 사업의 광채 아래에서 미화된다. ⑦ (학자와 천재) 그러나 문화를 위해 학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학자는 본질상 비생산적이며 생산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증오를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천재와 학자는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학자는 자연을 죽이고 분해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천재는 활기찬 새 자연을 통해 자연을 증대하려 한다. 그래서 신념과 활동의 충돌이 발생하는데, 태평성대는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병들고 불만이 팽배한 시대는 학자를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으로 평가하고 첫째 서열을 부여한다. 건강과 병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시대는 어떠한지, 그걸 알 만한 의사가 누가 있겠는가! 현재도 학자의 평가는 지나치게 높고, 미래의 천재의 관심사에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학자는 천재의 고난에 대해 무정하고, 천재에 관해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간단하게 논하면서, 마치 관심을 쏟을 시간도 흥미도 없는 정신 나간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인다. 학자에게도 문화의 목적(천재의 산출)에 관한 지식은 찾을 수 없다. 

 

문화의 장려 ≠ 문화의 목적에 대한 지식 > 이 모든 고찰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밝혀졌는가? 문화가 가장 활기차게 장려되는 모든 곳에서 문화의 목적(천재의 산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① (국가) 국가가 아무리 문화를 위한 자신의 공적을 소리높여 주장해도, 국가는 스스로를 장려하기 위해 문화를 장려하며, 자신의 복지와 실존보다 더 높은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② (영리추구자=자본가) 영리추구자가 부단히 수업과 교양을 요구하면서 원하는 바는 결국 영리다. ③ (교양속물=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문화를 위한 진정한 작업을 자기 과제로 들리고, 예술은 자신들에게 속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그들은 문화를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을 긍정하는 것이다. ④ (학자) 학자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했다. ⑤ (천재의 발생조건) 이 4권력은 모두 어떻게 하면 문화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이롭게 할 수 있는지를 경쟁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천재의 발생조건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독창적인 인간에 대한 거부감은 커졌다. 

 

요약 : 문화를 장려하지만 문화의 목적(천재의 산출)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들 > ① 영리추구자(자본가)의 이기심 ② 국가의 이기심 ③ 교양속물(자신을 위장하고 형식으로 감출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 ④ 학문의 이기심과 학자들의 본질

[3] 현재 교육제도의 근본사상에 대한 비판, 새로운 문화의 근본사상에 대한 제안

 

현재 교육제도의 근본사상 비판 > ① (현재의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 문화의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한 믿음은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것이지만, 교육과 학교제도에 대한 결론은 끔찍할 수 있다. 현재의 고등교육자들의 노력으로 학자-국가관료-영리추구자-교양속물-이 모든 것은 혼합물이 만들어지는 한편, 앞으로 고안해야 할 제도는 더 힘든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이 과제는 그 자체로는 힘들지 않고 자연스러운 과제인데, 현재 이루어지는 것처럼 천성에 맞지 않는 젊은이를 학자로 훈련시키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제가 어디 있겠는가! ② (앞으로 고안할 제도에 대한 제안) 오히려 과제의 힘든 점은 인간에게 배우고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는 데 있다. 뿌리를 중세에 두고 중세의 학자를 교양의 목적으로 그리고 있는 현재 교육제도의 근본사상을 새로운 근본사상(*문화의 목적인 천재의 산출)으로 대체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새로운 문화의 근본사상 제안 > ① (문화의 새로운 사상과 2가지 방식) 문화의 새로운 근본사상을 이해한 개인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걸어가면 시대의 환영을 받을 것이고 시대는 꽃다발과 보상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첫 번째 의무가 “대오를 맞춰서 싸우라”이고 두 번째 의무는 “대오를 맞추지 않는 사람은 적으로 취급하라”는 것이다. 그가 다른 길을 걸어가면 동행자는 드물고 길을 힘들고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첫 번째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건너오라고 유혹하며, 두 길이 교차하면 그는 학대받고 옆으로 던져지거나 배제되어 고립된다. ② (2가지 방식과 문화의 제도) 두 길의 방랑자들에게 문화의 제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 번째 길에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무리에게 ‘문화의 제도’는 반항하고 고독한 사람-더 높은 목표를 내다보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설비와 법칙이다. 두 번째 길을 가는 소수의 다른 무리에게 ‘문화의 제도’는 전혀 다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들이 저 무리들로 인해 서로 흩어지지 못하게 막고, 너무 일찍 소진되어 사라지거나 위대한 과제로부터 멀어지지 못하게 막으려 한다. ③ (두 번째 길을 가는 사람의 과제) 두 번째 ‘문화의 제도’에 참여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정화와 상호배려를 통해 천재가 탄생할 수 있도록, 천재의 내면과 주변에서 그의 과업이 성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급이나 3급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이런 사명에 복종할 때 목표와 의미를 가지고 산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④ (2급, 3급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문화의 유혹) 그러나 2급이나 3급의 재능들이 유행적 ‘문화’의 유혹하는 목소리에 넘어가 궤도에서 이탈하고 자신들의 본능에서 멀어졌다. 문화의 유혹은 그들의 이기적 충동과 그들의 약점·허영심을 노리고 있고, 시대정신은 열심히 아첨하며 그들에게 속삭인다. “너희는 하인-도구에 불과하며, 더 높은 천성을 가진 자들의 빛에 가려 너희의 독자성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여기 내게서 너희는 주인으로 자유로운 인격을 향유할 수 있다. 너희의 재능은 자신을 위해 빛날 수 있고, 너희는 가장 앞자리에 서고 추종자들이 너희를 둘러쌀 것이고, 천재의 차가운 대기로부터 내려다보며 보내는 동의보다, 여론의 갈채는 너희를 더 즐겁게 만들 것이다.” ⑤ (천재와의 내적 친화성 결합의 정도)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재능의 희소성이나 힘이 아니라, 어떤 영웅적 분위기의 영향과 천재와의 내적 친화성·결합의 정도이다. 왜냐하면 천재가 힘겹게 싸우다가 파멸의 위험에 빠진 것을 보고, 천재의 작품이 국가의 근시안적 이기심, 이윤추구자의 천박한 감각, 학자의 건조한 절제로 인해 무관심하게 옆으로 제쳐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곤경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7. 미래 철학자를 위한 과제

 

미래 철학자를 위한 과제 > 미래철학자(쇼펜하우어)가 숨 쉴 수 있고 실존을 성취하려면, 현재 그에게 무엇을 기원하고 무엇을 제공해주어야 하는가? 그의 영향력이 동시대인에게 더 커지려면 무엇을 고안해야 하는가? 또 철학자가 다시 철학자들을 교육시키려면 어떤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의 고찰은 실천적인 것, 불쾌한 것으로 이어진다. 

 

자연 & 철학자, 예술가 > ① (자연의 목적 & 자연의 수단) 자연은 공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최적의 수단과 기회를 발견할 줄 모른다. 이것이 자연의 큰 괴로움이고, 그래서 자연은 우울한 것이다. 자연이 철학자와 예술가의 산출을 통해, 인간에게 현존재를 해석하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주길 바라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다. 그러나 자연이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서 얻는 결과는 불확실하고 빈약하다. ② (철학자의 경우) 특히 자연이 철학자를 공익을 위해 사용하려 할 때 낭패를 보는데, 자연의 수단은 이것저것 두드려보는 시도에 불과하고 우연한 착상처럼 보이고 그래서 자연의 의도는 실패하고 철학자들은 공익적이 되지 못한다. 자연의 일처리방식은 낭비처럼 보이지만, 악의적 호사의 낭비가 아니라, 경험 미숙의 낭비다. 자연은 철학자를 화살처럼 인간 속으로 쏘지만 맞히지 못한다. ③ (문화의 영역) 자연은 문화의 영역에서도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듯이 낭비적이다. 자연은 일반적이고 답답한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하면서,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한다. 예술가와 예술애호가의 관계는 거친 대포와 몇 마리 참새의 관계와 같다. 얼마 안되는 눈을 치우려다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키고, 코 위의 파리를 잡으려다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은 악의 없는 순진함의 작품이다. ④ (원인으로서 예술 & 결과로서 예술) 예술가와 철학자는 자연의 목적이 현명하다는 증거이지만, 자연이 목적에 적합하지 않게 수단을 사용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술가와 철학자는 만인을 명중시켜야 하는데, 항상 몇 명만을 맞출 뿐이다. 원인으로서의 예술은 거대하지만, 결과로서의 예술은 활기없고 잔잔하다. 예술가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작품을 만들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할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처럼 자연을 미숙하게 사용하고 나면,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 낮고 평범한 것의 발생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⑤ (자연의 경제 운용) 자연은 현명하게 경제를 운용하지 못하는데, 자연의 지출은 수입보다 많다. 예컨대 소수의 힘없는 예술가보다 수많은 예술수용자가 더 강해서 예술작품의 영향이 원인에 비해 더 큰 방향을 얻는다면, 자연은 합리적으로 경제를 운용했을 것이다. 

 *자연의 일처리 방식 & 자본의 일처리 방식 

  자연의 일처리방식 : 낭비적, 비효율성 비목적성 <······> 자본의 일처리방식 : 영리적, 효율성, 목적성

  자연의 일처리방식을 통해 자본의 영리성, 효율성, 목적성을 비판하고 있다. 

 

미래의 천재, 쇼펜하우어 > 1-① (위대한 쇼펜하우어) 그러나 예술가와 철학자는 은둔자로서 뒤처진 방랑자로서 우연히 자기 시대에 존재한 것처럼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얼마나 위대했는가, 반면 그의 영향력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 1-② (독자의 부족, 증인의 부적절, 현대인의 둔감함, 허약한 시대에 적응) 처음에는 오랫동안 독자들이 부족했고, 그 다음 독자가 왔을 때 그의 증인들은 부적절했고, 책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현대인의 책에 대한 둔감함이 더욱 부적절했다. 거기에 쇼펜하우어를 허약한 시대에 적응시키려는 새로운 위험이 덧붙여져서, 그렇게 그는 서서히 알려지고 유명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은둔자이며 그의 영향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① (인식한 자의 과제 :: 위대한 천재를 위한) 이 시대의 본성에 내재한 무분별을 인식한 사람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와 우리시대를 깊이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쇼펜하우어를 알리고, 그들을 모아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힘으로 자연이 철학자들을 사용할 때, 오늘날의 미숙함을 극복할 수 있다. 위대한 철학의 영향을 방해하는 저항과 위대한 철학자의 탄생에 장애가 되는 저항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철학적 천재의 부활을 준비하는 일을 목적으로 정해야 한다. 2-② (현대인의 비뚤어진 인간성 :: 철학적 천재를 좌절시키는) 그러나 현대인의 인간성은 철학적 천재의 학설과 영향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결국 철학자의 부활을 좌절시키려한다. 미래의 위대한 인물은 비뚤어진 인간성 가운데서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힘을 낭비해야만 한다. 위대한 인물이 들어서려는 세상은 속임수로 둘러싸여 있다. ‘진보, 일반교양, 국민적, 현대국가, 문화투쟁’ 같은 허튼 개념들을 모든 말들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식처럼 몸에 달고 있다. 그토록 멋진 개념과 변덕스러운 욕구가 자기 시대에 유행한다는 사실이 미래의 천재에게는 가장 큰 장애가 된다. 

 

중요한 텍스트 > ① (철학과 정치) 철학의 광기를 몸속에 지닌 사람은 정치의 광기를 위한 시간이 전혀 없을 것이며, 매일 신문을 읽거나 정당에 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이 정치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 국가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며 이 국가는 많은 정치인들로 인해 파멸해도 할 말이 없다. ② (철학자) 내가 이 말로 칸트에게 부당하게 굴었다고 믿는 사람은,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철학자는 위대한 사상가일 뿐 아니라 진정한 인간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③ (학자 & 철학자) 그런데 언제 학자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가? 학자는 자신과 사물 사이에 개념-의견-과거-책들이 들어서게 놔두는 사람이며, 역사를 이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들은 사물을 가장 먼저 보지는 못할 것이며, 자신도 그렇게 가장 먼저 보여지는 사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에게 이 2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다. 철학자는 대부분의 교훈을 자신으로부터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전체 세계의 모상·축소판으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의 의견을 가지고 자신을 본다면, 그는 자신에게서도 남의 의견밖에 보지 못한다. 쇼펜하우어가 수많은 학자들에게 가장 큰 모욕감을 준 점은, 그가 그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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